[제국과 인간] 친일 여류문인 나윤숙의 해방 소감

[김갑수역사팩션 166] 3부 '열두 개의 눈동자' 편

등록 2008.12.06 15:55수정 2008.12.06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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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알아보지 못하는 김수임과 임주호

김수임은 조선이 해방되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언제나 일본이 영· 미를 물리치고 있다는 선전만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이강국을 떠올렸다. 그가 얼마나 좋아할지를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래서 그녀는 만세를 따라 불렀다.

그러나 임주호는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있을 뿐 만세를 부르지 않았다. 김수임은 임주호의 팔을 가볍게 잡아끌며 만세 군중 속으로 이끌었다. 그녀는 흥분과 감격을 누르지 못해 눈물까지 글썽이고 있었다. 임주호는 그런 김수임을 보며 미소 지을 뿐 끝내 만세를 부르지 않았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고 마음이 가라앉은 김수임은 자기와 동행한 남자가 갑자기 궁금해졌다. 나이는 자기보다 두셋 어려 보이는데 쑥스러움을 많이 타는 청년 같아 보였다. 그들은 세브란스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병원 문 앞에 이르자 임주호가 손가락으로 자기가 갈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는 가보겠습니다."
"어머, 병원에 안 들어가시고요?"

"제가 왜 병원에?"
"그렇다면 병원 분이 아니셨던가요?"

임주호는 가볍게 웃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병원 간호원이신가요?"
"아닙니다. 직원입니다."

"저는 반도호텔에 있는 임주호라고 합니다."
"저는 김수임입니다."

임주호는 김수임에게 시간이 나거든 한 번 놀러 오시라고 말하고 그녀와 헤어졌다. 그는 김수임이 언젠가 분명이 본 적이 있는 여자라고 다시 생각했다. 하지만 더 이상 어디서 어떻게 보았는지는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다만 임주호는 김수임이 매우 순진한 여자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는 김수임이 왠지 모르게 연민감을 자아내게 하는 여자라고 생각 들었다.

김수임은 김수임대로 임주호에 대해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낯익은 남자임이 틀림없었다. 그러니까 병원 사람인 줄 알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임주호를 좀 특이한 데가 있는 청년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보기에 임주호는 순수하고 조용하고 자상한 청년 같았다. 그리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어수룩한 면도 있는 남자 같아 보였다. 그는 고생 모르고 자란 청년이라는 느낌도 들었다.

그녀는 임주호가 요즘 청년과는 달리 세심한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왠지 보살펴 주고 싶은 감정을 일으키는 남자라고 느꼈다. 그녀는 적당한 기회에 반도호텔에 한 번 가 보리라고 마음먹었다.

엇갈리는 소감, 반가움과 착잡함

나윤숙도 해방 소식을 듣고 기뻐했다. 그녀는 이제 마음 놓고 한국어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착잡하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이 남긴 친일 글과 언행이 후회스러웠다. 그것이 언젠가는 문제가 될 것이라는 예감이 그녀의 마음을 어둡게 만들고 있었다. 그녀는 전승국이 된 미국을 심하게 비판했던 자신이 어리석었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그렇게도 국제 정세를 몰랐던 자신이 스스로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녀는 일본에 철저히 속아 넘어갔던 일이 분하기도 했다. 그녀는 이광수보다는 이강국이 더 옳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이제 가까웠던 문인들과 거리를 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당분간 그녀는 자숙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녀는 답답했다. 향후 정국이 어떻게 풀릴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김활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 어떻게 되는 건지 답답해서 걸었어요."
"나나 윤숙이나 죄를 많이 지었어. 젊은 것들을 죽음의 전장으로 내몰았으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할 일을 주실 거야. 그때까지 조용히 기다려 보자고."

"언니 말이 맞아요. 이제는 독립된 조국을 위해 못다 한 일을 하고 싶어요."
"기다려 보자고."
"네. 언니, 일이 있으면 저에게 꼭 연락주세요."

