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사람] 인공기와 붉은완장으로 뒤덮인 서울

[김갑수 한국전쟁 역사팩션 8회] '두 나라'

등록 2009.02.17 13:29수정 2009.02.17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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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 속을 파고드는 부월이

김성식은 처가 식구들이 붙잡을 틈도 없이 산 아래로 내려가서 가족들이 있는 돈암동을 향했다. 그는 성북동 골짜기로 우회하는 길을 택했다. 그는 기며 달리며 산을 넘었다. 어느새 날이 저물었고 태풍 뒤끝의 부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는 삼선평 전찻길로 내달았다. 군용차가 무서운 속도로 지나고 있었고 길 양편에는 사람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그는 전찻길이 나 있는 도로를 가로질렀다. 총을 든 군인 하나가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개머리판으로 그의 옆구리를 내질렀다. 그는 길바닥에 고꾸라졌다.

“이 자슥 죽을라고... 간뎅이가 부었나?”

그는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지만 침착하게 정신을 추려 보았다. 그가 길로 나서는 것을 본 사람들이 모두 전찻길로 나와 길을 건너고 있었다. 군인도 할 수 없다는 듯이 사람들을 망연히 보고 있기만 했다. 그는 얼른 일어나 대열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결리는 옆구리를 두 손으로 움켜잡고 가족들이 있는 집을 향해 쉬지 않고 달음박질쳤다. 마침내 무사한 가족들의 얼굴을 보자 옆구리도 씻은 듯이 나아버린 것 같았다.

김성식은 대문 밖으로 나가 낙산을 바라보았다. 낙산 성벽마다 국군의 진지와 포좌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인민군의 대포알이 저곳을 향해 발사되다가 조금 거리가 짧으면 영락없이 이 마당으로 떨어질 것 같았다.

‘이거 대포알을 마중하러 온 셈 아닌가?’


하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포탄 하나가 저편 그리 멀지 않은 공터에 처박히면서 흙먼지를 말아 올렸다. 그런 후 거리에는 사람들의 모습이 일절 보이지 않게 되었다.

밤이 깊어지면서 빗줄기가 굵어지기 시작했다. 그의 가족은 부엌 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이불을 쓰고 누웠다. 지붕 위를 날아가는 대포알이 정신을 다 빼놓고 있었다. 하늘이 찢어지고 땅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밤새 울렸다.

인민군의 대포가 하나라도 겨냥을 잘못해서 지붕으로 떨어진다면 일가족이 몰살하리라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그는 인민군의 대포가 정확하기만을 빌 수밖에 없었다. 부월이(개)도 대포 소리에 겁을 집어먹고 자꾸만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틈을 넓혀 부월이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다음 날 비는 그쳤지만 대포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밤 사이 어느 정도 포성에 익숙해져 있었다. 부월이는 한 술 더 떠 마당을 한가로이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들은 연기를 내는 일이 조금 겁났지만 식욕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밥을 지어 허겁지겁 주린 배를 채웠다.

단 하룻만에 횡행하는 포탄에 적응하는 능력은 생명체가 아니라면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 들었다. 어제만 해도 그는 이대로 죽으면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그는, ‘내가 죽더라도 아이들에게나 탈이 없었으면...고아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아내라도 살아난다면 아이들을 돌볼 수 있겠지. 고향의 부모님은 지금 어떠실는지?’ 이런 생각들을 무시로 했지만 하루가 지난 오늘 그는 달라져 있었다.

그는 난생 처음 자신의 삶을 운명에 맡기기로 한 것이었다. 전쟁은 인간의 삶과 죽음을 우연의 외줄에 걸어 놓는다. 전쟁이 우리 민족의 운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이 운명이라면 개인의 노력이나 의지는 운명 앞에서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이럴 때 신을 믿는 사람들은 마음이 안정되어 있을까? 왠지 그럴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 들었다.

그는 포탄이 날아가는 것을 눈으로 세어 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옥양목을 찢는 듯한 비명이 들려도 그리 놀라지 않았다. 우박처럼 쏟아지는 총소리로 보아 거리에서는 무서운 시가전이 벌어지고 있는 듯했다.

‘힘이 모자란다면 무고한 인명을 희생하지 말고 선선히 후퇴하는 게 옳지 않을까?’

날이 밝으며 대포 소리가 멈췄고 오전이 되자 총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김성식은 대문 밖으로 나가 낙산을 바라보았다. 그 많던 국군의 진지와 포좌는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멀리 미아리고개에서 자동차보다 크고 육중한 것들이 일정한 속도로 굴러 내려오고 있었다. 대포알에도 터지지 않는다는 소련제 탱크임이 분명했다.

