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사람] 동란의 소용돌이, '어찌해야 하나'

[김갑수 한국전쟁 역사팩션 6회] '두 나라'

등록 2009.02.12 15:13수정 2009.02.12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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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오가 간 후, 자기가 할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 김성식은 학교에서 나왔다. 그는 명륜동 사거리 방향으로 걸어 나갔다. 작은 개천을 사이한 학교의 담에는 무수한 벽보들이 붙어 있었다. 거리에도 한동안 잠잠하던 벽보들이 요란하게 되살아나 있었다. 물론 내용은 불과 몇 달 사이에 피아(彼我)가 정반대로 바뀐 것이었다.

'만고역적 이승만 괴뢰도당 전면적 궤멸' 벽보 중에는 이승만을 주적으로 삼는 것이 가장 많았다. 그래서 ‘이완용의 정신적 후예 이승만 타도’가 있는가 하면, 심지어는 이승만을 생포했다는 문구도 있었다. 다음으로는 김일성과 인민군을 찬양하는 벽보가 많았다. ‘우리의 영명한 지도자 김일성 장군 만세’, ‘조선민주주의공화국의 영용무쌍한 인민군 만세’ 등이 있었다. 그 다음으로는 소련에 경의를 표하는 벽보였다. ‘조선민족의 친애하는 벗, 약소민족의 해방자 스탈린 대원수 만세’, ‘세계 민주진영의 성벽 소련 만세’ 따위의 구호들이 집집마다 담벼락마다 붙어 있었다.

길바닥에서 중국군 신분증을 줍다

김성식은 길 가는 사람들의 옷차림을 보고는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모두들 허름한 노동복 바지에 낡은 셔츠 바람이었다. 보릿짚 모자를 쓴 사람도 전쟁 전보다 훨씬 많았다. 그들은 마치 복장을 미리 합의라도 하고 나온 듯이 보였다. 사람들은 놀라울 정도로 기민하게 전쟁에 적응해가고 있는 것이었다. 자기처럼 신사복에다 중절모까지 쓴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평소 의복이 너무 소박하다 하여 주변 사람의 충고를 들은 적이 있는 그였다. 그런데 오늘만은 그의 복장이 단연 호사스러웠다.

김성식은 거리 구경도 할 겸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길바닥에 얇은 수첩 같은 것이 떨어져 있었다. 집어 보니 중국 팔로군에서 발부한 군인 신분증이었다. 김익로라는 조선인 이름이었다. 그는 좋은 사료를 하나 얻게 되었다고 생각하며 기뻐했다.

탱크를 소련병이 조종한다는 소문이 나 있었지만 눈으로 직접 본 것이 아니므로 믿을 바는 못 되었다. 이 전쟁에 중국군이 가담했다는 말은 반신반의했는데, 적어도 중국 군적을 가진 조선인이 전투에 참가하고 있는 것만은 신분증으로 보아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었다.

김성식은 창덕궁 돌담을 끼고 돌아 서울대학병원 영안실 앞으로 걸어 나갔다. 행인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철망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병원 마당에는 거적으로 아무렇게나 덮어 둔 시체 열댓 구가 있었다. 그는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인민군이 들어와서 대학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던 국군 부상자들을 끌어내어 총살해 버린 것이라고 했다.


‘설마 그랬을라고?’ 김성식은 마음속으로 사실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사실이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그는 공포감을 느끼며 정릉 집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세상이 바뀐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지 도저히 추정조차 할 수 없었다.

역사를 전공하고 명색이 최고학부라는 문리대 교수로 있는 그였지만 앞일을 모르는 데는 초동급부(樵童汲婦)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불현듯 자기 자신이 작고 초라하게 느껴졌다. 민족의 미래도 암담했지만 자신을 바라보고 사는 아내와 세 아이에 대한 걱정도 그에 못지않았다.

김성식은 경상도 농촌에서 중농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농촌에서 태어나 자라다 보니 농민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대구고보 2학년 재학 중 독서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미결수로 복역했다. 이 일로 그는 학교에서 제적되었다. 일본인 검사는 “16세 조선인 사상범을 만드는 일은 제국주의 일본에 해롭다”는 말을 하며 기소하지 않고 석방시켰다. 하지만 1년 동안이나 복역했으니 실형을 산 거나 진배없었다.

집에서 독학하던 소년 김성식은 동아일보에서 실시한 농촌구제책 논문현상모집에 응모하여 1등으로 당선한다. 심사위원들은 당선자가 소년임을 알고는 깜짝 놀랐다고 했다. 그의 논문은 2주 동안 동아일보에 게재되었다. 적지 않은 상금으로 그는 일본 구주(九州)의 한 중학교에 편입하여 1년 만에 과정을 마쳤다. 조선으로 돌아온 그는 사학· 문학· 법학 과목이 개설되어 있는 경성법전을 다녔으며 이후 금융조합(지금의 농협)의 이사로 재직했다.

