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어떻게 읽으라고 만드는 책인가

[헌책방 나들이 195] 서울 독립문 〈골목책방〉

등록 2009.04.15 11:49수정 2009.04.15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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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헌책방으로 가는 발걸음은

서울 광화문에 볼일이 있어 나들이를 갑니다. '청소년 문화'를 찍는 사진 일감 하나를 맡고 있는데, 일감을 맡긴 곳에서 두 번째 모임을 합니다. 저마다 다른 사진길을 걷는 열한 사람이 같은 사진감으로 백 장씩 찍어내어 모두는 사진일입니다.


저는 저 나름대로 마련해 온 보고서를 읽으며 이야기하고, 다른 분은 다른 분 나름대로 마련해 온 보고서나 사진을 보여주며 이야기합니다. 다른 분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미술관 분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청소년 문화를 다루려는 우리들이나 청소년한테 문화를 보여주거나 말한다고 하는 우리들이나 한결같이 어떤 틀에 갇혀 있지 않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이래야 한다'는 청소년 문화란 없을 텐데 말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이 사천만이라면 사천만 가지 빛깔과 모습과 냄새가 있습니다. 청소년이 백만이라면 백만 가지 빛깔과 모습과 냄새가 있고, 삼백만이라면 삼백만 가지 빛깔과 모습과 냄새가 있어요.

때로는 어두운 그늘이 있으나, 때로는 밝은 빛줄기가 있습니다. 구석구석 훑으며 담아내는 '청소년 문화 사진'이 될 수 있습니다만, 모든 곳을 두루 훑지는 못하여도 '우리가 보고 말하는 청소년 문화란 이렇다' 하고 알맹이를 차근차근 여미면 넉넉하지 않을까 하고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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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많이 쌓였다고 할 테지만, 예전에는 이보다 여러 곱절 책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주 시원하게(?) 뚫리고 갈무리되었습니다. ⓒ 최종규


그나저나, 미술관 분들이나 다른 분들이나 자꾸자꾸 '아카(아카이브)'라고 말하는데, '아카'든 '아카이브'든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기 어렵습니다. 미술관 분은 '전문적인 용어'라고 하면서 갖가지 영어를 읊기도 합니다. 왜 영어가 '사진 전문 용어'가 되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말로 손쉽게 펼치면 되는 말은 전문 용어가 되지 못하고, 우리 말로는 사진을 찍을 수 없다는 매무새인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이 일감을 괜히 맡았나 하고 도리질을 치기도 하고, 그래도 이 일감을 붙잡아 마무리를 지어야 밥값이라도 한다고 곱씹으면서, 이 어설프고 어줍잖은 틀거리에서 무슨 사진을 어떻게 찍어야 하느냐 골머리를 앓습니다. 나중에 어떤 사진으로 마무리가 될는지 모르지만, 하루하루 골머리를 앓고 또 앓으면서 어설프나마 작품이 하나 이루어질 테고, 이번에 이렇게 이루는 작품을 바탕으로 다음에는 한결 다르고 새롭게 또다른 사진감을 붙잡도록 담금질을 하지 않겠느냐 생각합니다.

돌이켜보면, 어떤 사진감 하나를 잡든 우리가 사진으로 나누는 일이라 한다면 '여기에 풀이법이 있다'나 '이 길이다' 하는 사진이 아닌, '이렇게 풀이법을 찾아보았습니다'나 '이런 풀이법도 있더군요'나 '저는 저대로 이렇게 나아가 보았는데, 풀이법을 찾는 길은 아주 많아요'를 이야기하는 사진이어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이제까지는 혼자서 사진감을 잡고 사진길을 걸었지만, 이번 일감처럼 여러 사람이 다 다른 눈길로 다 다른 사진을 잡아채어 그러모으는 자리를 겪어 보면서 내 눈높이를 다스리는 일은 틀림없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힘들게 이야기를 마친 다음, 머리를 식히려고 발걸음을 독립문으로 옮깁니다. 밥을 먹으러 가는 분이 있고 다른 약속이 있어 가는 분이 있으며, 저는 부지런히 집으로 돌아가 아기와 함께 어울려야 합니다만, 잠깐쯤 머리를 식히지 않고서는 인천으로 돌아가는 북적북적 전철에서 부대낄 기운이 나지 않을 듯하여 잰걸음으로 광화문에서 벗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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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상에 발을 뻗고, 셈대에도 발을 올려놓고 느긋하게 단잠을 즐기는 <골목책방> 아저씨. ⓒ 최종규


