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 일도 없는 영어능력, 왜 귀찮게 시험하는 거야?

[외국인의 눈으로 본 한국의 영어교육 1]

등록 2009.02.09 10:23수정 2009.02.09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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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글은 한국의 영어 배우기에 관한 글에서 처음 편입니다. 흥미로운 주제인 만큼 할 말이 많아서 몇 개의 파트로 나누었습니다.... 기자의 말

 

외국어 하면 비밀요원이 될 수 있을 거야!

 

일단 내 얘기로 시작해 보고자 한다. 어릴 적부터 나는 외국어에 깊은 매력을 느꼈다. 내가 모르는 말로 얘기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 소리가 얼마나 이국적인지, 또 나도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신날지 하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다른 사람들 -당시의 나처럼- 은 알아들을 수 없는 '비밀 언어'로 말할 수 있다는 생각이 좋았다.

 

내가 맨 처음 배운 세 가지 언어는 영어, 프랑스어 그리고 독일어였다. 모두 나와 형이 아주 어린 나이였을 때, 집에서 부모님이 처음 가르쳐주신 것이다. 우리 둘 다 배우는 데 자연스럽게 흥미를 가졌지만, 체계적으로 배우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어휘 목록을 놓고 외우는 데 시간을 보낸 기억은 한 번도 없었다. 어릴 적엔 외우는 것을 정말 싫어했고, 어떻게 보면 아직도 그렇다. 그리고 부모님이나 학교로부터 언어를 배우는 데 어떠한 압박도 전혀 없었다. 이를테면 외국어를 배우는 것이 "사는 데 중요하다"는 말은 누구에게서도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외국어는 그냥 재미로 하는 것이었으니까.

 

"비밀 언어"라고 언급한 부분으로 돌아가서, 어릴 적 나는 다른 언어들을 완벽하게 말할 수 있으면, 다른 나라 사람들과 잘 섞여서 제임스 본드 같은 비밀요원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상상했다. 그런 즐거운 상상이 도움이 되었는지 배우는 것이 재미있었고 새로 배운 단어들은 아주 작은 일로라도 바로 바로 써먹으려고 노력했다. 학교에서도 외국어 시간은 다른 친구들과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었고, 활동적이었으며, 수학 등의 과목에 비교하면 노는 시간과도 같았기 때문에 항상 재미있기만 했다.

 

압력이나 엄격한 성적평가 등이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마침내 그 언어들을 좀더 의미있는 레벨로 쓸 수 있게 되자 '내가 이만큼 능숙해졌구나'라는 성취감 때문에 계속 정진해나갔다. 그 결과 지금은 재미있게 배웠던 언어 중 몇 가지를 막힘없이 쓸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다음으로 시작한 외국어는 당연히 한국어와 그 다음엔 일본어였다. 둘 다 학교생활이나 미래 희망 직업과 전혀 관계가 없었지만 그냥 배우고 싶었다. 그리고 더 나이를 먹어가는 지금에도 나는 여전히 그런 느낌을 간직하고 있다. 미래 내 회사를 위한 제품을 고르기 위해 와인 제조자들을 만나러 갔던 이탈리아에서도 '이탈리아어로 말할 수 있는 게 거의 없구나'라는 걸 깨닫자 그게 너무 짜증이 나서 이탈리아어를 좀 배워둬야겠단 생각을 하기도 했다.

 

아랍어능력시험 요구하는 회사가 거의 없는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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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의 한 도서관 기본적인 '스펙'인 토익 점수를 조금이라도 더 올리기 위해 많은 취업 준비생들이 매달린다. ⓒ 이나영

▲ 대학의 한 도서관 기본적인 '스펙'인 토익 점수를 조금이라도 더 올리기 위해 많은 취업 준비생들이 매달린다. ⓒ 이나영

 

이 위의 일들은 모두 한국이 아닌 곳에서 언어를 배운 내 경험담이다. 지금 나는 한국에서 외국어 배우기에 대한 내 의견을 나누고자 하며, 그것을 시작하기에 안성맞춤인 이야기가 여기에 있다. 연세 MBA프로그램에 지원했을 때, 토익을 보라는 얘기를 들었다! 내가 원어민이라는 사실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는데, 부분적으로는 내가 대학공부를 프랑스에서 "프랑스어로" 마쳤다는 이유였다.

