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자기로 싼 책선물 받아보셨나요?"

[괜찮아④] 친환경포장재 보자기 싸는 여자, 이효재

등록 2009.04.27 17:13수정 2009.04.27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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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경제난으로 소비가 줄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이 봄, 입을 게 없다"는 딸의 하소연에 "옷장부터 정리하라"는 어머니의 잔소리가 '괜한' 소리로 들리지 않는 요즘입니다. 비단 아껴 쓰는 것에서 나아가 '다시' 쓰고, '나눠' 써도 "괜찮다"고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버려지는 보자기를 값비싼 포장재로 변신시켜 주목을 받은 이가 있어 만나 보았습니다. [편집자말]
대한민국에서 보자기를 제일 잘 싸는 사람, 살림 잘 하는 여자로 대한민국 주부들 사이에서 소문난 사람, 피아니스트 임동창씨 부인으로도 알려진 사람.

이번에 네 번째 책 <효재처럼 살아요>를 낸 베스트셀러 작가 이효재씨가 바로 그 주인공. 그를 만나러 간 지난 22일은 봄내음 가득하지만 쌀쌀한 바람이 옷깃에 스미는 날이었다.


효재씨의 바쁜 일정 때문에 예정보다 일주일이나 지나서야 성북동에 위치한 작업실 '효재'에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효재씨는 대뜸 "식사는 하셨어요? 지금 잡채 해서 먹고 있는데, 점심 안 먹었으면 잡채 좀 드세요"라고 웃음 띤 얼굴로 맞이한다.

그렇게 우리는 제비꽃이 한참 고개를 내미는 마당으로 나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향이 좋은 뽕잎차를 앞에 두고.

<효재처럼 살아요>는 내 상처에 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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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재처럼 살아요> 겉표지 ⓒ 문학동네

- 선생님 이름이 찍힌 네 번째 책 <효재처럼 살아요>가 나왔는데요. 책 한 권을 내실 때마다 어떤 마음이신지 궁금합니다.

"책을 한 권 낼 때마다 단계별로 걸러지는 느낌이에요. 첫 책 <효재처럼>은 그냥 썼고, 두 번째 책 <효재처럼, 보자기 선물>은 직업상 전문적인 느낌으로 썼어요. 고무줄이라는 편리한 도구를 사용해서 보자기를 싸기 위해, 그 고무줄 매듭법을 정리해야 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두 번째 책이 정이 가요. 세 번째는 동화책을 썼는데, 앞으로도 동화책 쓰는 사람이고 싶어요. 그리고 <효재처럼 살아요>에는 여백을 많이 주었어요.


하이쿠라는 일본시를 좋아하는데, 그런 시뿐만 아니라 우리 말도 참 예쁜 게 많죠. 예를 들어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와 같은 표현, 또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와 같은 표현들. 정말 아름답지 않나요. 나는 그런 우리 말이 좋아요. 이 번 책 속의 글은 하이쿠까지는 가지 못했지만, 그 중간 단계라고 할 수 있어요. 많은 것을 걸러냈어요. 그러나 글이 적은 대신 수를 놓듯, 단어 하나하나에 내 언어를 담아서 썼어요." 

- 이번 책이 의도하셨던 바라고 하지만, 독자 입장에서는 사실 에세이가 많지 않아 아쉽다는 반응도 있는데요.

"이번 책을 내면서는 나 또한 디자이너이기 때문에 나름 원칙이 있었어요. 글씨를 크게 쓴다는 거였죠. 이 부분에서 출판사랑 의견이 달라 좀 싸웠는데, 폼이 안 난다는 거예요. 그러나 글씨를 크게 써야 쉽게 읽혀요. 사실 남 얘기 별 관심 없잖아요. 글자를 키우고, 글은 줄이고, 그림 배치를 시원시원하게 했어요. 또 욕심을 내서, 우리가 타샤 튜터 책을 수입한 것처럼, 내 책 역시 외국어로 번역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 때 글이 많으면 어렵지 않겠어요? 글은 쉽게 풀어 썼고 우리 문화를 담았죠. 자수나 연못그림을 넣고. 이렇게 멀리까지 생각했어요." 