 (2) 책은 누가 읽으라고 만드는가

고등학생 때 처음 헌책방에 발을 디딘 때부터 스무 해 가까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제가 헌책방 나들이를 하는 때를 살펴보면 늘 '머리 식힐' 생각이 클 때였습니다. 날마다 두어 곳씩 다닐 때에도 그만큼 다니며 책에 풍덩 빠지지 않고서는 마음을 추스를 수 없었다고 느낍니다. 요사이는 동네 마실을 다니기에도 빠듯하니, 헌책방 마실 또한 몹시 어려운 일이 되고 말았는데, 아이를 낳아 기르는 사람이 된다면 누구나 이와 같지 않으랴 싶습니다. 이러면서 예전에는 조금도 알 수 없던 일들, 이를테면 혼인을 하여 아이 낳고 정신없이 살아가는 사람들 마음을 얼핏설핏 느낍니다. 아이 낳고 키우는데 집구석을 쓸고 닦고 할 겨를이나 힘이 얼마나 남겠느냐를 느끼고, 우리 사회에서 남자들이란 '밖에 나가 돈만 벌면 되는 손쉬운 일'에 빠져들면서 아이를 키우는 고달픔과 즐거움을 제대로 모르게 된다고 느낍니다.

아이 키우기란 고달프기 때문에 즐겁거든요. 아이가 귀여워서 즐겁기도 하고, 나날이 달라지는 아이와 함께 있는 동안 우리 스스로 새마음이 될 수 있어 즐겁기도 하지만, 아이 치닥거리를 하는 괴로움이 있기에 한껏 즐겁기도 합니다. 빨래감이 늘고 밥하고 먹이는 일거리 늘며 재우느라 애먹으니, 먹고 입고 자고 하는 데에서 기운이 다 빠지게 되는데, 이렇게 되기 때문에 오히려 더 아이한테 사랑과 믿음을 쏟을 수 있다고 느낍니다.

하루하루 고단한 일이 쌓이는 도시살이에서, 이러한 도시살이를 술 한잔으로 달래는 길도 있습니다만, 책 한 권으로 달래는 길도 있습니다. 책 한 권으로 달래어도 달래어지지 않거나 다스려지지 않아 앙금이 남기도 하는데, 이 앙금 또한 우리가 살아가는 힘이 되면서 날마다 새 삶을 붙잡도록 한다고 느낍니다.

예전에 살던 평동 옆길을 지납니다. 영천시장 한켠에 자리잡고 있는 헌책방 〈골목책방〉을 오가느라 이 길을, 그러니까 평동 길이며 냉천동 길이며 현저동 길이며 얼마나 거닐었는가를 곱씹습니다. 헌책방에만 다녀오기도 했으나, 경기대학교 둘레를 빙 돌아 보기도 했고, 북아현동으로 넘어가거나 충정로동으로 넘어가기도 했습니다. 이화여대 뒷문 쪽으로 굴을 가로질러 거닐어 보기도 했고, 현저동과 무악재를 지나 홍제동으로 거슬러 보기도 했으며, 내처 연신내나 불광동까지 걸어 그곳에 있는 헌책방까지 쏘다니기도 했습니다. 독립문에서 사직동을 거쳐 누하동 쪽으로 틀면서 또다시 굴을 하나 지나 기와집 자리에 깃든 헌책방을 둘러보다가는 청와대 옆길을 따라 가회동으로 넘어가 중앙고등학교 옆 조그마한 헌책방에 기웃해 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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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시장 맨 끝쪽 골목 들머리에 <골목책방>이 있습니다. ⓒ 최종규


뚜벅뚜벅 걸으면 다리에 알이 배기는 소리가 들립니다. 가방끈이 한 올 두 올 풀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머리부터 이마와 뺨을 타고 목아지와 가슴으로 주루룩 땀이 흐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책방에서 두어 시간 서서 책을 보다가 두어 시간을 걸어 다른 헌책방을 찾아가 또 서서 두어 시간 책을 보다가 다시 두어 시간 거닐며 골목골목 쏘다니다가 겨우 보금자리에 들어오면 가방을 내려놓고 방바닥에 그대로 드러누웠습니다. 혼자서 살 때에는.

