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섬에 앉아 피아노 소리에 귀 기울여요

[쿠하와 함께 걷기 18] 박종선의 'The Journey with 木'

등록 2009.04.25 12:32수정 2009.04.25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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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선씨의 'The Journey with 木'은 아이 둘을 데리고 꼭 보고 싶은 전시회였습니다. 올해 불혹인 작가는 사계절 내내 나무를 만지고 다듬는 목수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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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심하게 다듬어진 빛과 소리가 나는 가구들. 차분한 음악을 들으며 의자에 앉아 또박또박 엽서를 쓰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 정진영


주간지 <시사인>에서는 박종선씨를 '시골 목수'라고 표현했는데, '목수'라는 아날로그적 단어는 매끈한 종이에 인쇄되어 나무 향기와 함께 실려 오는 것 같았습니다. 10여 년간 외면하고 살았거나 잊고 지낸 작업장 주변의 나무들 50여 그루로 가구를 만들었고, 인사동 '토포 하우스'와 '크래프트 아원', 재동 '코너 갤러리'에서 나누어 전시하고 있습니다.


박종선씨의 목공예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전시장 세 곳 가운데 가장 먼저 '토포하우스'를 찾았어요. 아이들과 있다 보면 믿기지 않을 만큼 신통하고 귀여운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보여주지 않을 때 그런 말을 하곤 하지요.

지하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먼저 내려가던 쿠하는 뒤를 돌아보더니 "삼촌, 우리 여기 와봤어"라고 했어요. 김정자씨의 전시회에도 함께 갔던 이모는 "허걱. 그런 걸 기억하다니!" 하고 엄마인 저보다 더 놀라는 기색이었습니다.

딱 한 번 가 본 곳인데도 인상적이었던지 평범한 갤러리 건물을 아이는 기억해냈습니다. 아이와 함께 다니는 제게 주변 사람들은 '어렸을 때 보여줘 봤자 다 헛것'이라면서 초등학교나 가면 그 때 데리고 다니며 체험학습 시켜주는 게 더 효과적이라고 충고하곤 합니다. 아이의 기억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 옆에서 해주는 마음에 걸리는 조언들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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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에 나오는 풍경을 큰 그림으로 보여주니 더 좋아했어요. 전시회에 가면 아이 눈높이로, 어른 눈높이로 두 가지 각도로 보게 됩니다. ⓒ 정진영


지난해 봄, 아프리카 가봉에서 25년 간 살았던 화가 김정자씨의 전시회에서 김정자씨의 그림이 아프리카의 풍경과 사람을 담았다기에, 그림책에 나오는 풍경을 큰 그림들로 보여주고 싶어 '토포하우스' 2층에서 열렸던 전시회 오픈 날 갔었습니다.

쿠하는 '소크베'가 사는 동네의 다양한 풍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28개월부터 30개월 사이에 '소크베의 물고기'를 너무너무 좋아했습니다. '소크베의 물고기'는 탄자니아 출신 존 킬라카가 아프리카 그림 '팅가팅가' 스타일로 그린 책인데, 동물을 의인화하여 단순하게 그리는 그림들은 동물의 형상에 인간의 영혼을 그린다고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모든 것을 의인화하기 좋아하는 세 살 아이와 잘 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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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는 빛으로 조절할 수 있는 조명. 나무와 빛의 조화가 은은하게 퍼졌습니다. ⓒ 정진영


나무로 만든 가구들은 어두컴컴한 공간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각도를 바꿔 빛을 조절할 수 있는 나무 조명을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조도를 낮췄나 봅니다. 행여 어두운 방이 아이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을까 염려했지만, 그건 노파심이었습니다. 모양이 다 다른 스툴을 보더니 쿠하는 신발을 벗지도 않은 채 들어가 앉으려고 했습니다.

