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사람] 입만 열면 '북진통일' 외친 남측정부

[김갑수 한국전쟁 역사팩션 11회] '반달'

등록 2009.02.26 09:44수정 2009.02.26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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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란 국가가 일으키는 조직범죄

 

김성식을 만나 본 조수현은 좋은 인상을 받았다. 일기에 문제 삼을 수 있는 내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조금도 변명하거나 부인하지 않고 선선히 인정하는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일기의 내용은 내 느낌을 그대로 적은 겁니다."

 

자세히 보니 그의 얼굴에는 선량함과 명민함이 동시에 깃들여 있었다.

 

"선생님은 지금도 북침이 아니라 남침이라고 보신다는 것이지요?"

"증거를 댈 수는 없지만 제 추정으로는 그렇다는 것입니다."

"백번 양보해 남침이라고 하더라도 전면전 이전에 38선 근방에서 있었던 도발의 대부분이 남측의 소행이었다는 것은 아시는지요?"

 

김성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측 정부가 입만 열면 북진통일을 외쳤다는 것도 아시는지요?"

"알고 있습니다."

"그건 잘 한 건가요?"

"잘못된 겁니다."

 

"해방 후 지금까지 남조선에서 자행된 좌익인사 학살 인원이 10만에 육박한다는 사실은 아시는지요?"

"그렇게까지 많은 걸로 알지는 않았습니다."

"많지 않다고 해서 잘못된 일이 아니라고 보시는 겁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인민공화국에서는 남측의 좌익인사 학살과 북벌 주장을 북에 대한 선전포고였다고 봅니다."

"그렇더라도 동족끼리의 전쟁은 비극입니다. 전쟁이란 국가가 일으키는 조직범죄에 지나지 않습니다."

"알겠습니다. 돌아가십시오."

 

조수현은 김성식의 말문을 막아버렸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무슨 말이 나올지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왠지 김성식을 구속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김성식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걸어갔다. 조수현은 급히 일어나서 그를 불러 세웠다.

 

"김 선생님!"

 

김성식이 뒤를 돌아보았다. 조수현은 김성식의 일기장을 손에 들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본의 아니게 선생님의 일기를 읽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될 수도 있으니 잘 감추고 쓰시든지 아니면 쓰시지 않든지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김성식은 일기장을 받아 쥐더니 보일 듯 말 듯 목례를 하고 돌아섰다.

 

조수현은 김성식을 이명준과 비교해 보았다. 이명준은 북측 사람이고 김성식은 남측 사람이지만 둘 다 북과 남에 대하여 하나같이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고뇌하고 있는 지식인이었다. 또한 그들의 고뇌에는 상당히 타당성이 있어 보였다. 그리고 이명준의 고뇌는 젊은이답게 이성과의 사랑이나 자아실현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는데, 김성식의 고뇌는 중년의 기성인답게 직장이나 가정 그리고 민족 공동체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수현은 김성식이 이명준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명준은 자기 과장이 있고 위선적이며 이기적인 반면 김성식은 자기 인식이 정확하고 실질적이며 이타적인 사람 같았다. 이명준이 냉소적이면서도 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나머지 언행이 부자연스러운 데 반해 김성식은 온정적이면서도 타인의 시선을 그리 의식하지 않아서 언행이 자연스러웠다.

 

요컨대 이명준이 관념적이라서 인간적 신뢰가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면 김성식은 현실적이어서 믿음이 갔다. 그런데도 이명준의 범법 혐의는 구체적이지만 김성식의 그것은 추상적이었다. 따라서 이명준을 처벌하지 않은 마당에 김성식을 구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김성식을 곧장 방면한 것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왠지 김성식이 말한 남침설이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을 은연 중 품게 되었다.

 

바닥빨갱이 박광태와 좌익 간호사 오현자

 

감찰부 지구대에서 풀려 나온 김성식은 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는 인민군 여자 장교 조수현을 생각해 보았다. 조수현은 외모도 고왔지만 심성도 착해 보이는 처녀였다. 그는 남한 인재의 대부분은 좌익으로 쏠렸다는 친구들의 말이 생각났다. 사실 김성식의 친구들 중에서도 조금 괜찮다 싶으면 어김없이 좌익 이념을 지니고 있는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여자 장교는 북측의 부정적인 면을 알고나 있는지 궁금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서대문 형무소에서 풀려난 좌익들이 그들을 잡아들인 경찰과 탄압했던 인사들을 색출하여 마구잡이로 인민재판을 열어서 무자비하게 처형했다고 했다.

 

다음으로 그는 박광태를 생각했다. 인민군이 들어오는 날부터 설치기 시작한 박광태는 이미 동네의 방자한 권력자가 되어 있었다. 그는 붉은 완장을 찬 청년들을 지휘하면서 마치 경찰서장 같은 행세를 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여자 소문이 추잡하게 번지고 있었다. 동네 처녀나 젊은 부인들을 많이 건드리다 보니, 그의 집사람까지 사실을 알게 되어 부부 사이가 파탄 날 지경에 이르렀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러면서도 박광태의 아내는 계집들이 먼저 자기 남편에게 꼬리를 친 것이라고 남편 역정을 든다는 것이었다. 한편 박광태에게는 착한 딸 미애가 있는데 그녀는 아버지가 부끄러워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한다고 했다.

 

김성식은 석양을 뒤로 하고 휘적휘적 걸었다. 마음이 허탈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그는 구급약도 얻을 겸 지서다리에 있는 은혜병원에 들르기로 했다.

 

"어서 오세요. 교수님."

 

간호사 오현자가 김성식을 반갑게 맞이했다. 김성식은 오현자의 애인이 평양에 있다는 것을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다. 오현자는 얼굴에 희색과 의욕이 만면해 있었다.

 

"선생님, 세상이 밝아졌어요. 그렇죠?"

"고 선생은 안 계신가?"

"왕진 가셨는데 오실 때가 되었어요. 조금 기다리시겠어요?"

 

김성식은 그냥 갈까 하다가 자리에 앉았다. 어차피 구급약을 가지고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였다. 대신 그는 오현자의 수다를 감내하기로 했다.

 

"선생님 미숫가루 타 드릴게요."

 

오현자는 쟁반에 받치고 온 미숫가루 냉수를 탁자에 놓더니 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고맙소. 그런데 나만 마시나?"

"저는 그런 것 안 마셔도 요즘 너무 행복해요."

"좋은 일이군."

"선생님. 전쟁 이야기 좀 해 주세요. 우리 고 선생님은 요즘 통 기분이 안 좋으신 모양이어요. 그래서 고 선생님한테는 얘기를 들을 수가 없어요."

 

김성식은 미숫가루 냉수를 한 번에 다 들이켰다. 그는 인민군 감찰부에서 내심 긴장했던 자신이 스스로 멋쩍었다.

 

"선생님, 이승만 도당이 대구까지 쫓겨 갔다면서요?"

 

금강 방어선이 무너졌다는 말은 들었지만 대구 천도는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는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어디서 들었어?"

"교양교육에서 강사가 말했어요."

 

그렇다면 그것은 정확한 정보가 아닐 수도 있었다. 인민군은 언제나 전황을 앞질러 유리하게 발표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2009.02.26 09:44 ⓒ 2009 OhmyNews
#북진통일 #인민재판 #바닥빨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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