둘이 살림을 꾸리고, 아기까지 셋이 살림을 꾸리는 요즈음은, 아기를 안고 두 시간쯤 걷게 되면 다리뿐 아니라 팔이 저리다 못해 아무 느낌이 없게 됩니다. 이렇게 아기를 안고 다니면서 집으로 돌아오면 아기는 어느새 새근새근 잠들어 있어 살며시 바닥에 내려놓고 가방도 내려놓고 등허리를 툭툭 치면서 펴다가는, 그사이 밀린 빨래를 하러 씻는방에 들어갑니다. 이제는 집으로 돌아와도 곧바로 드러눕지 못합니다.

이런 생각과 저런 생각에 잠기며 걷다 보니 어느새 책방 앞. 사진기를 꺼내 책방 둘레 모습을 몇 장 담습니다. 사진기는 어깨로 옮기고 〈골목책방〉 아저씨나 아주머니가 앉아 있는 자리 옆에 가방을 내려놓습니다. 아저씨가 책꽂이 벽에 등을 기댄 채 단잠에 빠져 있습니다. 몇 해 있으면 이곳 〈골목책방〉은 마흔 해 역사를 찍게 됩니다. 마흔 해 가까이 헌책 먼지를 마시며 손과 얼굴이 새까맣도록 일한 아저씨는 이제 늙은 나이이니 조금만 움직여도 고단하실 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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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그림 ⓒ 플래닛미디어

《고든 L.리트먼(글),피터 데디스(그림)/김홍래 옮김-인천 1950》(플리닛미디어,2006)이라는 책을 조용히 들어 구경합니다. 책을 넘기면서, 미국사람들은 어느 전쟁에 끼어들든 이렇게 저희들 움직임을 꼬박꼬박 적어 놓고 책으로 엮어내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그런데, 누가 어떻게 싸워서 몇몇이 죽고 몇몇이 살아남아 어떻게 이기거나 졌다고 하는 이야기를 넘어서는 가운데, 이러한 싸움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가슴이 찢어지고 마을이 무너졌으며 터전이 주저앉았는지, 또한 자연 삶터는 얼마나 엉망이 되고 자연 목숨붙이 보금자리는 어떻게 되었는가를 따지는 책이란 없을까 궁금합니다. 전략과 전술을 넘어, 사람과 자연을 톺아보는 이야기를 다룰 '한국전쟁 이야기'를 펼쳐낼 책은 이 나라에서 나올 수 없는지 궁금합니다.

잡지 《월간 중앙》(중앙일보사) 1976년 5월호(98호)가 하나 보입니다. 차례를 살피니, 임종국 님이 쓴 〈일제하의 인력ㆍ물자 이렇게 수탈됐다〉라는 글이 한 꼭지 보입니다.

.. 그럼 이 조사가 있었던 1943년도의 물가 수준은? 맥주 1병 값이 공정가격으로 1원 70전 정도였다. 한국인 노무자들의 75%는 목숨을 건 1개월 간의 위험한 작업 끝에 맥주 10여 병 내지 많아서 30병의 보수를 수령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제의 편견과 차별대우가 이러했기 때문에 한국인 노무자들은 도저히 필설로 옮길 수 없는 가혹행위를 당하고 있었다. 우선 맥주 30병 값인 한 달 임금도 도망방지를 위해서 90% 이상 강제저축 당하기 일쑤였다 … 이러한 일들이 30년 전인 과거로 흘러간 지금, 우리는 피압박 민족의 설움을 얼마만큼 반성했는가. 일본은 그들이 범한 죄과에 얼마만한 책임을 졌는가, 미래를 위해서 다시 생각해 봄직한 일이다 ..  (2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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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 <월간 중앙> 겉그림. ⓒ 중앙일보사

