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에 빠진 이에게 필요한 '행복한 인문학'

[서평] <행복한 인문학>이 말하는 희망에 대해

등록 2009.01.21 09:57수정 2009.01.21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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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인문학> 표지 임철우,우기동,최준영 외 지음/ 이매진 펴냄 ⓒ 이매진

나는 배우지 못한 사람의 글을 알고 있다. 맞춤법이 틀리고, 주어와 서술어 관계가 형편없지만 먹먹한 느낌을 주는 글말이다. 최종학력이 중졸인 우리 엄마의 글이었다. 산업체에 들어가 미싱질을 하며 틈틈이 썼던 그 꼬깃꼬깃한 글. 내가 그 글을 본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이다. 그로부터 4년 후 엄마는 담도암 말기로 죽어가고 있었다. 엄마가 죽기 몇 달 전, 원주의료원 병동에서의 일이다. 엄마는 링겔병을 이고 산책을 다녀와 침대 모서리에 나뭇가지 하나를 꽃아 두었다. 그리고 내게 말했다.

'너,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를 아냐?'


<행복한 인문학>을 읽으며 새삼 그 기억이 떠오르는 이유는 생의 바닥에서 마지막 숨을 쉬는 이에게도 문학을 통한 자기성찰이 주는, 그 삶의 의미 때문이다. 나는 그 경험을 통해 가치 있는 삶을 위한 자기 성찰, 사유의 힘을 아직도 굳게 믿고 있다. 

<행복한 인문학>을 소개하려면, 먼저 얼 쇼리스의 <희망의 인문학>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얼 쇼리스는 소외계층을 위한 인문학 교육과정인 클레멘트 코스의 창립자다. <희망의 인문학>은 불평등 개념 위에 세워진 현대사회에서 소외계층에게 빵이 아닌 철학을 주어야 한다고 역설한 책이다. 21세기 등장한 빈곤의 개념에 대해 정의하고, 클레멘트 코스 사례를 담은 이 책은 한국사회에도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희망의 인문학>에서 생각해볼 만한 대목을 잠시 소개해볼까 한다.

"미국의 빈곤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인문학을 공부하자는 주장은 정치적 좌파와 우파의 견해와 모순된다. 좌파는 인문학 공부를 그만두었다. 그들은 인문학을 이미 죽고 없는 유럽 백인 남성들 중심의 문화적 제국주의의 산물이라고 치부하면서 인문학 연구를 모름지기 자신들의 몫이라고 우기던 보수주의자들에게 넘겨버렸다."

<희망의 인문학>에는 밑줄을 쳐가며 읽을, 다시 생각할 만한 많은 글귀들이 있다. 그러나 굳이 내가 위의 글을 발췌한 것은 얼 쇼리스가 말했듯이, '굳이 따지자면 인문학은 좌파들의 것이어야 한다'는 것 때문이다. 언제부터 인문학이 가진 자들의 고매한 학문이 되었는지, 생각해 볼만한 대목이다.

2006년 <희망의 인문학>이 발간되고 그로부터 2년. 한국식 클레멘트 코스를 담은 <행복한 인문학>이 세상에 선을 보였다. 이 책은 교도소 수용자, 자활근로자, 노숙인과 함께 한 문학, 글쓰기 수업, 철학, 역사학, 예술사 수업 사례를 담고 있다.


클레멘트 코스에 참여했던 도종환 시인은 처음 노숙인들에게 문학 강의를 하러 가면서 기대와 설렘 보다는 회의, 우려, 두려움이 더 많았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시를 함께 읽고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그는 희망을 보았다.

절망에 빠진 이에게 인문학을 들고 곁으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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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인문학> 겉그림 얼쇼리스 지음/ 이매진 펴냄 ⓒ 이매진

도종환 시인은 야만적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절망에 빠져 있는 이들에게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때, 만약 우리가 그 사람들과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다면, 한편의 시를 들고, 인문학을 들고, 그들 곁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경기광역자활지원센터에서 문학과 글쓰기를 강의한 고영직 문화평론가는 학생들을 만나면서 독서와 내면의 가치는 갈수록 위협을 받고 있고, '부자 되세요' 같은 말들이 우리들의 일상과 내면과 시스템을 지배하는 사회에서 좋은 삶과 좋은 사회란 실현 가능한 일일까 고민했다고 한다.

<행복한 인문학>은 한국형 클레멘트 코스를 꿈꾸었던 이들의 이러한 솔직한 고민들이 담겨져 있다. 거대 자본주의 사회에 인문학이라는 카드를 던진 이들. 스승이 되고자 했던 그들 자신도, 제자로 만난 이들에게도 이 프로젝트는 생소한 실험이었다.

책을 읽다보면 울컥하는 대목이 간간히 보인다. 현장에서 제자를 만난 스승의 입장에서도, 그리고 이 책을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도 눈물이 핑 돌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사람의 진정성' 때문이다. 여섯 살 난 딸아이를 위해 시를 지었던 교도소 수감자, 먼저 간 아내를 그리워하며 편지를 쓴 독거노인, 그동안 나로 인해 상처받은 이들에게 진심으로 사죄한다는 50대 남자의 이야기는 투박하지만 생생한 사람의 냄새를 느끼게 한다.

역사를 통한 인문학 수업도 눈에 띄는데 한국사회의 구조적인 특성상, 역사만큼 첨예한 수업도 없을 것이다. "5년간의 군대 생활의 상처가 6개월간의 인문학 교육으로 해소되었다"라고 말한 5.18 광주항쟁 당시 진압군 중대장이었던 이의 고백은 일그러진 우리의 역사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대목이다.

이 책은 인문학에 대한 이야기지만, 실상 텍스트 안에 갇혀 있는 학문을 말하지 않는다. 인문학을 통한 '소통하기'를 대안으로 삼고 있다. 성찰적 사고와 정치적 삶에 입문하는 입구 역할을 하는 인문학. 최근 다양한 통로를 통해 다시 인문학의 싹이 돋고 있다. 주변을 둘러보고, 인문학의 재발견에 동참한다면 새삼, 그 의미를 곱씹게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노동세상> 2월호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노동세상> 2월호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행복한 인문학 - 세상과 소통하는 희망의 인문학 수업

고영직 외 지음,
이매진, 2008


#인문학 #클레멘트코스 #행복한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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