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시골마을에서 2만원이 가지는 '가치'

라온아띠 태국이 태국에서 띄우는 편지 - 20

등록 2008.12.30 20:52수정 2008.12.30 20:52
0
원고료로 응원

2만원. 지금 한국에서 살아가는 당신에게 어느 정도의 '가치'를 지니는 돈일지 자못 궁금하다. 내가 살아가는 왕리앙 마을에서는

 

- 아이들이 진학하는 프레 지역 고등학교 중 가장 시설이 좋은 학교의 한 달 수업료

(기숙사를 비롯한 모든 비용 포함)

- 왕리앙 마을에서 1시간여 떨어진 도시에 출퇴근하는 이의 한 달 오토바이 주유료

- 왕리앙 학교의 고장난 수십개의 악기를 고치는데 든 수리비

 

대충 이 정도의 가치를 지닌다. 그리고 난 2만원이라는 돈을 이렇게 사용했다.

 

a

학교 소사아저씨, '라오' 형님 집에서의 무가타, 특별히 몇 몇 친척들과 컴퓨터 선생님이 함께 했다. ⓒ 고두환

학교 소사아저씨, '라오' 형님 집에서의 무가타, 특별히 몇 몇 친척들과 컴퓨터 선생님이 함께 했다. ⓒ 고두환

 

"고, 심! 심!"(태국어로 시도해보라는 정도의 말)

 

학교가 끝나고 귀가 하는 길은 그리 쉽지 않다. 몇 잔의 태국 전통 술이 기다리는 날이 많아서다. 대부분 고된 농사일을 끝내고 삼삼오오 둘러 앉은 왕리앙 마을 사람들은 우리와 비슷한 형태로 술(잔을 하나만 놓고 한 사람이 마시면, 그 잔을 돌려서 다른 사람이 마시는 식)을 마시곤 한다.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은 꼭 옆에 앉혀야 직성이 풀린다.

 

"어 고, 고, 심! 심!"

첫 잔을 거부하면 실례가 될 수 있다는 치앙마이 YMCA 스태프들의 '충고(?)'를 귀에 따갑게 들었던터라 자신있게 첫잔을 들이킨다.

 

"캬!"

 

보드카와 비슷한 전통 술이 목구멍을 타고 두어 번 더 넘어간다. 어떻게 한 잔만 받을 수 있겠나? 그런데 이것이 집에 갈 때 많으면 두 세 번 더 반복되곤 한다. 그러면 집에 도착했을 때 쯤 10잔이 넘는 보드카를 마신 꼴이 된다. 정신을 못차리고 바로 잠이 들어버리는 것이다.

 

그 속에선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간다. 사람들은 내가 이 곳에 왜 왔는지도 궁금하고, 내가 나중에 무엇을 할 것인지도 궁금하다. 내가 언제 결혼할지도 궁금하고, 마을에서 어떤 처자를 마음에 들어하는지도 궁금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언제 한국으로 돌아가고, 언제 다시 왕리앙으로 돌아냐가 궁금하다.

 

신기한 건 술이 한 순배 돌면 자못 말이 통한다는 것이다.

 

"오늘 밤 우리 집으로 오라고"

 

그렇게 거리를 지나가면서 사람들과 가끔 술을 한 두잔씩 마시다보니 재미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잔을 하나를 놓고 돌리기 시작하니 정작 술을 마시는 양은 보잘 것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거기에 사람들 사이에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는 것도.

 

그리고 휴일에 추수를 돕고, 오며가며 마을 사람들과 안면을 트기 시작하니 한 명 두 명씩 내게 이런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오늘 밤 우리 집으로 오라고"

 

그 다음에 이어지는 부연 설명을 알아 들을 수 없었다. 아마 내 태국어는 한국에 돌아갈 때 까지 한심할라나보다.

 

여하튼 그렇게 난 사람들의 초대를 받기 시작했다.

 

a

'무가타'의 기본 준비 모습, '2만원'이라는 말에 적지 않이 부담을 느꼈다. ⓒ 고두환

'무가타'의 기본 준비 모습, '2만원'이라는 말에 적지 않이 부담을 느꼈다. ⓒ 고두환

 

"한국 노래좀 들어봅시다!"

 

초대받은 집에 도착하니 눈이 휘둥그레진다. 수십 명의 사람이 화덕 비슷한 것을 둘러싸고 둥굴게 둘러앉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음식에 손을 대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가서 자리에 앉은 뒤, 자리는 시작됐다.

 

무가타(무 : 돼지 + 가타 : 가운데는 고기를 구워먹는 곳, 주변은 샤브샤브를 먹는 곳 / 불은 숯을 태우는 화덕)라고 명명된 이 자리, 이건 흡사 잔치였다. 앞쪽에 앉은 아저씨들은 물통과 그릇들을 이용해서 추임새를 넣고, 아주머니들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내게 "즐겁냐?"고 물어본다. 즐거웠다. 정신이 없긴 했지만.

 

그리고 젓가락 하나가 건네지더니

 

"한국 노래좀 들어봅시다"

 

트로트 몇 곡을 부르니 모두들 "태국 노래랑 똑같다", "아, 노래 참 잘한다"고 연신 박수를 친다. 그렇게 즐거워보일 수가 없었다.