1975년에서 서른 해 앞이면 1945년입니다. 지금은 이 잡지가 나온 지 서른 몇 해가 흘렀습니다. 일제강점기 이야기는 예순 해가 흘러간 일이 되었습니다. 이동안 일제강점기 이야기는 많이 살펴보게 되었고 여러 가지 책이 나왔습니다. 제법 꼼꼼히 지난날 발자취를 돌아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나 학교를 마친 사람들이나 '우리 역사가 어떠했는지' 제대로 아는 숫자는 그리 안 많습니다. 강제징용으로 애먹은 사람들 눈물과 아픔을 우리들은 얼마나 살갗으로 느끼고 있을까요. 이 눈물과 아픔은 얼마나 갚음을 받았을까요. 역사책에 한두 줄 적히고 수능시험에 한두 번쯤 나오는 문제를 넘어서면서, 우리 삶으로 녹아드는 이야기로는 우리 스스로 얼마나 깨우치거나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있을까요.

두툼한 《한국출판연감 2007 자료편》(대한출판문화협회,2007)을 집어들다가는, 얇고 가벼운 안내도록 《霧島》를 집어듭니다. 《霧島》는 일본 국립공원 '키리시마'를 보여주는 사진도록입니다. 스무 해쯤은 묵었구나 싶은 안내도록인데 제법 잘 엮었습니다. 부럽습니다.

《동아학생과학도감 (7) 과학실험》(동아출판사,1981) 하나를 봅니다. 흩어져 짝 잃은 한 권인데, 짝이 다 맞추어진 채 들어왔다면 한결 나았을 테지만, 한 권만 흩어져 있기에 이 한 권만 본보기책으로 값싸게 장만할 수 있기도 합니다.

책 앞머리에는 출판사 편집부에서 "이 책은 여러분이 교과서를 떠나서 보다 폭넓고 풍부한 과학 지식을 쌓게 하며, 또 과학에 흥미를 갖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들의 생활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동ㆍ식물, 곤충, 물고기 등과 오묘한 인체의 구조, 신비한 우주의 세계, 기상의 변화, 교통기관, 통신ㆍ산업 기계, 그리고 손쉽게 할 수 있는 과학 실험에 관한 것들을 생생한 그림과 선명한 사진 자료를 곁들여 재미있게 정리해 놓은 것이다."고 적어 놓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 실린 수많은 사진과 그림은 '일본에서 나온 과학실험 도감'에서 오려붙여 놓았습니다. 마땅한 소리이지만, 출판사 편집부는 어디에서 자료를 얻었는지 하나도 밝혀 놓지 않습니다.

어릴 적에는 이러한 책이 오로지 한국사람 힘으로 빚어낸 줄 알았습니다. 뒷날 출판사에 들어가 어린이책을 만들게 되면서, 또 이무렵부터 옛날 일본 책을 들춰보면서, 더욱이 출판사 자료로 장만하려고 헌책방에서 '일본 어린이책'을 사들이면서, 그리고 출판사에서 일본 출장을 보내주어 일본 책방을 죽 둘러보면서, '내 어린 날 보던 이런 여러 가지 과학실험도감 들은 하나같이 몰래 훔쳐온 책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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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에 나온 과학도감. ⓒ 최종규

1980년대가 다 가도록 이런 흐름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1981년에 나온 이 《동아학생과학도감》을 놓고 무어라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이렇게 이웃나라 좋은 어린이책을 베끼거나 오려붙이면서 엮은 책으로 '돈을 많이 번' 출판사들이 그 뒤로 오늘날까지 어떤 책을 펴내고 있느냐입니다. 지난날 잘잘못은 그렇다 하고, 오늘날은 새롭게 아름다이 거듭나고자 얼마나 어떤 땀을 흘리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책 팔아 번 돈으로 정수기를 만들어 팔거나 비데 만들어 팔지는 않는가요? 책 팔아 번 돈으로 땅장사 집장사 하지는 않는가요? 책 팔아 번 돈을 책 만드느라 적은 일삯으로 늦은밤까지 땀흘린 일꾼들한테 덤일삯을 쥐어 준 적은 있는가요?

