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키친>의 바나나는 잊어주세요?

[해외리포트] 요시모토 바나나의 변신을 보는 상반된 반응

등록 2009.04.15 09:55수정 2009.04.15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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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는 없었던 바나나의 일면"
"바나나답지 않은 전개와 세계관"
"바나나 작품 중에 최고"

1988년, 데뷔작 <키친>(1999년 김난주 번역)으로 '바나나 열풍'을 불러일으켰던 요시모토 바나나의 최근작 <그녀에 대해서>를 두고 독자들의 반응이 엇갈리고 있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이전 작품들이 학대받는 사람들이나 구원을 바라며 괴로워하는 정신에 대해 그리면서도 발랄함을 유지하려 했던 반면, 이번 <그녀에 대해서>는 '마녀학교' '신내림' '가족 간의 살인' 등 다소 '무거운' 전개를 하고 있기 때문.

요시모토 바나나의 변신이 독자들에게 성공적으로 각인될 수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그의 이번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녀의 인생 이력을 좀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라이트 노벨의 상징, '바나나 신화'

요시모토 바나나의 대표작 <키친>, 좌측 하단의 사진은 1980년대 후반에 찍은 바나나의 모습. 당시 바나나의 이미지는 이 사진으로 대표된다. ⓒ 민음사&요시모토 바나나

요시모토 바나나. 그는 더 이상 신인작가도 아니며 일본 내에서도 중견작가 이상의 지위를 확보하고 있다. 데뷔 당시 20대였던 그녀는 이제 마흔 중반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일본문단을 대표하는 작가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럼에도 바나나가 여전히 20대 여성 독자들의 지지를 받는다.

20대 시절 바나나는 동그란 안경을 쓴 패션에 민감한 모습으로 자신의 책을 장식했다. 그 때 바나나는 '라이트 노벨(가벼운 소설)'의 상징이었고 지금도 동그란 안경을 쓴 이십대 당시의 이미지로 여전히 독자의 뇌리에 깊숙이 각인되어 있다.


바나나는 1988년 데뷔작인 <키친>(1999년 김난주 번역)으로 '바나나 열풍'이라 해도 좋을 정도의 선풍을 불러일으켰다. 바나나의 한국 상륙은 무라카미 하루키보다 조금 늦었지만, 한국에서의 인기와 인지도만을 놓고 볼 때 하루키 옆에 나란히 설 수 있는 유일한 일본작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가 남녀 모두에게 읽혔다고 한다면, 바나나는 여성독자들에게 훨씬 많이 읽혔다. 바나나의 소설은 김현영의 <냉장고>(문학동네 2000)는 물론이고 2000년대 이후 등단한 한국의 여성 작가들에게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장소를 말한다면, 그곳은 부엌이다. 어느 곳, 어떤 곳이든, 그곳이 부엌이고 음식을 만들 수 있는 곳이라면 나는 좋다. 가능하면 편리하고 기능적인 곳이면 더욱 좋겠다. 청결한 마른 행주가 몇 장이고 준비되어 있고, 하얀 타일들이 반짝반짝 빛나는 곳. 지독하게 더러운 부엌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부엌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나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좋다."


부엌 예찬으로 시작되는 <키친>은 단순히 개인적인 감성만이 아니라 그 맛깔스러운 문장 속에 한 개인의 '고독'과 '실존'을 어둡지 않게 실어내면서 동시대 독자의 절대적인 지지를 이끌어 냈다.

<키친>에서 부엌은 "홀로 추운 곳에서 죽든 누군가가 있는 따뜻한 곳에서 죽든 두려워하지 않고 모든 것을 냉정하게 바라"볼 수 공간으로 그려졌는데 이 공간은 한국사회에서 여성들의 비애와 슬픔이 오롯이 담긴 공간이기도 하다. 바나나가 다른 일본 여성작가들 보다 한국에 훨씬 빠른 속도로 그리고 강렬하게 착지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 여성들에게 '공감대'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소설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요시모토 바나나 와세다 대학 강연 때 모습 ⓒ 곽형덕


어두운 세계 경쾌하게 그려낸 <키친>

바나나 문학은 1990년 당시 신경숙이나 은희경 등으로 대표되는 한국 여성작가들의 소설과는 조금 다르게 우울한 세계를 그려내면서도 톡톡 튀는 맛이 있고, 경쾌함을 갖고 있었다. 은희경의 <아내의 상자>와 바나나의 <키친>을 비교해서 읽어보면 이것은 매우 명쾌하게 드러난다. 

