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세의 청년 권용목은 한국노동운동의 살아있는 신화였다
권용목은 울산에서 노동운동을 시작할 때부터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을 만큼 신중하고 착한 노동자였다. 나는 중공업과 엔진이 합병되기 전인 1988년 현대중공업 노동조합 교섭위원을 맡았을 때 엔진노조 전 위원장이었던 권용목을 처음 만났다.
당시 권용목은 엔진노조 파업투쟁으로 구속되었다가 석방된 후 해고자로 지내고 있었다. 1987년에 엔진에서 노조를 만들면서 바닷가 끝쪽에 있던 엔진공장에서 공장 안쪽으로 투쟁의 기운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중공업의 많은 조합원들이 엔진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켜보며 술렁거렸다. 공장 안에 불어닥친 민주화 바람은 엔진노조의 선도투쟁으로 물꼬를 텄고 결국 중공업도 민주노조를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권용목이 있었다.
당시 권용목은 엔진투쟁을 밖에서 지휘하고 있었는데, 중공업 교섭위원들과 간담회 자리에서 엔진의 투쟁 상황을 설명하고 교섭방법이나 회사 상대하는 법도 가르쳐 주면서 처음 시작하는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것이 인연이 돼서 1988년 시작된 128일 파업도 함께 하게 되었다.
128일 파업 도중에 1.8 테러 사건이 일어난 날, 권용목은 현총련(현대그룹노동조합총연합)사무실에서 회사에서 보낸 구사대에게 테러를 당하기도 했고, 엔진노조와 현중노조에 대해 3자 개입금지법으로 3번이나 구속당했다. 그러다가 1990년 골리앗 투쟁이 있기 직전 현대엔진과 중공업이 합병이 되었고 노조도 통합이 됐다. 나는 이때 현대중공업 노조 사무국장으로 당선되었는데, 당시 엔진노조는 남은 조합비를 엔진의 해고자였던 오종쇄(현 현중노조 위원장), 권용목, 사영운 세 사람에게 위로금으로 지급하고 노조비를 한 푼도 가지고 오지 않았다.
당시 현중노조에서는 논의 없이 조합비를 청산하고 온 엔진노조에 대해 비판이 있었다. 위원장과 수석부위원장이 구속수배 상태여서 사무국장인 내가 대의원대회를 진행하게 되었는데, 해고자들의 생계비 지원과 관련해 엔진노조 해고자들 문제가 논의되었다. 나는 해고자들에게 준 것은 뭐라 할 수 없다, 이미 준 것은 문제 삼지 않지만, 앞으로 중공업노조의 해고자로 정식 인정하고 생계비를 지급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했고 이를 통과시키기 위해 반대하는 대의원들과 4시간이나 논쟁을 벌여 결국 설득했다. 당시 나에겐 사명감이 있었다. 해고자에 대한 지원이 없다면 앞으로 아무도 노동조합 일에 나섰다 구속되고 해고되는 일을 감수할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에 해고자 지원 문제는 중요했다.
1993년 연말 현대중공업 8대 위원장 선거 당시, 위원장 출마가 결정된 후 권용목과 단둘이 자리를 한 적이 있었다. 나는 몇 년 동안 해고자 생활을 하고 있던 권용목에게 뭔가 할 일이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했고, 현중의 활동가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주전의 어느 바닷가 횟집에서 밥을 먹으며 나는 '내가 위원장이 되면 현중노조의 문제는 안에 있는 우리에게 맡기고, 1995년에 있을 지방자치단체 선거에 경남도의원으로 출마해서 노동운동을 정치로 계속 이어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권용목은 그 제안에 즉답을 피했다.
그는 행여 정치판으로 간다는 오해를 받을까 선뜻 대답을 안 했던 것 같다. 나는 권용목의 성품을 알기 때문에 "나에게 맡긴다면 알아서 하겠다. 이는 너의 정치 행보를 돕는 게 아니라 노동운동을 현실정치에 연결시키는 임무를 권용목이 맡고 가는 거다"라고 말하면서 그를 설득했다. 오랜 시간 얘기한 끝에 결국 권용목도 이에 동의했다. 나는 해고자가 밖에서 지원활동을 하다가 어영부영 운동을 끝내면 활동가가 재생산될 수 없다고 바라본 탓에, 이를 돌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당시 권용목은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실력과 신의를 인정받는 노동운동가인데다 지역에서도 인지도나 신망이 두터웠기 때문에 지자체 선거에 적격인 인물이었다.
그런데 권용목과 약속했던 일을 추진하려던 차에 갑자기 변수가 생겼다. 1994년 68일 골리앗LNG파업으로 덜컥 내가 구속된 것이다. 내 뒤에 들어선 윤재건 집행부는 권용목 문제를 나처럼 추진할 의사가 없었고, 더구나 윤재건 선거 때 그를 지지했던 조직은 1995년도 지자제 선거를 염두에 두고 이미 현장 안에서 선거운동을 준비하던 사람들이었다. 나는 구속되어 있던 상황에서 권용목의 진로에 대한 얘기를 윤재건에게 전했으나, 윤재건은 이미 다른 사람으로 후보를 정리한 상태였다. 결국 이들은 1995년도에 현대중공업노조의 지원으로 노동자가 아닌 지역의 활동가를 도의원에 당선시켰다.
권용목의 이름을 거론한 나... 그건 실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