우리네 책마을을 가만히 헤아려 봅니다. 지난날에는 몰래 훔쳐쓰다가 이제는 돈 내고 옮겨냅니다. 그렇지만 우리 스스로 우리 품과 땀과 돈을 들여서 우리 아이들한테 내놓을 책을 만드는 책마을 문화란 아직까지도 뿌리내리지 못합니다. 몇 군데 출판사에서 힘쓰고 있습니다만, 책 팔아 돈 번 출판사에서는 좀처럼 이 일에 나서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한테는 우리 스스로 우리 삶터를 아름다이 가꾸는 일이란 너무도 힘들거나 멀디먼 일이 되어야 하는 듯합니다.

그래도, 이 《동아학생과학도감》에는 이 땅 아이들 사진이 몇 장 섞여 있습니다. 1980년대 첫머리 국민학교 아이들 모습을 살짝이나마 엿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자료 삼아 집어듭니다.

 (3) 책잔치, 책검열, 책길

잡지 《기획회의》 235호(2008.11.5.)를 들춥니다. 철지난 잡지이기에 헌책방에 들어오고, 철지난 잡지이기에 값싸게 장만합니다. 또한, 철지난 잡지이기에 이 잡지에 실린 이야기를 좀더 느긋하게 돌아보게 됩니다. 잡지가 갓 나왔을 때에만 반짝반짝 빛나는 이야기일는지, 잡지가 나오고 몇 달이 지났어도 눈 밝히며 읽을 만한 이야기일는지, 잡지가 나온 지 여러 해 되었어도 빛이 수그러들지 않는 이야기일는지를 곰삭입니다. 갓 나온 잡지는 갓 나온 잡지대로 재미있고, 해묵은 잡지는 해묵은 잡지대로 재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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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그림.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기획회의》 235호에서는 '북쇼'라는 책잔치 이야기를 다룬 꼭지 하나만 제 눈에 들어옵니다. 다른 꼭지는 영 시원치 않다고 느낍니다. 몇 달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케케묵은 이야기가 되었다고 해야 할는지, 그냥 한 번 슥 보고 버리면 되는 글이었다고 해야 할는지, 어딘가 께름하고 섭섭합니다. 그래도 이 꼭지 하나를 보고자 책을 집어듭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는 이 꼭지 하나만 눈에 들어올는지 모르나, 앞으로 열 해나 스무 해 뒤에는 다른 꼭지가 시나브로 제 눈에 콱 박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 북쇼는 아직 진행중이다. 행사의 성공과 실패 여부를 판단하고 평가하기엔 이르다. 하지만 몇 가지 아쉬운 점은 보인다. 우선 홍보 미흡이다. 일반 독자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채 '그들만의 잔치'가 돼 버린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공영방송소와 함께 주최한 행사라는 데 너무 의존한 것일까. 타 방송과 신문에는 거의 노출되지 않았다. TV의 위력이 대단한 것은 맞다. 하지만 우리가 체험한 TV의 위력은 '프라임 타임'의 힘이 컸다. 앞서 사례로 든 〈느낌표〉나 〈내 이름은 김삼순〉 모두 황금시간대 프로그램들이었다. 반면 KBS의 이번 〈북쇼〉 관련 프로그램은 모두 시청률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낮 2시대와 자정 이후 프로그램. 당연히 시청률도 낮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독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끌어내지 못했다. 나름 내실 있는 전시회가 마련됐지만 관람객 숫자는 기대 이하였다. 10월 26일 일요일에 북쇼 전을 찾은 관람객은 1000명 수준이다. 물론 파주출판도시가 갖고 있는 접근성 문제일 수도 있다. 또 세상이 온통 '경제 위기, 주가 폭락' 공포에 질려 있다. 차를 몰고 교외로 나가 호젓한 북쇼를 즐길 여유가 없어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관람객이 적었다고 북쇼 행사 자체를 도매금으로 폄훼할 수는 없다. 우선 새로운 형식의 독서 진흥 운동을 시험해 봤다는 데 의의가 있다. 전시와 공연, TV 고양 프로그램을 책과 연결함으로써 책이 모든 문화 콘텐츠의 원형이요, 중심이란 걸 알리는 것. 이번 북쇼의 가장 큰 의미다 ..  (60∼61쪽/중앙일보 이지영)