- 그 짧은 글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나요.
"많이 걸러진 내 마음 속 얘기들, 상처를 이야기 하고 싶었어요. 흙손으로 집을 때우는 미장이처럼 나도 상처 받으면 흙손으로 그 상처를 때웠죠. 이 책은 미장이가 흙을 바르듯, 그런 내 상처를 때운 이야기예요. 나이 오십이 넘어 이제 그 상처에서 빠져 나왔고, 그래서 과거형으로 글을 썼어요. 글을 쓰는 내내 편안했고 행복했어요. 이제는 다른 일을 해도 지금 평화 때문에 좋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상처에 대한 분노를 적은 게 아니라 상처를 과거형으로 담담하게 써서 그런지 마감하고 행복했어요. 가을 단풍 속에서 겨울을 준비하는 나이에 편안하게 썼어요." 

- 그래도 책을 지으실 때 주제가 있었을 것 같은데요. 
"'나는 외롭다. 혼자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책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다들 행복해하지 않을까 싶어요. 나는 이 여자보다는 외롭지 않구나, 생각하면서. 텔레비전을 보면서, 또는 세수를 하면서, 이 책을 읽은 모든 사람들이, 나는 이 여인보다는 행복해, 이럴 것 같았어요."

- <효재처럼> <효재처럼 보자기 선물> <효재처럼 살아요>까지, 선생님 책 모두 '효재처럼'이란 타이틀을 달았는데요. 어떤 의도가 있는 건가요?

"'출발은 미약하지만 그 끝은 창대하리라' 이 말이 전 진리라고 봐요. 첫 책을 낼 때 제목을 가지고 고민을 하다가 출판사에서 '효재처럼 살기'로 제목을 지었어요. 나는 사실 더 근사한 이름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냥 지나갔죠. 그러다 남편한테 책 제목을 얘기했더니 '살기'를 빼래요. '아름다움'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그 '름'때문이래요. 음악가가 말하는 것이니까 그래서 '효재처럼'으로 했어요. 두 번째 책 '효재처럼 보자기 선물'은, 일하는 친구가 지었고.

이번 책은 사실 '아름다운 것은 다 나를 유혹한다'라는 제목을 내가 지었어요. 그렇게 표지까지 나왔는데, 마지막에 출판사가 대형서점에서 시장조사를 했어요. 그런데 '효재처럼 살아요'에 몰표가 나왔대요. '아름다운 것은 다 나를 유혹한다'는 한 표도 안 나왔대요. 그래서 제가 '깨갱'한 거죠. 그래도 나는 '아름다운 것은 다 나를 유혹한다'가 훨씬 마음에 들어요.

의식주는 어차피 다 함께 하는 것이고, 우리 문화라고 해서 세계적인 게 아니고,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아름답다, 그런 뜻으로 지었거든요. 그러나 나는 어렸을 때 기차놀이를 할 때처럼 맨 뒤에서 끌려가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효재'(効齋)는 '본받는 집'이란 뜻이거든요. 힘있는 학교, 배우는 학교, 본받는 집. 이 이름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 때문에, 저런 제목이 생겨나지 않았나 싶어요. 나는 잘 살아야 해요. 본이 되는 이름이잖아요." 

- 그럼 앞으로 나올 책에도 '효재처럼'을 붙이실 건가요?
"네, 앞으로도 그렇게 붙인대요. 시리즈 별로. 브랜드가 되는 거죠."

"얼어죽은 나무도 안 잘라요. 쓰임 생길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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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자기 싸기 ⓒ 이지아


- 선생님은 '보자기 아티스트'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요. 보자기를 주목한 계기랄까 그런 게 있나요?
"보자기는 스폰지에 물이 스며들듯 자연스럽게 접했어요. 내가 한복집을 하니까. 혼수는 보자기로 싸잖아요. 어릴적 학교 다닐 때는 보자기로 책을 쌌고, 그런 시대를 살았죠. 혼수집을 하다 보니 매번 보자기를 썼어요. 그런데 직업상인지 경험인지, 아니면 피 때문인지 다른 사람이 싼 것보다 내가 싼 게 더 예뻤어요.

그러다보니 솜씨 좋은 집으로 소문이 나고, 귀한 거, 외국으로 나가는 걸 싸달라는 의뢰를 받게 된 거예요. 그렇게 보자기를 계속 싸다보니 내 나름의 보자기 싸는 법이 만들어 진 거고, 그래서 두 번째 책을 냈어요. 책에는 보자기 신이 내렸다고 했지만, 사실 그냥 내공인 거예요. 너무 오래 싸다보니까. 보자기를 너무 싸서 팔에 깁스를 하고 살았어요. 나을 만하면 또 싸고, 나을 만하면 또 싸고."

