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님 어찌 이곳에 계시옵니까?

덕수궁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

등록 2009.03.01 18:06수정 2009.03.01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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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이치에 따라 겨울이 원래의 제 위치로 돌아가고 있는 2월의 마지막 날 덕수궁에 다녀왔습니다. 절기로는 진즉에 입춘을 지나고, 우수마저도 훌쩍 지나쳐 며칠 후면 개구리가 땅속에서 폴짝! 튀어나온다는 경칩입니다.  

 

남녘에는 벌써 겨우내 기다림에 참지 못하던 매화가 그 설렘을 수줍은 봉우리로 터뜨려 이미 봄을 맞이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제 하루만 지나면 3월이 되고, 또 그야말로 봄입니다. 

 

나는 2월의 마지막 날이자 마지막 주말인 금쪽같은 이번 토요일을 아깝게 낭비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침부터 일어나자마자 거리가 가깝기도 하고, 한 시간이면 곧장 도착할 수 있는 덕수궁에 혼자 다녀오기로 하고 집 앞에서 무작정 시내버스를 탔습니다.

 

시청 앞 버스 정류장에 내려서 채 5분도 안 되게 걸으니 금세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이 보였습니다. 정문 앞에 도착하니 때마침 수문장 교대식 행사가 한창 마무리 되는 중이었고, 사람들은 대한문 앞에 우르르 몰려들어 그 광경을 연방 사진기에 담으며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얼마 후 수문장 교대식이 끝나자 사람들은 순식간에 흩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으로 들어섰고, 덕수궁 돌담을 따라 서울시립미술관 쪽으로 가는 사람, 광화문 쪽으로, 숭례문 쪽으로 움직이는 사람들로 나뉘어 흩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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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문' 덕수궁(경운궁)의 정문인 '대한문' ⓒ 이성한

▲ '대한문' 덕수궁(경운궁)의 정문인 '대한문' ⓒ 이성한

나는 차도 옆에 서서 덕수궁을 정면으로 마주한 채 그 정문인 대한문을 위아래와 좌우로 주욱~한번 둘러보았습니다. 대한문 앞에는 주말을 맞아 나들이 나온 사람들의 산만함과 북적거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번잡한 그곳에서 불행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고종의 그림자와 쓰라린 우리 역사를 짧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가볍게 발걸음을 옮겨 대한문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나는 돌다리로 놓인 금천교를 지나 별생각 없이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고 궐 안의 전각들이 배치된 곳을 향해 천천히 걸었습니다. 지나는 그곳에는 소나무가 여러 그루 심어져   찾아온 방문객들을 친근하게 맞아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쯤 가다가 우연히 앞을 보니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낯익은 동상이 자리를 잡고 떡하니 앉아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세종대왕의 동상이었습니다. 이래 봬도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인 나는 족보로 따지자면 먼 옛날 나의 친척 할아버지뻘 되시는 세종대왕의 동상이 그 자리에 있어서 우선 반가웠습니다. 하지만 잠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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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동상 덕수궁(경운궁) 중화전 근처에 세워져 있는 세종대왕 동상 ⓒ 이성한

▲ 세종대왕 동상 덕수궁(경운궁) 중화전 근처에 세워져 있는 세종대왕 동상 ⓒ 이성한

"구한말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마지막 황제 고종이 승하한 파란의 궁궐 덕수궁에 웬 세종대왕 동상이지? 내가 알기로 덕수궁과 세종대왕은 이렇다 할 역사적 연관성을 가졌다고 볼 수 있는 게 없는데…."

 

정말이지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어릴 적부터 교과서의 사진 속에서 그분을 뵌 적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운동장 조회대 앞에서 본 기억도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전형적으로 익숙한 정좌하신 세종대왕의 동상이 덕수궁 중화전 옆 소나무정원 가운데 길 끝자락에 있는 걸 보니 다시 생각해도 뭔가 어색한 느낌이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그분의 동상과 별로 그 연관을 지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없어 보였습니다. 굳이 있다면 덕수궁 남서쪽 광명문(과거 함녕전의 정문) 문루 아래 자격루와 연관이 있다고나 할까요?

 

"세종대왕의 동상이 어인 일로 이곳 덕수궁에 임어하신 거지?"

 

신하와 군졸도 거느리지 않으시고, 그분이 재임 시절 발명하신 위대한 한글과 수많은 과학기구에 대한 아무런 보조 자료나 유물도 없이 '왜 하필 달랑 이곳 덕수궁에 홀로 앉아 계신 것인지' 그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이 순간적으로 발동했습니다.

 

나는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문화유산 해설을 담당하시는 해설사 선생님을 찾아 여쭤보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밀려드는 사람들에 맞추어 쉴 새 없이 문화유산 해설을 진행하고 계신 몇 안 되는 그분들을 개인적으로 따로 뵙고 말씀을 나누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나중에 개인적으로 자료를 찾아보거나, 필요하면 문화재청에 전화로라도 문의하여 그 이유를 확인하기로 했습니다.

 

나는 '세종대왕 동상이 어찌 된 영문으로 덕수궁에 임어하게 되셨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잠시 접고서 덕수궁 궁궐 안 곳곳을 다니며 한낮의 토요일을 만끽했습니다.

