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는 '눈' 한 번 보면 좋겠다

등록 2009.01.21 09:33수정 2009.01.21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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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진주는 '눈' 구경하기 무척 힘들다. 눈 다운 눈은 2001년 3월 말쯤 보았다. 이후 지리산에서 날려 오는 눈 정도였다. 올 겨울도 눈 구경하지 못했다. 진주에서 눈을 보지 못하면 발품을 팔아서라도 눈 한 번 보자는 마음으로 먼 길을 떠났다.

 

방장산은 지리산, 설악산, 한라산 처럼 사람들에게 그리 알려지지 않은 산이다. 소재지는 전라북도 고창군·정읍시와 전라남도 장성군 북이면의 경계에 있다. 내장산과 백양산 자녀와 동생쯤 되는 산으로 높이는 743m이다.

 

방장산에는 자연휴양림이 있다. 19일 밤 8시쯤 도착한 방장산 휴양림 주위는 하얗게 내린 눈이 쌓여있었다. 마흔 네살이나 먹은 사람이 신기했다. 얼마 만에 보는 '눈'인가? 하지만칠흑같은 어두움은 더 이상 하얗게 내린 눈을 벗으로 삼기는 무리가 있어 내일 아침을 생각했다.

 

같이 간 일행과 밤을 지새우기 위해 '쟁가(JENGA)'라는 놀이였다. 블록을 3개씩을 17단으로 쌓고, 하나씩 뺀 후 위로 쌓는 방법이다. 블록을 무너지게 하는 사람이 지는 놀이이었다. 밤을 지새우기는 안성마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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젱가 놀이는 몇 시간을 보내도 지루하지 않았다. ⓒ 김동수

젱가 놀이는 몇 시간을 보내도 지루하지 않았다. ⓒ 김동수

 

쟁가 놀이로 하룻밤을 꼬박 새웠다. 한 시간 정도 잠을 자고 아침 일찍 일어나 방장산을 올랐다. 얼마 전에 눈이 내렸는지 녹지 않는 곳이 많았다. 어떤 곳은 발목까지 빠졌다. 목사님들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산을 오르면서 어느 누구도 밟지 않는 눈을 밟는 것도 재미있겠지만 진주 사람이 먼저 간 나그네 뒤를 따르는 일도 나쁘지 않았다. 만날 앞서 가는 것만 좋은가? 뒤쳐서 가는 일도 뜻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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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지나 간 길도 신비롭다. ⓒ 김동수

사람이 지나 간 길도 신비롭다. ⓒ 김동수

 

같이 간 한 사람이 힘들다는 표정이다. 산을 오르면 사람이 된다. 뒤쳐진 이가 힘들다면 하면 앞에가는 이가 손을 내민다. 내민 손은 산과 그들을 하나되게 한다. 옆에 있는 나그네가 왠지 쓸쓸하게 보이지만 힘든 이를 끌어준다면 그 역시 기뻤으리라.

 

산이 험하지 않아. 힘들지 않았지만, 원래 등산을 좋아하지 않는다. 22년 전 하루에 3-4번씩 산에 올랐던 기억 때문이다. 산이 좋아 올랐으면 모르겠지만 군인으로 어쩔 수 없이 올랐다. 오르고 싶어 오른 것이 아니라, 오르지 않으면 군대 감옥에 가야했기 때문이다. 22년 전 앞에 가는 사람이 내 손을 잡아주었다면 산은 나에게 더 정감있게 다가왔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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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가는 이가 뒤쳐진 이를 끌어 주는 모습이 아름답다. 옆에 있는 나그네는 섭섭하지 않았을까 ⓒ 김동수

앞에 가는 이가 뒤쳐진 이를 끌어 주는 모습이 아름답다. 옆에 있는 나그네는 섭섭하지 않았을까 ⓒ 김동수

 

편백이 많았다. 조림을 한 모양이다. 오르는 길 편백은 수미터 씩 하늘를 향하여 오르고 있지만 정상 등성이 편백은 조림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쭉쭉 뻗어 올라가리라. 편백을 보면 올곧은 모습이다.

 

눈길을 옆으로 돌리지 않고, 몸을 비틀지도 않는다. 오직 하늘로 하늘로 올라갈 뿐이다. 이 녀석들이 수십년, 백년이 넘었을 때 어떤 모습으로 자랐을까? 궁금하다. 백년이 죽지 않고, 살아있다면 2009년 1월 20일 경남 진주에서 온 나그네들을 기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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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백 나무와 눈이 만났다. 조금 더 일찍왔으면 더 좋은 만남을 보았으리라 ⓒ 김동수

편백 나무와 눈이 만났다. 조금 더 일찍왔으면 더 좋은 만남을 보았으리라 ⓒ 김동수

 

오르는 길에 쉼터를 만났다. 30년된 콘크리트 집이 생각났다. 저곳에서 살면 어떨까? 맑은 공기와, 하얀 눈, 푸른 하늘을 벗삼아 산다면 의미있지 않을까? 하지만 뒤로 했다. 천성이 '산사람' 되기는 틀린 사람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룻밤 신세 질 수 있지만 하루, 일주일, 한 달, 일년을 넘어 평생을 내 삶의 안식처로 삼기에는 이미 타락했음 내 몸은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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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장산 오르는 길, 저런 집에 살면 어떨까 생각했다. ⓒ 김동수

방장산 오르는 길, 저런 집에 살면 어떨까 생각했다. ⓒ 김동수

 

파란 하늘과 길, 눈, 나무가 만났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지나간 눈길이지만 3년만에 찾은 진주 사람에게는 무슨 상관있으랴. 사람이 걸어간 눈길을 더럽다. 사람이 걸어가지 않은 눈길은 깨끗하다. 어찌 사람만 지나가면 이렇게 될까. 지나간 길도 깨끗할 수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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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간 사람들 뒤를 다시 걷는 의미도 있으리라 ⓒ 김동수

먼저 간 사람들 뒤를 다시 걷는 의미도 있으리라 ⓒ 김동수

 

이런 눈을 보고 무슨 눈을 봤다고 웃음짓겠지만 아니다. 열대 지방 사람들 보다는 낫겠지만 가뭄에 콩 나듯 눈 구경하는 나는 방장산에게서 좋은 선물을 받았다. 눈이 귀찮은 분들도 계시겠지만 눈 한 번 제대로 만났으면 좋겠다. 녹기 시작한 눈이 아니라 내리는 눈 한 번 보고 싶은 방장산 산행이었다.

2009.01.21 09:33 ⓒ 2009 OhmyNews
#눈 #방장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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