나윤숙은 이강국을 생각했다. 그는 지금쯤 감격에 차 있겠지? 그리고 그에게는 중요한 일이 맡겨질 거야. 그녀는 이강국을 수소문해 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전차에서 내린 나윤숙은 경성부청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조선호텔로 가려던 걸음을 멈추었다. 일본인과 친일인사들이 주로 모였던 그곳에 가는 일이 이로울 게 없다고 생각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을지로 초입에 있는 반도호텔을 떠올렸다. 미국인이 운영한다고 소문이 나 있는 호텔이었다. 아무래도 그곳에 가는 것이 나을 듯싶었다. 그녀는 그곳에 가서 세상 돌아가는 분위기를 느껴보고 싶었다.

지식인들의 대화를 듣는 나윤숙

나윤숙은 커피숍 모퉁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녀는 뒷자리에 앉아 있는 세 중년 남자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대화 내용으로 보아 그들은 서울에 있는 전문학교의 교수들인 것 같았다. 그들은 항복 당시 일본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왜놈들은 그게 원자폭탄인 줄도 몰랐다면서?"
"그러니까 화상을 입으면 간장을 바르거나 소금물에 적신 헝겊으로 찜질하라고 했다 하잖습니까?"

그들은 큰 소리로 일본 정부를 비웃고 있었다. 나윤숙은 세상이 바뀐 것을 피부로 느꼈다.

"폭탄 두 발에 20만이 죽었다면 대관절 그 폭탄은 어떤 것이기에?"
"아무튼 아메리카는 대단한 나라이지요."

"왜놈들은 폭탄을 맞고 스위스 정부를 통해 미국에 항의문을 보냈다지요?"
"허긴 나쁜 놈들은 끝까지 제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속성이 있으니까요."

"미국이 국제법을 어긴 것은 사실 아닌가요?"
"국제법에 원자폭탄을 쓰지 말라는 규정도 있나요?"

"비슷한 것은 있습니다."
"역시 전공 분야대로 관심이 있으시구먼."

"국제법에는 불필요한 고통을 수반하는 수단, 그리고 군인과 민간인을 무차별로 공격하는 행위 등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국가가 군대를 사용하여 무력을 행사할 경우 도덕적, 인도적 사항을 지극히 제한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관례 아닙니까."

"원자탄 사용이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남경대학살과 중경 무차별 폭격을 저지른 일본은 그걸 말할 수 없는 것이지요."

나윤숙은 그들이 누군지는 몰랐지만 문학을 하는 자신으로서는 반성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지식인들은 저렇게 앞서 가는데 문학을 한답시고 허구헌 날 애정 따위나 다루고 있는 자기와 조선 문인들에게는 문제가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아예 커피잔을 내려놓고 다시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이미 일주일 전에 천황이 항복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던데?"
"그런데도 왜놈들 대부분이 성스러운 결단에 의해서 전쟁이 종료되었다고 한다면서?"
"그렇다고 하더군."

"놈들은 끝까지 천황제 유지만은 양보할 수 없다고 했다던데?"
"그런데 자살을 미화하는 왜놈들의 경향은 언제부터 생긴 걸까?"

"패전자는 포로처럼 수치스럽다고 생각하는 자들이지."
"그들이 원래 그런 것은 아니었잖아?"

"그럼. 임진왜란 때만 해도 조선에 투항하거나 포로된 자가 많았다고."
"가까운 러-일 전쟁 때까지만 해도 포로되는 자가 많았고 자살하는 자는 거의 없었다구."

"그렇지. 그들의 자살 예찬은 아주 최근에, 그러니까 1930년 이후에 생긴 것이야."
"아무튼 그들은 원자탄이 아니었다면 끝까지 항복을 안 했을 거야."

그들이 가고 나서도 나윤숙은 오랫동안 멍한 정신으로 혼자 앉아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소설은 앞으로 약 20회 정도 더 연재됩니다.


덧붙이는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소설은 앞으로 약 20회 정도 더 연재됩니다.
#김수임 #해방 #나윤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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