 

우선 중화문의 계단에 올라 점잖게 봄날의 양춘(陽春)을 쬐고 있는 덕수궁의 정전인 '중화전'을 살폈습니다. 중화전에 이르는 삼도 좌우로는 문무백관의 위치를 나타낸 품계석이 열을 지어 서 있었고, 사람들은 그 중간 중간의 틈에 서서 사진을 찍는 모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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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전 덕수궁(경운궁)의 정전인 중화전 ⓒ 이성한

▲ 중화전 덕수궁(경운궁)의 정전인 중화전 ⓒ 이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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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계석 덕수궁(경운궁)의 정전인 '중화전' 앞 품계석이 줄지어 선 곳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 ⓒ 이성한

▲ 품계석 덕수궁(경운궁)의 정전인 '중화전' 앞 품계석이 줄지어 선 곳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 ⓒ 이성한

나는 중화전을 한바퀴 돌았습니다. 월대에 올라 중화전에 스민 대한제국의 슬픈 운명과 '풍전등화'와 같았던 구한말의 위태한 역사를 떠올렸습니다. 그런 다음 중화전 뒤꼍에 있는 석어당과 즉조당, 준명당을 차례로 돌았습니다. 고색의 빛깔을 한 전각들은 오래전 순간순간 겪었던 굴욕의 역사와 고비를 말해주는 듯 화려하지 않고 심지어 허름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나는 비운의 황제 고종의 침전이자 승하처였던 '함녕전'을 살피고, '덕홍전'을 돌아 덕수궁의 사랑방이라 할 '정관헌'을 둘러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양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져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집무실 및 접견실로 사용된 '석조전' 계단에 올라 옅은 노을빛이 '앨레강스'하게 비치는 덕수궁 오후의 이미지를 눈과 느낌으로 가득 저장한 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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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전 대한제국 시절 덕수궁(경운궁)에서 고종의 집무실로 사용되었던 건물인 석조전 ⓒ 이성한

▲ 석조전 대한제국 시절 덕수궁(경운궁)에서 고종의 집무실로 사용되었던 건물인 석조전 ⓒ 이성한

나는 버스를 타고 금세 집으로 돌아와서 책상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아까 낮에 잠시 접어두었던 그 궁금증을 다시 꺼내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책과 인터넷을 통해 이것저것 자료를 살펴보니 역시나 그 이유는 내가 생각하기에 분명하지도, 별로 뚜렷하지도 않아 보였습니다. 어찌 보면 어이없는 이유, 이유 없는 이유랄까요?

 

살펴보니 이랬습니다.

 

덕수궁의 세종대왕 동상은 1968년 조각가 김경승이 애국선열 조상건립위원회와 '서울신문'을 통해 제작해서 세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세종대왕 동상이 '왜 덕수궁에 있는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을 말끔히 씻어주는 답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왜 덕수궁에 세웠는지에 대한 답은 '모르겠다' 아니 '그냥 세웠다' 정도였습니다. 또 다른 자료에 따르면 박정희 정권 시절, 동상 세우기가 무슨 국가적 위인 추대사업인 양 주먹구구식으로 여기저기에 세워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게 이유라면 이유인 듯했습니다.

 

뭐랄까요? 5·16 군사정변(자기들은 군사혁명이라고 말함)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자들이 혹 당시 국민들의 비판의식을 흐리게 하려는 의도로 국가와 민족의 위대한 위인(주로 장군들임)들을 떠받들게 하는 이른바 '국민의식화 사업을 벌인 게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민주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무력을 통해 수립한 군사독재정부를 정당화 하려는 목적까지도 말입니다.

 

시간적·역사적 흐름에 따라 아무리 호의적으로 해석하려 해도 설명되는 이유는 마땅치 않았습니다. 즉 덕수궁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에 모든 궁궐이 불에 타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사가(私家)를 개조해 지어졌고, 광해군 때 고쳐져서 경운궁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고종이 아관파천을 하고 살게 되는 덕수궁은 일제가 고종을 강제 폐위하고 순종을 왕위에 올린 뒤 고종의 장수를 기원한다는 의미로 '덕수'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실은 덕수궁의 이름도 '경운궁'이 옳은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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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대한제국의 마지막 비운의 황제 고종 ⓒ 이성한

▲ 고종 대한제국의 마지막 비운의 황제 고종 ⓒ 이성한

그러니까 정리해 보면, 덕수궁은 세종대왕이 승하한 후에 지어진 궁궐입니다. 따라서 덕수궁에 세종대왕의 동상이 이유 없는 모습으로 어색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밖에 서울 도심을 포함한 전국 여러 곳 군데군데에는 위인들의 동상이 어찌 보면 흔할 정도로 많이 세워져 있습니다. 학교에, 공원에, 광장에… 역사적으로 존경해야 할 우리 민족의 어른이자 지도자이신 훌륭한 위인들의 뜻과 업적을 기리는 일은 분명히 온당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분들의 동상을 아무 곳에나 설득력 없는 이유로, 자치단체나 정부에서 하는 치적사업의 일환으로 무분별하게 세워놓고 '국민들에게 배우고 따르라'하면 그것 또한 생각이 모자란 짓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입니다. 

 

또 있습니다. 세종로에는 세종대왕 동상이 있는 것이 맞고, 충무로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동상이 있는 것이 맞는 것이므로 원래의 취지와 이유에 맞게 서둘러 바로잡는 것이 옳다는 생각입니다. 다행히도 얼마 전 보도에 따르면 광화문에 있는 세종문화회관 앞에 세종대왕의 동상이 바로 세워지게 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늦었지만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무능하고 무지한 후세의 신하들 덕택에 엉뚱하게도 덕수궁에 납시어 계신 세종대왕님을 제자리로 임어하시도록 해드려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덧붙이는 글 | 2월 28일 덕수궁(경운궁)에 다녀와서 쓴 글 입니다.

2009.03.01 18:06 ⓒ 2009 OhmyNews
덧붙이는 글 2월 28일 덕수궁(경운궁)에 다녀와서 쓴 글 입니다.
#덕수궁 #경운궁 #세종대왕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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