 

그때껏 생전 언어 능력시험을 본 적이 없던 나는 토익이 얼마나 비싼지를 보고 나서, 다음엔 또 시험이 하찮고 사소하지만 끝없이 많은 질문들로 수험자들을 시간 압박감에 몰아넣고 기를 죽이도록 만들어진 우스꽝스런 게임이란 것을 보고서 아주 기분이 나빠졌다. 그렇지만 "연세에서 외국인의 영어능력도 그렇게 엄격히 테스트를 한다면, 거기 한국 학생들 영어 실력도 최고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 기대는 현실에서 좀 거리가 있다는 걸 금방 깨달았지만 말이다.

 

정확히 바로 거기서 딜레마가 시작된다. 학교에서 몇 년간 매일 영어수업을 듣고, 거기에 학원과 과외를 받고도, 명문대를 나온 학생들조차 영어로 기본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 힘들다는 것. 듣기 능력과 말하는 방식이 가장 큰 문제이긴 하지만, 한국 학생들이 그래도 어느정도 한다고 생각하는 쓰기·문법 영역도 잘 발달되어 있지 않다는 것.

 

대신 한국학생들이 정말 잘하는 것은 토익, 토플 혹은 어떤 다른 영어 시험에서도 좋은 성적을 받는 것이다. 이것으로 미국 대학이나 국제적 직업을 가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영어 실력 불충분으로 판명나는 데는 5분 미만의 대화시간으로 충분하기 마련이다. 그 시험이 어차피 영어를 쓸 일도 거의 없는 한국 회사 취직을 위한 거라면 사실이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일에 쓸 일도 없는 능력을 애초에 왜 귀찮게 테스트하는 것인가?"

 

결국 영어를 말하는 것은 일반적 지성의 기본 지표가 아닌 후천적으로 습득한 매우 특정한 기술에 불과하니, 그것을 기본 조건으로 지정하는 것은 직업에 영어로 의사소통을 할 일이 없다면 쓸모없는 것이다(아랍어가 훨씬 배우기 어렵겠지만 아랍어 능력시험결과를 요구하는 회사는 거의 없는 이유가 이 때문일 것이다).

 

이번 글을 마치며, 한국이 영어배우기에 보이는 두 가지 극단적인 현상에 대해 언급하려 한다. 하나는 영어 능력에 대한 극단적인 집착(대학 입학, 구직, 사실상 미래가 영어 능력에 달려 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 노력과 긴 공부시간 그리고 상당한 돈을 투자함에도 불구하고 나오는 전혀 "적당하지 않은" 결과다.

 

이 모순과 한국 영어교육의 효과가 낮은 이유에 대해 "한국의 영어교육" 다음 파트에서 계속 쓰려고 한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독일에서 태어나 10여년 전 첫 방한한 후 거의 매년 한국에 오다가 2006년 서울로 이주했다. 독일 유러피안 비즈니스 스쿨에서 경영학 학위를, 2008년엔 연세대에서 MBA를 취득하였다. 그 후 서울에서 '스텔렌스 인터내셔널'을 설립하여 유럽 라이프스타일 제품 등을 수입판매중이다. 

홈페이지는 www.stelence.co.kr 
최근 한국에서의 경험을 쓰기 시작한 개인 블로그는 http://underneaththewater.tistory.com/

2009.02.09 10:23 ⓒ 2009 OhmyNews
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독일에서 태어나 10여년 전 첫 방한한 후 거의 매년 한국에 오다가 2006년 서울로 이주했다. 독일 유러피안 비즈니스 스쿨에서 경영학 학위를, 2008년엔 연세대에서 MBA를 취득하였다. 그 후 서울에서 '스텔렌스 인터내셔널'을 설립하여 유럽 라이프스타일 제품 등을 수입판매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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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한국교육 #TOEIC #영어교육 #외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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