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짝에서 띄우는 봄 편지

[윤희경의 山村日記] 오목아, 복수초가 피었어

등록 2009.02.15 17:11수정 2009.02.15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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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빛이 산골짝 계곡웅덩이에 파랗게 잠겨있다. ⓒ 윤희경

봄빛이 산골짝 계곡웅덩이에 파랗게 잠겨있다. ⓒ 윤희경

오목아,

지난 주말엔 오랜만에 봄비가 내렸단다. 겨울가뭄으로 땅이 메말라 흑 먼지가 풀풀거리고, 버석거리는 가슴에 숨이 차오라 죽을 맛이었는데 비가 오다니 얼마나 반가웠겠니. 초저녁부터 내리기 시작한 빗줄기는 밤중쯤엔 뒤 쪽문 사이 낙수 물로 추적거리는 거야. 소리가 하도 좋아 새벽 세시까지 잠을 이룰 수가 있어야지.

 

밤비소리가 왜 이리 좋은지 모르겠다. 들어들어도 싫증나지 않는 단조로움, 쪽문을 비집고 스며드는 정겨움, 주룩-주룩 톡-톡 맑고 청아한 자연교향곡, 자근자근 씹어내는 봄 이야기…. 겨우내 쌓였던 체증을 한방에 녹아내리는 기분이다. 급기야 쪽문을 열고 툇마루를 서성이다 봉당까지 나오고 말았단다. 나무와 새 바위, 온 동네가 잠든 산골짝 새벽녘에 혼자 낙수 물 소릴 들으며 청승을 떠는 촌부를 생각해봐. 웃긴다. 

 

봄비가 지나간 자리, 아침 햇살이 영롱하다. 맑고 싱그러운 세상이 열리고 있다. 단비가 스쳐간 땅, 풀밭, 나무숲에서 달착지근한 냄새가 피어오른다. 신선하고 상큼한 냄새가 얼굴에 닿을 때마다 살아있음에 고마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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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감자 눈 ⓒ 윤희경

씨감자 눈 ⓒ 윤희경

오목아,

창고에서 겨우내 잠자던 감자 박스를 하우스로 옮기자니 밤새 내린 봄비소리에 감자가 눈을 떴어, 창고 안에서 얼마나 봄소식을 기다렸을까 몰라. 몸이 마냥 근질근질했겠지, 생명은 이리 신비스럽단다. 그러고 보니 우수가 내일모레구나, 이제부터 며칠간 봄볕 맛을 실컷 쏘였다가 눈을 따 줘야해.

 

봄비는 낮은 들녘을 일으켜 세우고, 개 응달 여기저기 남았던 잔설을 녹여 내리고 있다. 산골짝을 타고 흘러온 개울물 늘어 귀를 간질이고 있다. 골짝을 건너온 개울물 소리가 사람의 속내를 얼마나 간질이는지 산사람이 아니고는 잘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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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짝 계곡물 ⓒ 윤희경

산골짝 계곡물 ⓒ 윤희경

개울물이 흐를 대로 흘러와서는 웅덩이에 모여 봄 이야기 나누자한다. 지나던 파란 하늘이 물웅덩이 속으로 덤벙, 봄빛이 역력한데 저기 버들강아지 좀 보련, 참 신기도하다, 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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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머금은 버들강아지 ⓒ 윤희경

봄비 머금은 버들강아지 ⓒ 윤희경

오목아,

뿐만이 아냐, 봄비가 지나간 자리마다 어린 목숨들이 출석을 부르지도 않았는데 목을 내밀기 시작하는 거야, 목련 나무 밑 노란 꽃물이 보여? 작년보다 조금 늦었어, 제대로라면 설 때쯤 눈 속을 뚫고 나와야하는 건데 원체 가물다보니 봄비 소리를 듣고 이제야 기지개를 펴고 있는 거지. 노란색이 사뭇 황홀하다. 귀엽고 앙증맞은 복수초, 그냥 죽여주지 않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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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목아, 복수꽃이 피었어." ⓒ 윤희경

"오목아, 복수꽃이 피었어." ⓒ 윤희경

오목아 하나만 더 보여줄게, 소나무 밑 갈비 속에 새로운 생명이 꼼지락대고 있단다. 작년 가을에 심어 논 산 마늘, 여섯 쪽으로 만족하지만 속심은 야무지고 독하기 그지없단다. 시린 겨울을 이겨내야 싹이 나오는 별종이랄까, 단군신화에 보면 곰도 사람으로 만들어내지 않았던가. 마늘 싹이 자라날수록 해는 점점 길어지고 봄은 성큼 소나무 우듬지에 내려앉는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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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늘속 산마늘 ⓒ 윤희경

비늘속 산마늘 ⓒ 윤희경

오목아,

참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이다. 바쁘다 보니 계절은 물론 봄도 마음도 다 잊어버렸나보다. 봄이 오기도 전에 봄을 미리 다 파먹고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지. 봄을 예비하는 언덕, 하루가 다르게 부어오르는 봄바람, 저릿저릿 저려오는 봄기, 아, 싱그러운 봄.

덧붙이는 글 | 다음카페 '북한강이야기' 윤희경 수필방, 북집 네오넷코리아, 농촌공사 웰촌 전원생활, 정보화마을 인빌뉴스에도 함께합니다.
쪽빛강물이 흐르는 '북한강이야기' 윤희경 수필방을 찾아오시면 고향과 농촌을 사랑하는 많은 임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2009.02.15 17:11 ⓒ 2009 OhmyNews
덧붙이는 글 다음카페 '북한강이야기' 윤희경 수필방, 북집 네오넷코리아, 농촌공사 웰촌 전원생활, 정보화마을 인빌뉴스에도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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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계곡 웅덩이 #씨감자 #복수초 #버들강아지 #산마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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