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몰랐던 우리 가족의 '로맨스'

[온고을 사람들 28] '가족백서' 펴낸 이영희씨 가족

등록 2009.02.10 09:48수정 2009.02.10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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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로맨스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엄마의 어린 시절 습관이나 좋아했던 스타, 혹은 아빠가 학교 다닐 때 취미, 좋아했던 운동은? 그밖의 소소한 가족사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반의 반도 모르는 것이 '가족'이다.

가족의 의미를 되찾아보는 프로젝트 '가족백서-우리집으로 놀러와요'의 지난 석 달간의 과정을 마치고 그 결과물을 전시해놓은 자리가 전주 문화공간 '싹'에서 열렸다. 전주 인후문화의 집과 문화공간 '싹'이 함께한 이번 프로그램에 참여한 가족은 총 세 팀. 이영희(38)씨 가족, 오경화(40)씨 가족, 김은영(44)씨 가족이다. 이 중 이영희씨 가족을 지난 1월 30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이 가족은 도대체 어떤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을까... 기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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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씨와 설서윤, 설지윤. 남편은 이날 참가하지 못했다 ⓒ 안소민


이영희씨가 이 프로그램을 처음 시작하게 된 건 인후문화의 집의 '가족백서' 프로그램공지사항을 본 뒤였다. 평소 문화의집을 자주 이용하기 때문에 이번에도 아이들에게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아 신청했다. 그런데 막상 커리큘럼을 접해보고는 덜컥 겁이 났다.

'과연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우리 집은 특별한 게 없는데…' '우리 집은 평범해서 이야깃거리가 없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신청했던 두 언니들과 의논해서 문화의집 측에 그만두겠다는 말씀을 드리자고 약속까지 했었지만 아무도 말을 못했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수 없었던 것. 생각해보면 그게 차라리 좋은 기회가 되었다.

'우리 가족 Q&A' 당신은 과연 몇 점? 

커리큘럼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 어려운 것이기도 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첫 만남 이야기 듣기, 할아버지 시대의 유명가수 노래 듣기, 아버지의 고향을 함께 여행하기, 고향 자료 찾아보기, 할아버지 할머니의 애장품 살펴보기 등이다. 하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쑥스럽다는 이유로, 새삼스럽다는 이유로 또는 공부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알려 하지 않았던 것들이었다.

"저희 아이들(서윤 9세, 지윤 7세)과 함께 참여했는데 저희 아이들이 할아버지 할머니의 로맨스를 들려달라고 하자 처음에는 무척 쑥쓰러워하셨어요. '별것도 없는 이야기', '그런 건 알아서 뭐혀' 그러시면서 손사래를 치셨어요. 그래도 아이들이 자꾸 졸라대자 처음에 만난 이야기를 들려주셨는데 사실 저도 그때 처음 들은 이야기였어요."


'수줍은 산골처녀(서윤이의 외할머니를 말함)는 집안 아주머니가 소개시켜준 늠름한 외할아버지를 진외갓집에서 약혼식날 처음 보셨대요. 약혼식 하던 날 새신랑 외할아버지는 다리가 없는 진외갓집에 가기 위해 양복바지를 무릎까지 걷어올리고 냇가를 건너셨대요.'
- 초등학교 1학년 서윤이가 쓴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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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윤이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약혼식날 아침 사진. 위에서 서윤이가 설명한 사진이다. ⓒ 안소민


이번 프로그램이 아니었으면 영희씨도 영영 모르고 넘어갔을 이야기였다. 서윤이, 지윤이는 이 이야기를 통해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에게도 (당연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젊은 시절과 연애의 순간이 있었음을 새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예전에는 신랑이 예비신부를 만나러 신부의 집에 찾아갔든지, 다리가 없는 냇가에서는 징검다리를 건너야 했다든지 하는 시대적 문화까지도 배울 수 있었다.

서윤이, 지윤이는 지금 자기 나이만 했을 때의 엄마 사진도 처음 보았다. 엄마가 동생들과 할아버지 환갑잔치 때 찍은 사진이다. 그리고 아빠가 학교 다닐 때 교복을 입은 늠름한 모습을 보고 무척 신기해 했다. 엄마 아빠는 태어날 때부터 엄마 아빤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엄마가 사진 속에서 입었던 색깔이 고운 그 한복을 서윤이 지윤이도 한 번 입어보고 엄마처럼 사진을 찍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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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씨가 어렸을적 찍었던 사진. 왼쪽이 이영희씨. 오른쪽 두명의 아이가 이영희씨의 동생들이다. ⓒ 안소민


설서윤(9) : "할머니 할아버지는 태어날 때부터 할머니인 줄 알았는데 할머니 처녀시절에 찍은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엄마가 저처럼 어렸을 때 사진을 보니까 신기했어요. 엄마도 어린 시절이 있었다는 걸 몰랐어요."