고개 아래 돈암동 전차 종점 길에는 벌써 나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전차길 가운데로 인민군의 행렬이 내려오고 있었다. 지긋지긋한 포성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든지 간에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그들의 표정에는 안도감이 역력했다. 그들은 하룻밤 사이에 나라가 뒤집힌 백성들이었으나, 그들에게 그것은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시간이 흐르며 말로만 듣던 인공기가 나부끼기 시작했다. 혜화동 방면으로 탱크와 자동차와 군인들이 까마득히 열을 지어 가고 있었다. 김성식은 인민군들이 내는 이북 사투리가 약간 생경했으나 그보다는 우리말이라는 생각이 앞섰다. 아무리 보아도 그들은 적병이 아니었다. 그들의 얼굴빛과 윤곽은 형제나 친척 또는 이웃 같아 보였다. 더욱이 그들이 상냥하게 웃고 이야기하는 것을 볼 때는 친근감까지 들었다.

아리랑고개에는 국군이 버리고 간 대포가 얼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있었다. 길거리에는 더러 벽이 뚫어지고 유리창이 깨진 집이 있었으나 밤새 볶아쳤던 포성과 총성에 비하면 민간의 피해는 아주 적은 것 같았다. 산에서 사람들이 내려오고 있었다. 모두들 웃는 낯이었지만 어느 누구도 시국이나 정치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학문과 민족과 자유는 나의 가치관

저녁이 되자 붉은 완장을 찬 청년들이 거리에서 왔다 갔다 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며칠 전까지 대한민국 감찰부 완장을 차다가 기민하게 완장을 바꿔 찬 사람도 섞여 있었다.

김성식은 친구 홍인철을 떠올렸다. 그는 좌익운동을 하다 감옥에 들어갔으니 이제 풀려나 왕성히 활동할 것이다. 홍은 남한 법정에서 판사에게 호통 치기를, “ 당신과 내가 자리를 바꾸어 서는 날이 있을 것이오”라고 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러자 판사는 홍에게 충고했다고 했다.

“양심적인 인텔리라면 지하운동에 발을 들이지 말라.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배반하고 서로 믿고 지내던 친구들까지 배반하기에 이를 것이다. 현실은 그렇게 가열한 것이다.”

‘홍에게는 이념이 그리도 중요한 것일까? 아니면 민족을 위하는 마음에서 이념을 이용하자는 것일까?’

김성식은 다시 평정심을 찾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처신을 결정해야 했다. 하지만 결정을 내리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을 쓰지는 않았다. 세상이 바뀌었다고 해서 사람이 따라 바뀔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전쟁 전에도 그는 시국이나 정치와는 거리를 두었었다. 자신의 전공인 역사와 부전공인 문학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나의 관심은 학문에 있고, 민족과 자유는 나의 가치관이다. 이 세 가지를 지키며 살겠지만 삶을 도모하기 위해 셋 중의 어느 하나도 저버리는 일은 하지 않으련다.’

그는 이렇게 다짐하며 이를 앙다물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김성식은 지난 일주일 동안의 일들을 한꺼번에 일기에 적기로 했다. 그는 사학자로서 사료를 남겨야 한다는 사명감을 지니고 있었다. 세상은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대체로 그의 기대에 어긋나는 방향이었다.

벌써 붉은 완장을 두른 자치대 청년들이 동네를 주름잡고 다니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은 탁해 보였고 얼굴과 몸집은 우락부락했다. 총을 멘 그들은 집집마다 다니며 식량 보유량을 조사했다. 다음 날 그들은 다시 찾아와 식량을 조금만 남기고 모조리 내 달라고 요구했다.

“이승만 도당의 학정으로 선량한 인민들이 굶어 죽을 판이니 우선 가진 것을 나눠 먹어야 합니다. 그러면 공화국에서 1주일 안으로 식량을 넉넉히 배급해 줄 것입니다. 우리는 작년에 이미 이남으로 밀고 내려올 준비가 끝났었습니다. 다만 식량이 조금 부족하여 이제 온 것입니다. 지금 이북에는 3년분의 식량이 비축되어 있는데, 그것을 인천항으로 수송 중입니다.”

김성식은 북침·남침 여부를 놓고 설왕설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 스스로 남침을 인정하는 발언을 무심결에 하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사학자 김성칠 선생의 일기 <역사 앞에서>를 참조한 부분입니다.


덧붙이는 글 사학자 김성칠 선생의 일기 <역사 앞에서>를 참조한 부분입니다.
#인공기 #붉은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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