가까운 곳에 있던 박종선씨는 신을 벗고 들어가면 흔쾌히 앉아보게 해 주셨습니다. 가구는 사람이 만지고, 앉고, 쉬는 생활을 담는 그릇입니다. 세심하게 공들여 만든 생활 그릇들을 조심스레 매만졌습니다.

수십 개의 손톱만큼 작은 나무 조각을 떼어낸 스툴이나 위압적이지 않은 사이즈의 장, 얇은 서랍이 달린 툇마루 이미지의 책상과 키 낮은 의자들은 편안해 보이면서도 미끈하고 세련된 느낌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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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래프트 아원'에 전시된 작품. ⓒ 정진영


'토포하우스' 맞은 편 '크래프트 아원'에는 여러 조각의 나무판 위에 사람이 앉거나 누워서 쉴 수 있는 휴식을 위한 가구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섬을 모티브로 한 것처럼 보이는 나무 작품과 오디오가 내장되어 있어 소리가 들리는 가구, 작은 스툴 하나가 세트처럼 준비되어 있는데, 사람들이 찾아와 피아노 연주곡을 들으며 잠시 쉬어가게 하는 전시입니다. 쿠하는 노래를 부르며 좋아하더니, "엄마, 내 동생 까이유도 얼른 데리고 들어오셔요" 하며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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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이유는 어두운 공간이 낯설었는지 엄마 곁에 꼭 붙어있습니다. ⓒ 정진영

'크래프트 아원'에서 주신 쑥차와 주스를, 감사하다는 말 한 마디로 염치 불구하고, 나누어 마셨습니다. 다양한 공예 작품을 판매하는 곳이라 쿠하에게 놋그릇과 개성 있는 금속공예 소품들을 골고루 보여주고 나왔습니다.

평소에 흔히 볼 수 없는 물건들이라 그런지 쿠하도 어른들을 따라서 조심스레 행동했습니다. 아이는 엄마의 표정이나 몸짓을 스펀지처럼 금세 흡수하곤 하는데, 낯선 전시회에 가면 특히 더 그렇습니다.

평면 회화를 보러갈 때와 조각 작품을 보러 갈 때가 다르고, 밝은 전시장과 어두운 전시장에 갈 때도 다릅니다. 전시회를 보는 즐거움 못지않게 전시장에서만 볼 수 있는 쿠하의 표정을 보는 재미도 있습니다.

인사동에서는 길을 잃기 십상입니다. 또, 목적도 잃어버리기 쉽고요. 박종선씨의 전시장 세 곳 가운데 한 곳은 못 보고 왔습니다. 우리가 가려던 재동 코너갤러리가 멀기도 했지만, 가던 중간에 미니어처로 만든 돌하우스 전시회에 눈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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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어처로 만든 돌하우스는 네 살 쿠하의 마음을 앗아갔습니다. ⓒ 정진영


어른이 보기에도 어쩜 그렇게 작고 똑같이 만들었을까 신기한 데 아이 눈에는 얼마나 예쁘고 신기하게 보일까요? 한국돌하우스협회 회원전에는 인형놀이에 흠뻑 빠진 네 살 여자아이의 발걸음을 떼지 못하게 하는 귀엽고 예쁜 작품들이 많았습니다.

조금 더 있다가는 사달라고 조를 것 같아서 얼른 귀엣말로 "떡 사줄까?" 하고 속삭였습니다. '떡보' 쿠하는 대답 대신 입 꼬리를 살짝 올리며 성큼성큼 밖으로 갑니다. 하지만 이것저것 구경을 하며 걷느라 떡집은 언제 지나쳤는지도 모르게 지나버리고 말았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전시는 토포 하우스에서 4월 28일까지, 크래프트 아원에서 4월 30일까지 열립니다.


덧붙이는 글 이 전시는 토포 하우스에서 4월 28일까지, 크래프트 아원에서 4월 30일까지 열립니다.
#걷기 #쿠하 #전시 #박종선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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