- 선생님은 보자기가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고 있다'고 하셨는데, 어떤 면에서 그렇게 보시나요?
"보자기의 색과 그 질감 그리고 또 지구환경 때문이에요. 사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더 좋은 차, 더 좋은 집, 더 좋은 음식을 원해요. 그렇다면 우리가 환경을 위해 아낄 수 있는 것은 포장재라고 생각했어요. 쇼핑 가방 한두 개쯤은 누구나 아낄 수 있어요. 아마존 보존하자고 '휴지를 쓰지 말고 짚을 씁시다'라고는 할 수 없잖아요. 보자기 하나 더 쓰면 쇼핑백 하나 줄일 수 있어요." 

- 보자기 포장이 지구환경에 그렇게까지 영향을 미칠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요.
"책 선물을 보자기로 하나 싸면 지금 당장 보자기 값이 더 든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러나 보자기로 싼 선물 받아본 사람은, 그 아름다움을 느끼면 다시는 뜯는 포장 안하게 될 거예요. '뜯다'보다 '풀다'가 예쁘고, 그런 경험을 한두 번 하게 되면 사람은 바뀌게 돼요. 나는 촛불이 되기를 원하지 않아요. 그냥 성냥개비만 되어도 그 에너지가 모여 화산 하나가 될 수 있어요." 

- 그렇다면 보자기를 직접 만들어 장만해 두고 싶은 분들을 위해, 쉽게 보자기 만드는 방법을 알려준다면요?
"집집마다 서랍을 열면, 백화점표 보자기가 많아요. 안 쓰는 손수건도 넘쳐나고. 더 잘 하고 싶다면 결혼할 때 입었던, 작아서 못 입는 한복을 세탁소 가져다 주면 몇십 장도 만들어요. 커튼 오래된 것도 보자기로 만들 수 있고. 애정이 있으면 천지가 다 보자기예요. 정말 좋은 보자기를 원하면 인터넷으로 주문해도 되고요. 싱크대 세 번째 서랍에 보자기 열 장 씩 없는 집 없어요. 세탁소에 가져가면 원하는 크기대로 다 만들어 줘요. 나는 보자기 장사가 아니라, 보자기에 눈 뜨게 하는 길잡이이고 싶어요." 

- 그래도 집에서 만들어 보고 싶은 분들을 위해 정보를 주신다면요.
"집에서는 못 만들어요. 재봉틀이 거의 없잖아요. 세탁소에 가져다 주면 돼요. 손바느질 하겠다고 덤비면 금세 귀찮아지고 하기 싫어지죠. 손바느질 하는 건 자살 행위예요. 쉽게 동네 세탁소에 가져다 주고 차라리 그 시간에 콩자반을 맛있게 하는 방법, 라면 맛있게 끓이는 방법을 연구하는 게 나아요. 이젠 모든 게 전문화되었잖아요. 나도 재봉틀을 사야 될까, 뜬금없이 이러지 말고, 자기가 처해진 위치에서 자기 일을 즐겨야 해요. 예쁜 보자기가 필요하면 주문하면 돼요." 

- 보자기 외에 생활 속에서 재활용 할 수 있는 효재만의 재활용 법 같은 게 있다면.
"예쁜 돌멩이 주워다가 김을 누를 수도 있고, 메모장이나 서류 눌러 놓을 수도 있어요. 빈 물병을 잘라서 곡식 담아 둘 수도 있죠. 그리고 저는 겨울에 먹은 미나리를 장독대에 키우고 있어요. 창가에 키워서 한 번 베어 먹고, 다시 올라온 거 장독대에 키워요. 미나리 싹 안버리는 거 누구나 할 수 있어요. 지금 입고 있는 이 옷도 사실 남이 준 거예요. 원래는 낡은 옷 두 벌이었는데 제가 꿰매서 하나를 만든 거죠. 이렇게 하니까 덧붙인 옷이 허리를 다 가려줘서, 사람들이 날씬하다고 착각을 해요. 십년도 더 된 거예요.

얼어죽은 나무도 안 잘라요. 어느날 초라도 하나 걸어야지, 생각해요. 죽은 나무지만 살아있는 초를 걸고 등잔을 걸고, 쓰임새 있게 써먹어야지, 항상 생각해요. 쓰임새가 생길 때까지 놔둬요. 용도 알아내기까지 여러 달 걸렸는데 운동화 빨아서 걸고, 장갑 말릴 때 걸고, 호미도 걸고 해야죠."