학병 소동을 피해 노동 수용소에 들어갔다 나온 청년 김성식은 경상도 고향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다시 금융조합에 복직한 그는 서울 연합회에 영전되어 지도과장으로 근무하다가 사직하고 경성대학에 진학했다. 졸업 후 그는 조교를 거쳐 경성법전에 출강하다가 조교수로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한편 해방 직후인 1946년 그는 <조선역사>를 저술했다. 식민사관에 오염되지 않은 그의 통사는 전국 중·고·대학생들에게 널리 읽혔다. 문학과 국학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는 미국 작가 펄벅이 중국 농촌을 배경으로 해서 쓴 소설 <대지>와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번역하고 있는 중이었다.

밀어닥치는 동란의 소용돌이

이튿날 학교 조교가 김성식의 집으로 찾아왔다. 조교는 학교 본부의 전달 사항을 가지고 왔다. 거기에는 학교가 인민군 군대에 접수되었다는 사실과 함께 매일 아침 정시에 출근해 출근부에 도장을 찍어야 한다는 지시가 들어 있었다. 그는 어제 교무과장실 분위기로 보아 학교에 더 이상 나가기가 싫었다. 하지만 인민군 군대에서 학교를 접수하여 사용하기로 했다고 하니 다시 나가 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면 부득이 회의에도 참석해야 했다.

그는 내심 전란의 어지러움에 휘말려들고 싶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비켜가고 싶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하고 싶은 공부와 연구가 많기 때문이었다. 그는 일제 때 정치적으로 휩쓸리다가 삶이 망가져 버린 인사들의 행적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행태를 보며 자신은 평생 학문 이외에는 다른 것에 일절 관심을 두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그였다.

불과 1주일 전인 6월 27일, 그는 다시 한 번 그런 생각을 다지게 되었다. 밤사이 대포 소리가 가까워져 잠을 못 이룬 그는 새벽에 귀 기울인 라디오에서 신성모 국무총리서리의 특별 방송을 들었다. 어제 밤까지만 해도 국군이 38선 이북으로 북진하고 있다고 하더니 난데없이 정부가 수원으로 옮겨가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설마 서울이야? 하며 전황에 일일이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고, 하던 일을 계속하리라고 마음먹었던 그는 단박에 기운이 빠져버렸다. 마침내 동란의 소용돌이는 그에게까지 밀어닥치고 있었다. 그는 깊은 수심에 잠겨 들었다.

‘같은 민족끼리 서로를 구렁텅이에 밀어 넣는 이 난국에 나는 어찌 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는 평소 하던 대로 마당으로 나가 닭과 오리를 둘러보았으나 번잡하고 초조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그의 집 문간방에는 그의 학교 학생 두 명이 자취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충청도에서 올라온 유학생들이었다. 그는 학생 둘을 마당으로 불렀다.

“너희는 내 말을 들어야 한다. 당장에 짐을 묶어서 고향 집으로 가야 한다.”

선생의 지시를 거역하기는 어려운 그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딱히 떠나야 할 정도의 사정인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듯했다. 그들은 이 난리를 우습게 보고 있었다. 이제껏 38선 부근에서 숱하게 있었던 남과 북의 작은 전투 정도나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이제 갓 스물 안팎의 청년들이었다. 김성식은 그들에게 사정을 설명해 주어 이해시키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 들었다. 그래서,

“젊은 너희는 이곳에 남으면 불행해진다. 그러므로 망설이면 안 된다. 전황이 예상보다 훨씬 긴박하다. 오전에 차를 타지 않으면 고향에 가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니 서울을 빠져 나가는 일 자체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 너희들을 부모에게로 보내야 내 맘이 놓인다. 또한 그것이 나의 도리이기도 하다. 이런 난리 통에 내가 남의 자식을 데리고 있을 수가 없다.”

이런 식으로라도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을 해줘야 옳았다. 하지만 그는 어쩐 일인지 그러고 싶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다짜고짜 두 청년을 몰아세웠다.

“짐이 다 뭐냐? 길도 위험하고 차도 붐빌 것이다. 가방 하나만 들고 학교에 가는 것처럼 하고 떠나라.”

청년들은 아내 정숙이 차려 준 아침밥을 시름없이 먹고 있었다. 그는 숟가락을 빼앗다시피 하며 다시 재촉했다.

“주먹밥으로 뭉쳐서 가지고 떠나라. 아침 차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 빨리 가서 기차를 잡아야 한다. 기차를 놓치면 돌아오지 말고 걸어서라도 고향으로 가라.”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사학자 김성칠 선생의 저서 <역사 앞에서>를 참조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사학자 김성칠 선생의 저서 <역사 앞에서>를 참조했습니다.
#김성식 #동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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