'북쇼' 이야기를 읽다가 문득문득, '책잔치라는 마당은 왜 서울이나 서울에서 가까운 곳에서만 이루어지는가' 하고 궁금해집니다. 크나큰 잔치판만을 몇 가지 벌이는 일도 나쁘지 않지만, 전국 곳곳에서 조그맣게 책잔치를 꾸려 나갈 수 있으면 한결 낫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시와 군만이 아닌, 구와 읍에서도, 또 동과 면에서도 조촐하게 다달이 책잔치를 꾸려 낼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일장을 하듯 판을 짤 수 있고, 많은 사람이 몰리지 않더라도 '책 좋아하는 사람'한테 오붓한 자리로 가꿀 수 있습니다. 또한, 책만이 아닌 영화와 연극을 함께 묶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 노래와 춤도 함께 여밀 수 있습니다. 방송국에서 뒷배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구청이나 동사무소에서 뒷배를 하면서 꾸준하게 동네잔치를 벌이면 넉넉합니다. 멀리멀리 나들이를 가지 않더라도 언제 어디서나 책잔치를 맞이할 수 있도록 하고, 동네마다 다 다른 빛깔과 삶자락에 따라서 책잔치를 이루어낼 수 있도록 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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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그림. ⓒ 최종규

일본 만화 《江川達也-東京大學物語》(小學館,1994) 7권 하나가 보여 집어듭니다. 책 안쪽 종이에 연필로 "부산지역단속구입도서 94.12.13."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엥? 뭔가? 판권을 봅니다. 1994년 12월 5일에 2쇄를 찍었다고 나옵니다. '단속 구입 도서'란 무엇인가 생각해 보니, 경찰들이 때 되면 '불온ㆍ음란도서 단속'이라는 건수 올리기를 한다고들 했는데, 그런 행사치레로 다니면서 사들인 책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싶습니다. 《동경대학 이야기》라면 아마 '음란도서'였을 테지요. 이 만화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 만화가 조금도 '음란한 만화'일 수 없을 테지만, 사이사이 깃든 몇 대목이 '청소년이 보기에 안 좋다'고 여겼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일본에서 《동경대학 이야기》는 '음란 만화'도 아니요 '포르노 만화'도 아니요 '저질 만화'도 아닙니다. 그냥 '청소년 만화'일 뿐입니다. 다만, 한국 사회나 문화에서 정 받아들이기 힘들다면 '열아홉 살 밑으로는 보지 말도록' 하는 빨간딱지를 붙이면 됩니다. 처음부터 깡그리 거두어들일 까닭도, 아예 가로막을 까닭도 없습니다.

그나저나 1994년부터 열 몇 해가 흐른 오늘 우리 나라는 어떠한가 모르겠습니다. 요즈음도 이 만화책은 '단속 대상'에 걸릴까요. 국방부에서 불온도서를 들먹이고, 국방부가 아니더라도 공안기관에서 불온도서를 이야기하고 있으니까요.