설지윤(7) : "저는 할머니가 엄마에게 만들어준 한복을 입어봤는데 무척 재밌었어요. 삼촌과 이모가 저보다 더 어렸을 때 사진을 보니까 진짜 신기했어요. 귀엽기도 하구요. 그런데 엄마 어렸을 적 사진하고 언니(서윤)하고는 진짜 많이 닮았어요. 신기해요. 히히."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시작한 프로그램이지만 아이들과 함께 작업하는 동안 이영희씨는 자신도 몰랐던 시댁부모님의 이야기, 남편 이야기, 친정부모님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들을수록 새록새록했다. 가족과 함께 남편의 고향도 다녀왔고 친정도 다녀왔다. 옛날 고향사진과 지금의 풍경을 나란히 놓고 비교해 보면서 바뀐 곳과 사라져버린 곳을 더듬어보며 지난날을 추억하기도 했다.

"우리 집은 별 거 없는데..." "아~니죠!"

"사실, 처음에 시작할때는 무척 걱정스러웠어요. 우리 집은 특별한 이야기거리가 없는데… 라는 생각을 했지만 막상 해놓고 보니 이야기거리가 무척이나 많은 거예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요. 저도 우리 집에 이렇게 많은 이야기거리가 있을 줄은 미처 몰랐어요."

3개월의 과정을 거쳐 이영희씨 가족은 '가족백서'를 완성했다. 사진관에서 못 쓰는 양장앨범을 재활용하고 벽지를 역시 재활용해서 만든 가족백서는 온 가족이 직접 일일이 손으로 만든 세상에 단 하나뿐인 '명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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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씨 가족의 앨범. 친정부모님의 결혼사진과 이영희씨의 결혼사진을 나란히 장식했다. 시댁부모님의 결혼사진은 아쉽게도 없었다 ⓒ 안소민


그 안에는 서윤이 지윤이 가족의 역사와 꿈이 담겨 있었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첫 만남과 젊은 시절 모습, 엄마 아빠의 출생과 성장, 학창 시절의 모습과 결혼, 출산… 그리고 이어지는 현재 서윤이의 지윤이의 장래 희망도 담겨 있다.

"저희 집이 굉장히 평범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렇게 앨범으로 만들어놓으니까 굉장히 멋지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 가족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고나 할까요. 평소에 늘 마주하는 얼굴이지만 이 기회를 통해 각자의 처지에 대해, 가족의 독립적인 한 구성원으로서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어요."

작업 도중 가장 어려운 점이 있었다면 어떤 것이 있었을까. 서윤이는 앨범작업을 하는 중 일일이 글씨를 쓰는 게 가장 힘들었다고 한다. 이영희씨는 가족들의 바쁜 스케줄을 맞추어야 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고 한다. 힘들었다기보다는 조금은 아쉬운 부분이다. 다음에 한다면 더욱 잘할 수 있을 텐데라고 아쉬움을 비치기도 했다. 

"이 작업을 할 때 마침 신경숙씨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를 읽고 있었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 작업을 통해 친정엄마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어요. 어렸을 적에는 몰랐지만 우리 엄마는 참으로 훌륭했구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구요. 이번 기회를 통해 저희 엄마의 자리를 다시 찾아드린 것 같아 기뻤습니다. 세상의 모든 엄마라는 존재는 그 집안의 보물창고라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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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소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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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씨 가족의 명함. 지윤이의 명함은 내가 지금껏 받은 명함중 최연소 명함이다 ⓒ 안소민


2. 명함 만들기 - 가족의 '이름 찾기'

"명함이 생겨서 무척 기뻤어요. 제 친구중에 명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저 밖에 없어요."

내가 명함을 건네기도 전에 서윤이가 먼저 명함을 건넸다. 사랑의 총알을 쏘고 있는 깜찍한 서윤의 사진아래에는 서윤이를 설명하는 다음의 글귀가 씌여있었다.

'나는 우리 집의 책 읽는 아기파랑새입니다. 왜냐하면 하루에 10권이 넘는 책을 읽으니까요.'

지윤이의 명함은 외할머니가 쓴 오래된 재봉틀과 함께 찍은 사진을 배경으로 했다.

'나는 우리 집의 귀염둥이. 나는 화가가 되어 예쁜 나를 그리고 싶어요.'

이번 프로그램에서는 모든 가족 구성원이 자신에게 걸맞은 명함을 스스로 만들었다. 명함에 들어간 글귀는 본인이 지은 것. 명함을 만듦으로써 가정 안에서 자신의 존재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작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명함'. 명함을 만들면서 자신은 가정 안에서 어떤 위치에 존재하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고 했다. 또한 명함에 적은 이름에 걸맞은 행동을 해야 하니 책임감도 더불어 생긴다고 했다.

덧붙이는 글 | 이번 프로그램과 전시는 이영희 가족 외에도 오경화씨와 김은영씨 총 세 가족이 함께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번 프로그램과 전시는 이영희 가족 외에도 오경화씨와 김은영씨 총 세 가족이 함께했습니다.
#가족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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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스또엡스키(1821-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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