 

'무가타', 이거 내가 한 번 해봐야겠다

그렇게 몇 번 더 초대를 받았다. 갈 때 마다 적게는 10여명에서 많게는 수십명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학교 선생님들한테 이런 자리에 대해 설명을 하니

 

'저놈이 어지간히 고기를 좋아하는구나'

 

정도의 반응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 공동체가 고된 일과를 마치고, 그것을 모두 둘러앉아서 승화시키는 독특한 방식이라고 생각됐다. 그런데 휩쓸려서 몇 번 다녀보니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거 생각보다 가격이 만만치 않을 것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한달에 우리나라 돈으로 15만원서 20만원 정도를 버는 왕리앙 마을 사람들이 무가타를 한 번 하는데 치르는 비용은 2만원이었다. 흔한 자리가 될 수 없는데, 내가 더불어 즐겁게 노는 모습에 무리를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하기로 했다. 뭐 나도 먹는 거고, 무작정 퍼주는 것도 아니고, 한국 가서 밥을 먹어도 2만원이 넘기 일쑤니까.

 

a

'무가타' 잔치를 처음 준비할 때 모습, '누이'와 '못'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 고두환

'무가타' 잔치를 처음 준비할 때 모습, '누이'와 '못'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 고두환

 

"피고, 할 수 있겠어?"

 

손 짓 발 짓 섞어가면서 나랑 가장 말이 잘 통하는 중학교 3학년 '못'과 중학교 2학년 '누이'에게 설명했다. 돌아오는 대답은,

 

"피고, 한 번 먹는게 비싼 건 맞는데 다 준비해서 할 수 있겠어?"

"어, 너희들이 도와주면!"

 

그래서 첫 번째 무가타 감행 장소는 '못'의 집에서 하기로 하고, 모든 재료를 구하러 마을 이곳저곳의 가게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고기를 사고, 당면에 배추에 나머지 이름 모르는 것들까지, 그리고 버섯을 샀다. 이 곳 사람들은 싫어하지만 같이 구워 먹으면 맛있다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해. 술도 사야되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누구네 집이든 다 술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라며 못이 친절하게 설명한다.

 

이것저것 다사니 딱 500바트 정도가 든다. 이 정도면 20명 안쪽의 사람들이 즐기면서 먹을 수 있는 양이라고 한다. 못의 집으로 가서 다듬고, 숯에 불을 붙이고, 육수를 끓이고.

 

오늘 내가 초대한 사람은 일단 우리 팀원들과, 못네 가족, 누이네 가족, 못과 누이 친구들까지, 모두 도착하니 15명 정도가 된다. 안 그래도 오늘 학교에서 바이오 가스 탱크를 묻느라 초대된 사람들이 모두 힘을 쓴 뒤였다. 다들 웃고 떠든다. 하루의 일을 회상하고, 중학교 3학년 아이들은 진학할 학교에 대해 이야기하고, 못의 아버지가 내게 한국은 왜 왕이 없냐고 묻는다.

 

자리가 마련됐다. 공동체의 점성이 느껴진다.

 

이후,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무가타'를 추진했다. 집을 고를 때도 가서 먼저 동네사람들과 협의도 해야되고, 동네에 없는 물품은 부탁하거나 시장이 서는 날 사야했다. 팀원들은 4천원씩 내서 2만원을 만들어서 자리를 만들자는데 동의했다. 우리는 동네에서 가장 친척이 많은 집, 학교 소사아저씨 집, 혼자사는 할머니의 집 등에서 무가타를 추진했다.

 

그리고 연말에는 동네 사람들과 모두 무가타를 하는 방법이 어떤건지 고민하고 있다.

 

a

연말, 한 해동안 수고했다며 학교 점심시간에 '무가타' 파티를 벌이는 '뮤' 선생님과 6학년 학생들 ⓒ 고두환

연말, 한 해동안 수고했다며 학교 점심시간에 '무가타' 파티를 벌이는 '뮤' 선생님과 6학년 학생들 ⓒ 고두환

 

2만원의 가치, 내가 속한 공동체의 잔치 판을 벌릴 수 있는 가치. 잔치에 먹을게 빠질 수 없고, 술이 빠질 수 없고, 그래야 가무가 온다.

 

나에겐 수많은 이들이 즐길 수 있는 촉매제가 바로 2만원의 가치다.

덧붙이는 글 | KB-YMCA 라온아띠 해외봉사단 태국 팀은 2008년 8월부터 2009년 1월까지 태국 북부 일대에서 봉사활동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2008.12.30 20:52 ⓒ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KB-YMCA 라온아띠 해외봉사단 태국 팀은 2008년 8월부터 2009년 1월까지 태국 북부 일대에서 봉사활동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라온아띠 #YMCA #KB #해외봉사 #잔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캐나다서 본 한국어 마스크 봉투... "수치스럽다"
  2. 2 황석영 작가 "윤 대통령, 차라리 빨리 하야해야"
  3. 3 300만명이 매달 '월급 20만원'을 도둑맞고 있습니다
  4. 4 '25만원 지원' 효과? 이 나라에서 이미 효과가 검증되었다
  5. 5 샌디에이고에 부는 'K-아줌마' 돌풍, 심상치 않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