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늑한 찻집 이름이 '노인일자리창출 작업장'?

누구를 위한 '노인일자리창출사업'인가

등록 2009.03.20 11:53수정 2009.03.20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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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옹기 뚜껑이 배달되어 왔다. 그 안에 올망졸망 작은 봄꽃들이나 직접 꼬맹이들이 만들어 준 종이꽃 등을 넣으니 조그만 아파트 베란다에도 봄 풍경이 펼쳐졌다.


옹기 뚜껑은 간판에 쓸 글씨를 그냥 써준 답례로 시니어클럽의 일자리 창출사업 담당자가 고맙다고 보내왔다. 개인이 아닌 사회복지차원의 글이라서 윤필료를 받지 않았더니 미안했던지 찻집을 정리하면서 남는 게 생겼다고 보낸 것이다.

나날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어르신들의 일자리 수요를 채우자면 새로운 일거리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그게 마땅치 않다. 웬만한 것들은 이미 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콩나물·두부·한과·앞치마·속적삼·한지공예 등등... 그래서 개발한 것이 '찻집'이다. 작업장의 위치가 ○○시민이 많이 찾는 산과 공원 입구에 있어 하산하는 시민들과 공원에서 하루를 보내는 어르신들을 보고 착안해서 찻집을 열기로 한 것이다.

멋진 원목 간판 내린 자리에 대형 플래카드 걸려

손맛좋은 어르신들이 모여서  대추차·생강차·모과차·식혜·수정과 등 직접 달이고 만든 음료들을 한 잔에 천원 혹은 이천원 받기로 했다. 그리고 그 찻집 이름을 '도래샘'이라고 했다는데, 처음에는 문자학을 공부한 나도 '도래샘'이란 말이 생소해서 얼마 전에 내가 지은 전통찻집 '도란재'가 생각나서 혹시 '도란샘'이 아니냐고 묻기도 했다.

그러나 '도래샘'은 잘 사용되지 않지만 아름다운 우리말이었다. 조그만 물줄기가 굽이굽이 흘러 모여서 옹달샘이 된 것이 '도래샘'이라고 한다. 평생 이런저런 사연을 담은 어르신들이 말년에 옹기종기 모여서 비록 월 20만원의 조그만 수익이지만 나름대로 사회서비스를 하는 곳이다. 마치 지친 나그네가 산길을 가다가 우연히 발견해 다리를 뻗고 물 한 모금 떠먹고 기운차리는 소박한 옹달샘과도 같아 현판 글씨도 창의적이면서 활달하게 써졌다.


'도래샘'이 멋진 나무에 새겨졌고 원판은 액자로 되어 가게 안에 설치되었다. 공원입구라서 오가는 어르신들의 발길이 심심찮았다. 저렴한 찻값에 대청마루와 옹기가 가득한 고향방 분위기가 소담스러워 좋은 휴식을 취할 수 있어 나도 종종 손님이 오면 애용하였다.

그러나 어느 날 원목 나무에 하얗게 양각되어 멋졌던 도래샘 간판이 내려지고 싼 티 나는 대형 플래카드가 그 자리에 걸렸다. 플래카드에는 '○○시 노인일자리창출사업 작업장'이라는 내용이 크게 담겼다.

안에는 어릴 때 부모님이 해주신 그 맛의 식혜와 대추차 등이 있고 대청마루와 푹신한 의자들이 있는데 밖에서 플래카드만 보면 그 안은 그냥 끼리끼리 모인 작업장일 뿐이라 지나다니는 나그네는 모르고 지나가기 일쑤다.

어르신 일자리창출사업이 시를 위해 존재?

○○시가 빌려준 공간에 ○○시의 지원금으로 하는 사업인데 저렇게 현판을 달고 장사 하는 게 못 마땅했나 보다.

사업지원의 관리에만 치중하다 보니 그 사업을 해야하는 취지와 효율적인 운영의 묘는 묻히게 된 셈이다. ○○시가 지원한다는 것을 별도로 표시할 수도 있을 텐데…. 평소 좋은 소통을 이루며 도래샘이 개관하기까지 협조를 아끼지 않던 담당 공무원들도 별수가 없던 모양이다.

어르신 일자리창출사업이 ○○시를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어려운 시대에 호주머니가 단출해 쉴 곳이 필요한 시민들이 우선 아닐까? 자신의 노동력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을 줌으로써 노후 일자리에 보람을 느끼는 어르신들을 위한 사업이 되어야 맞지 않을까?

난관에 봉착한 '도래샘'은 대시민서비스를 위한 찻집은 일단 폐쇄하고 칼국수나 보리밥 등 새로운 먹거리를 개발해 다시 개관 준비를 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써준 글씨의 현판은 밖에 걸리지 못하고 실내에 걸릴 것이고 깊은 산 속 옹달샘 같은 건물 안의 도래샘이 될 것 같다.
#어르신일자치창출사업 #현판글씨 #복지부동 #대시민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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