- 여담이지만, 이번에 나온 책을 보니 모두 똑같은 옷을 입고 계시던데요.
"항상 똑같은 옷을 입어요. 윗도리가 5개 있어요. 일하는 데 편해요. 빨간 옷은 나보고 항상 아파 보인다고 해서 입는 거고, 광목 옷은 똑같은 것을 4개 만들어 놓고 입어요. 일할 때 입으려고 만들었는데, 중간에 고무줄이 있어서 설거지할 때도 좋아요.

- 일할 때 입는 옷이라고 하지만, 외출할 때 입어도 손색없어 보여요.
"이게 이제 효재 스타일이 된 거 같아요."

나를 귀하게 만드는 과정, 그게 행복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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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재씨의 정리벽을 엿볼 수 있는 소박한 살림살이들. ⓒ 이지아


- '살림하는 여자' 집안인데, 눈에 띄는 살림살이가 별로 없네요.
"나는 뭐든지 정리를 해요. 정리병이 있어요. 병적으로 정리를 해요. 그래서 눈에 안 띄는 거예요." 

- 요즘 살림하는 주부들이 선생님을 많이 좋아하는 이유가 뭘까요.
"나를 보면 힘이 난대요. 지금까지 역사에 주부가 주부를 보고 힘을 내는 예가 없었거든요. 주부가 주부를 보고 부러워하는 일은 좋은 일이고, 가능성 있는 일이에요. 사실 평화는 집안에서 시작돼요. 문을 쾅 닫느냐, 조심해서 닫느냐, 이런 게 상대를 변화시켜요. 엄마가 살며시 들어오는 발소리에, 엄마가 살며시 지나가는 옷자락 소리에 아이들이 감동하고 바뀌거든요. 엄마가 가진 지식 때문에 바뀌지 않아요." 

- 지나치게 완벽주의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데요. 가끔은 대충 살림하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드세요?
"근데 나는 이게 '아이구 내 팔자야'가 아니라, 어차피 죽으면 썩을 텐데, 너 참 열심히 사는구나, 이렇게 칭찬을 해요. 손도 할머니 손이래요. 손 나이가 백살이 넘어요. 하지만 다 내가 좋아서 해요. 완성되는 과정과 완성 뒤의 기쁨 때문에요. 시키면 그거 노예스러워 하겠어요?

나도 믹스커피를 마셔요. 믹스커피를 행복하게 먹는 법이 뭔지 알아요? 그냥 먹으면 행복하지 않아요. 전문점 커피 한 잔 마셨으면, 이런 생각이 들 거든요. 대신 나는 믹스커피를 마실 때 뜨거운 물로 잔을 먼저 데워요. 그 과정이 나를 귀하게 만들어요. 우유를 데우고 믹스커피를 담고, 그러면 믹스커피가 나를 행복하게 해요."

- 그런 과정이 번거롭지는 않나요? 
"그게 즐거운 거예요. 나를 대접하는 거니까. 나는 편하자고 그냥 먹으면 화가 나요. 내 인생이 왜 이렇게 비참해? 이렇게. 그러면 남이 부러워지죠." 

효재씨는 이 말을 마친 후, 그 커피를 마셔봐야 한다면서 직접 커피를 타오기까지 했다. 인터뷰하는 도중 커피가 식으면 맛이 없다고 연거푸 커피를 권했다.

- 살림하고 일하시기도 바쁘실 텐데, 대체 글은 언제 쓰시는지 궁금해지네요. 
"늘 수첩에 적어요. 이렇게 이야기 하다가도 적고, 양치질 하다가도 적고. 그리고는 같이 일하는 식구들에게 읽어줘요. 아마 식구들은 괴로울 거예요. 수첩에 적어놓은 짧은 단어들을 가지고 밤에 집중에서 글을 써요. 이번 책에 나오는 김장 김치 이야기는 하루 저녁에 다 썼고, 남편 이야기는 내 이야기이기도 하니까 적는데 30분도 안 걸렸어요."

나를 바로 서게 한 '외로워'와 '외롭다'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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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담는 선물 ⓒ 이지아

- 책 말미에 '나는 외롭고 혼자이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글귀가 참 마음에 와 닿았어요.


"인간의 가장 큰 축복이 '혼자고 외롭다'인 거 같아요. '나는 외롭다'(단호한 목소리로)와 '나는 외로워'(힘없는 목소리)는 달라요. '나는 외롭다'는 바로 서다(亻, 사람인변), 즉 외로운 걸 인정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때부터 시작이고 누군가가 나에게 기댈 수도 있어요.