따지고 보면, 국방부든 경찰이든 이들만 불온도서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우리 언론과 지식인도 불온도서를 이야기합니다. 이들 언론과 지식인은 '우리 삶과 삶터를 북돋우는 책'을 있는 그대로 알려주면서 읽으라고 글을 쓰지 않습니다. 일부러 안 알리는 책이 있으며, 어쩔 수 없이 알려야 할 때에는 깎아내리거나 대충 한 줄쯤 끄적이고 파묻어 버립니다. 출판사에서도 돈 되는 책을 내려고 생각이 바뀌지만, 언론과 지식인부터 '사람들이 읽을 책'을 알리는 자리에서 돈 되는 책 아니고는 웬만하면 들추어 내지 않습니다. 이른바 '처세-자기계발'이라는 이름이 붙은 숱한 책들 말입니다. '학습도서-학습만화'라는 이름이 붙은 어마어마한 책들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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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서니 드 멜로 님 책은 세월이 묵을수록 더 빛이 납니다. ⓒ 성바오로출판사

.. 자기를 의식하는 것을 사람들은 종종 이기주의의 양상으로 여깁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기를 잊고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쓰도록 강요당합니다. 이런 종류의 충고가 얼마나 파괴적인가를 이해하려면, 좋은 뜻에서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쓰지만, 자기 자신 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상담원이 그의 환자와 상담하는 것을 녹음으로 들어 보면 금방 알 수 있읍니다. 만일 이 착한 상담원이 자신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모르고 있다면, 그는 환자의 마음속 깊은 데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또는 그와 환자 사이에 어떤 상호작용이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분명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그의 환자를 보다 효과적으로 도와줄 수 없게 되고, 심지어는 직접적으로 해를 끼칠 위험성까지 있읍니다 ..  (60쪽)

옆지기한테 선물할 책으로 《앤소니 드 멜로/이미림 옮김-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성바오로출판사,1985)을 골라듭니다. 아까부터 느긋하게 쉬고 있던 〈골목책방〉 아저씨가 깨어나시고, 이 작은 책까지 해서 책값을 셈합니다. 여러 달 만에 모처럼 찾아온 〈골목책방〉 책꽂이는 사뭇 달라져 있습니다. 안쪽에 잔뜩 쌓여 있던 책을 모두 덜어내어 아주 시원하게 되었습니다.

쌓여 있던 책은 팔렸을는지, 아니면 폐지처리장으로 버려졌는지 모를 노릇입니다. 오래도록 새로운 임자를 기다렸으나 새 임자를 만나지 못했으니 버려지는 책입니다. 책 하나하나를 살피면 더없이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죽어 없어지는 책이 있어야, 새로 나오는 책들이 이 자리를 차지하면서 또다른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곤 합니다. 새책방에서도 꾸준하게 새책이 새로운 책시렁을 차지해야 하듯, 헌책방에서도 꾸준하게 새 헌책이 새로운 책시렁을 차지해야 합니다. 어버이가 죽고 아이들이 새로 어버이가 되듯, 책 또한 삶과 죽음을 되풀이합니다.

우리 목숨은 고맙게 한 번 얻어서 고맙게 한 번 살다가 떠나게 될 테지요. 오늘 만난 이 책이 제 손에 들어와 즐거이 읽히면 살아나지만, 제 손을 떠나 다시 읽히지 못하면 죽어 버리듯. 한 번씩 돌아오는 삶과 죽음에서 이 삶을 놓치지 않고 이 죽음을 너무 빨리 맞이하지 않고자 바둥거리기도 할 테지만, 살아 있는 동안은 삶을 즐기고, 죽음과 가까워지는 동안은 죽음을 고맙게 여길 수 있으면 우리 한살이로서 흐뭇하거나 너끈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더 많은 책을 만들어 낼 출판사가 아니라 세상에 내놓을 만한 책을 내놓는 출판사가 되어야겠고, 더 많은 책을 읽어 낼 우리들이 아니라 삶자락을 고이 돌아보고 가꾸는 길잡이가 되는 책을 찾아 읽는 우리들이 되어야겠다고 느낍니다. 5호선 서대문역 쪽으로 걸음을 바삐 놀립니다. 너무 늦지 않게 집에 닿아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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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잣거리로 들어서는 오래된 골목길 한켠에 자리한 헌책방 <골목책방>은 1971년부터 이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 최종규

덧붙이는 글 | - 서울 독립문 〈골목책방〉 / 02) 313-5066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작은자전거 : 인천+부천+수원 자전거 사랑이] http://cafe.naver.com/inbusu


덧붙이는 글 - 서울 독립문 〈골목책방〉 / 02) 313-50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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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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