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족보, 이젠 교수님이 직접 올려줘요

변화하는 대학의 '족보 문화'... 근본 문제는 여전

등록 2009.02.18 09:32수정 2009.02.18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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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대 공대 복사대. 시험기간이 되면 학생들에게 복사비를 받고 족보를 판매한다 ⓒ 이지수


지난 10일, 이준구 서울대 교수는 올해 정시 합격생들을 대상으로 한 특강에서 우리나라의 단순주입식 교육 과정을 비판했다. 이 교수는 '족보'를 언급하면서 "학점이 나빠도 좋으니 진취적으로 공부하라"고 말했다. 족보에 의존해 공부하기보다는 책을 광범하게 읽어 식견을 넓히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족보'란 일반적인 의미의 족보가 아니라 대학 교수들이 그 동안 출제한 시험 기출 문제와 정답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족보'로 불리게 된 데는 아마 둘 사이의 공통점 때문일 것이다.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대물림된다는 점, 해마다 내용이 누적된다는 점, 그리고 그것을 갖고 있는 사람은 일종의 '특권'을 누린다는 점이 둘의 같은 점이다..

이준구 교수의 특강이 기사로 보도된 이후, 언론들은 '족보'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몇몇 언론은 칼럼을 통해 족보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내비쳤다. 족보가 창의성을 저해하는 '단순주입식 교육의 폐단'이라는 것이다.

족보 사용에 대해 부정적인 대학생은 여전히 많다. 보통 '정보력의 불공평함'을 들어 족보 사용을 반대했다. 연세대 류아무개(23)씨는 "누구는 구하고 누구는 못 구하면 오히려 공부한 사람보다 인간관계가 원만하고 잘 노는 사람들이 성적을 잘 받게 돼 불합리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학생은 이준구 교수와 같은 의견을 내놓았다. 서울대 정아무개(26)씨는 "족보를 보다보면 일괄적인 해답만을 쓰게 돼서 창의성이 떨어지고 공부의 깊이가 없어진다"며 "족보를 보기보다는 다각적으로 공부해야 한다"고 말했다.

몰래 돌려봐서 불평등을 초래한다는 족보는, 최근 들어 그 의미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중앙대 이아무개(24)씨는 "요즘 몰래 족보를 돌려 보는 학생은 드물다"며 "함께 공유하는 경우가 더 많다"고 말했다. 이어 "핵심을 정리해 놓은 부교재로 쓰인다고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족보의 진화... 교수가 직접 올리고, 학교에서 판매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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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람실에서 시험 공부를 하고 있는 대학생. ⓒ 이지수


이준구 교수는 특강에서 "서울대생의 70~80%가 족보에 의존해 공부하고 있다고 생각된다"고 말했다.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실제 많은 대학생들이 족보를 사용한다. 졸업하기 전까지 대부분의 학생들은 좋든 싫든 족보를 한 번쯤은 보고 지나칠 정도다. 그만큼 족보는 학생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고, 시험기간에 매우 유용한 자료로 쓰인다.

족보의 활성화 정도는 단과대학마다 다르다. 인문계보다는 이공계가 더 활성화 돼 있다. 인문계는 자신의 생각을 서술하는 시험이 많은 반면, 이공계는 어느 정도 정해진 공식을 풀어내는 시험이 많기 때문이다.

인터넷 상에 대학 족보 커뮤니티도 있다. 대학 족보 커뮤니티가 있는 S대의 경우에는 학생들이 시험 기간에 족보 커뮤니티에 족보를 올리고 다른 족보를 다운 받아간다. 반드시 일정 수의 족보를 올려야 다른 족보를 받아갈 수 있기 때문에, 시험 기간에 누가 먼저 족보를 올리나 '심리전'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 경우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족보를 볼 수 있지만, 여전히 커뮤니티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불공평하다.

최근에는 이와 같은 문제를 개선하고자, 몇몇 대학의 교수들이 대신 족보를 올리기도 했다. 몇몇 사람들이 이득을 본다면 차라리 모두가 족보를 보는 것이 낫다는 뜻에서다. 이때는 물론 정답이 쓰여 있지 않은 문제만 있고, 교수들은 시험 시간에 이를 변형시킨 문제를 출제한다.

이런 경우에는 모두가 족보를 볼 수 있어 공평하다. 학생들은 역량에 따라 다방면으로 공부를 해도 불안감이 없다. 서강대 김아무개(22)씨는 "누구나 볼 수 있는 족보는 편법이 아니다"며 "족보를 통해 답이 아닌 학습 포인트를 가르쳐 주는 교수의 배려"라고 말했다.

아예 학교에서 족보를 판매하는 경우도 있다. S대와 Y대의 공대 복사대에서는 시험기간이 되면 학생들에게 복사비를 받고 족보를 판매한다. 물론 이 때는 최신 족보를 구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어느 누구나 쉽게 족보를 구할 수 있는 만큼 공평하다. 이처럼 요즘 족보는 '일부 학생들만의 전유물'에서 '누구나 소유할 수 있는 것'으로 변하고 있다.

복사대에서 파는 시험 족보 ⓒ 이지수


족보, 이제 '일부 학생들만의 전유물' 아니다?

족보의 의미는 정보력의 측면만 변한 것이 아니다. 창의성 측면에서도 변하고 있다. 교수가 족보에 있는 문제를 변형해 시험에 내는 경우, 학생들에게 족보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교과서가 된다.

서강대 임아무개(25)씨는 "교수가 설명한 부분을 이해하지 못했을 때 족보를 통해 핵심 내용을 파악하면 더 체계적으로 공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서울대 윤아무개(23)씨는 "내용이 너무 많아서 무엇부터 공부해야 할지 모를 때, 족보는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 학습 방향을 제시해 주기도 한다"고 말했다.

기존에 여겨졌던 족보의 부정적인 측면과 달리 강의 내용을 익히고, 학습 의욕을 높여줄 뿐만 아니라 창의적인 사고를 키우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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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대의 대학 족보 커뮤니티. 시험 기간이 되면 많은 학생들이 이 커뮤니티를 활용한다. ⓒ 인터넷 화면 캡처


그러나 여전히 남는 문제는...

이처럼 족보의 의미가 변해도 여전히 문제되는 경우는 있다. 족보가 해를 거듭해도 변함없는 경우다. 이에 대해 성균관대 박아무개(26)씨는 "족보를 대물림하는 것은 학생 잘못도 있지만 똑같이 문제를 내는 교수의 잘못도 있다"고 말했다. 말 그대로 '토씨하나 안 틀리게' 문제를 낸다면, 학생들은 다음 해에도 문제가 그대로 나올 것을 믿고 공부한다는 것이다.

서울대 정아무개(26)씨는 "오히려 교수님들이 족보에 얽매이게 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학생들이 교수의 출제 성향을 믿고 공부하다 보면 교수도 학생들을 '배신'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결국 '족보가 문제냐, 교수가 문제냐'의 문제다. 확실한 것은 교수가 해마다 문제를 똑같이 출제한다면, 족보는 이러나저러나 영락없는 '독'이란 사실이다.
#이준구 #족보 #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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