'어두운 세계'를 경쾌하고 담담 발랄하게 위로하는 것, 그것이 바로 바나나 문학이 갖고 있는 핵심이다. 우울한 세계를 발랄하고 가볍게 그려내는 방식이 당시 십대 이십대이던 여성독자들은 물론이고, 2009년 현재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키친>은 '고독' '허무'를 제시하며 그것을 마지막에는 '위로'하는 구조로 쓰였다. <키친>이후 쓰인 <하얀 강 밤배> <슬픈 예감> <몸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등 바나나의 작품은 젊은이들의 '슬픔'과 '허무'를 따듯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러한 바나나의 소설은 유럽에서도 동세대 젊은 여성들에게 특히 반향을 일으켰고, 그 결과 1993년, 1996년, 1999년에 이탈리아에서 잇달아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탈리아에서 외국인 작가가 3번이나 문학상을 수상하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로 바나나의 소설은 이러한 '신화'를 만들어 내며 '세계문학(출판시장의 확대)'의 반열에 들어서게 되었다.

물론 그러한 것은 초기 하루키 소설의 글쓰기 방식과도 맞닿아있다. 바나나도 하루키와 마찬가지로 국적이 드러나지 않는 글쓰기, 철저하게 한 개인의 감성을 전면에 내세우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국가'와 '이념'이라는 문제와는 살짝 빗겨 서서 독자를 괴롭히거나 머리 아프게 하는 이른바 지식인 소설과는 계보를 달리한다.

그것은 바나나의 아버지 요시모토 다카아키가 한 방식과는 정반대이기도 하다. 다카아키는 '국가'와 '이념'이라는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고 그것을 바탕으로 개인의 '도덕'을 묻는 방식의 글쓰기를 했다.

'사상가' 아버지 다카아키의 흔적, 무거워진 글

요시모토 다카아키와 요시모토 바나나. ⓒ <요시모토 다카아키×요시모토 바나나>

익히 알려졌다시피 바나나는 일본 패전 이후 최대의 사상가이자 지식의 거인으로 군림했던 요시모토 다카아키(吉本 隆明, 요시모토 류메)의 딸이다.

다카아키는 패전 후 일본에서 '전쟁책임론'부터 1960년대 당시 일본 '전공투 세대'(전학공투회의, 1960년대 말 격렬했던 일본학생운동을 대표하는 고유명사)의 정신적 자양분을 공급하는 등 사회적인 문제를 선두에 서서 싸워갔던 사상가이다.

하지만 <키친>을 비롯해 이른바 바나나의 '라이트 노벨'에서 다카아키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2008년 11월에 출간된 <그녀에 대해서>에서 바나나는 변신을 꾀했다.

<그녀에 대해서>는 2006년에 실제 일어난 아키타 현 아동연속살인사건에서 착상을 얻은 것으로, 1992년에 상영된 다리오 아리젠토 감독의 공포물 <트라우마>가 그 밑바탕에 깔려있다.

2009년 1월 21일 와세다 대학 강연회에 모습을 드러낸 바나나는 어두운 시대에 어두운 면을 드러내는 글쓰기를 하는 것에서 많은 사람이 위안을 얻었다며, 과거에는 '어둠'에 맞서기 위해 '밝고, 가벼운 문학'을 추구했었지만 지금과 같은 시대에 필요한 것은 사람들이 공감을 할 수 있는 어둠을 어둠 그래도 드러내면서 그 안에서 독자들을 위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문학계(文學界)> 2009년 2월호에서는 '무거워진 글쓰기'에 대해 아래와 같이 이유를 밝히기도 했다.

<문학계(文學界)> 2009년 2월호에 실린 요시모토 바나나의 인터뷰. ⓒ 문학계

"오히려 무거운 분위기의 작품을 읽고 마음이 산뜻해지더라는 감상을 독자에게 받았다. 처음에는 어두운 시대에, 어두운 소설을 써서 미안하다고 생각했지만, 어두운 것에는 어두운 것으로 맞부딪쳐야지만 (독자를) 위로할 수 있다고 느꼈다."

요시모토 다카아키의 흔적이 강하게 묻어나는 대목이다.

"지식인이란 혁명적이고 진보적인 척하는 사람이 아니며, 어디까지나 대중 속에서 지식인이 자신의 사명을 발견해야 한다." - 요시모토 다카아키
"작가의 사명이란 상처받고 삶의 희망을 잃어가는 지친 독자들을 위해 글을 쓰는 것이다." - 요시모토 바나나

아버지에게서 혁명가적인 사상을 이어받지는 않았지만, 바나나가 생각하는 소설쓰기가 아버지의 글쓰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 

천명을 아는 나이에 근접하고 있는 바나나를 동그란 안경을 쓴 <키친>의 작가로 기억하고 있는 독자들도, 이제는 바나나를 새롭게 봐야 할 시기가 도래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요시모토 바나나 #그녀에 대해서 #키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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