산 속에 살 때, 누군가 오면 머리부터 걸어 올라 오는 게 보여요. 그럼 그 사람이 누구든지 반가워요. 내가 외롭기 때문이죠. 체험한 사람만 알아요. 지나가는 다람쥐도 귀엽죠. 그 적막함과 햇살과 고독 속에 있어본 사람만이 알아요. 내가 고독하고 외로우면 이 세상 모든 생명이 다 아름답고 다 따뜻해요. 사람들이 외롭다고 인정하면 그건 행복의 시작이에요.

그러나 '나는 외로워(人, 사람인)'로 시작하면 꼭 받침이 필요해요. '나는 외로워' 이러면 불행이 시작되죠. 외로워(人)에서 오른쪽 받침이 빠져나가면 서운한 것만 기억에 남아요. 받침이 빠져 나가면, 드러눕게 되고 다시 일어서려면 누가 받쳐 주어야 해요.

'나는 외롭다(亻)'는 여기서 시작돼요. 누군가 와서 기대도 일자로 서 있을 수 있고, 기대고 있다 떠나가도 외롭지 않아요. 나는 이미 외롭기 때문이에요. 가는 사람 잡지 않고, 오는 사람 막지 않는 경지가 '외롭다' 예요. 이 경지가 되면 흔들림 없이 외롭고, 모든 대상이 따뜻해요. 나는 누구와도 나란히 설 수 있어요. '외롭다'이기 때문에 미묘한 마음의 부대낌에서 해방됐어요. 내가 하는 '정리'는 '외롭다'에서 시작됐어요. 정리를 하면서 나를 드러냈어요. 내가 '외로워'에서 '외롭다'로 서는 과정에서 빈 물병을 자르고 뜨개질을 했어요."

- 나이 50이 되니 모든 게 평화로워진다고, 행복하다고 하셨는데, 살림하고 일하는 인생의 선배로서 대한민국 여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삶을 치열하게 사세요. 미우면 열심히 미워하고 좋으면 열심히 좋아하세요. 열심히 미워하면 그 미움이 빨리 끝나요. 많이 미워하고 많이 사랑하세요. 그럼 빨리빨리 졸업을 하고 빨리 벼슬을 얻게 돼요. 내가 50에 얻은 이 벼슬을, 그대들은 마흔에 서른에 얻기를 바라요. 벼슬을 빨리 얻으면 더 행복해져요.

열심히 사랑하고 미워하고 그래서 상대방의 마음을 느낄 수 있어야 해요. 힘든 몸은 자고 나면 회복되지만 아픈 마음은 회복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벗어나서 성장하는 거예요. 빨리빨리 치열하게 사랑하고 미워하세요. 나는 그다지 치열하지 못해서 50에서야 이 평화를 얻었어요." 

- 마지막으로 계획이 있다면
"글 쓰는 것이 꿈이에요. 동화책을 쓰고 아주 나이가 들면 만화도 그리고 싶어요. 벌써 동화책 시작했고, 다른 책도 시작했어요. 책 쓰는 일을 끊임없이 할 거예요. 내 책을 보자기로 쌌을 때, 한뭉텅이로 싸서 줄 수 있을 때까지요. 보자기 싸는 일은 런던 올림픽까지 가서 할 거예요. 런던의 상징물 하나를 보자기로 싸는 게 내 소원이에요. 그거까지 하고, 세상 속에서 하는 일은 안 할 거예요. 그 다음에는 글쓰고 풀 뽑고, 얼른 얼른 은퇴해야죠."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바로 '혼수'에 대한 강의가 시작되었다. 거의 2시간여의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바로 시작된 강의였지만, 효재씨의 얼굴 그 어디에도 피곤함은 찾을 수 없었다. 그 어디에서 저런 힘이 솟아날까 싶게 강의는 열정적이었고 유쾌했다.

그건 바로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의 삶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하루를 사랑하니, 그 하루를 이루는 모든 것, 작은 것, 낡은 것, 지금 곁에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예쁜 수가 놓인 행주를 선물 받아 돌아오면서, 마음을 싼다는 '보자기'는 한복집에서 나온 '내공'이 아니라, 삶을 사랑하는 '내공'에서 나왔음을 느꼈다.
#이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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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만큼 남아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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