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 가면 누구나 푸른 침묵에 물들어 버린다

마음의 고향 같은 부안 능가산 내소사

등록 2009.04.28 18:48수정 2009.04.28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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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소사 전경 ⓒ 안병기

내소사 전경 ⓒ 안병기

직소폭포를 지나고 재백이재를 넘어 내소사를 찾아간다. 그동안 몇 차례 내소사에 다녀갔지만 이 길은 처음이다. 내소사 관리사무소를 지나자 이윽고 5백여 그루 전나무들이 줄지어 선 전나무 숲길이 객을 맞는다. 나 같은 사람이 어디 가서 이렇게 극진한 환대를 받을 것인가. 마음의 고향을 찾아가는 나그네의 마음이 절로 흐뭇해진다.

 

눈이 펄펄 내리는 전나무 숲길을 걸어간다. 이 길은 그 자체로 숭고하다. 어떤 사람이 이 길을 가든지, 그가 머릿속에 담고 있는 잡념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일거에 제거해 버린다. 그 텅 빈 자리엔 공(空)이 채워진다. 이상한 것은 머릿속을 비웠는데 마음은 되레 뿌듯하게 채워진 듯한 느낌을 받는다. 완전히 마음을 비우면 오히려 마음이 충만해지는 수수께끼. 나는 이 전나무 숲길을 걸을 때마다 그 수수께끼에 전율을 느끼곤 한다.   

 

천왕문을 지나 이윽고 이층 누각인 봉래루에 다다른다. 기교나 장식은 물론 단청도 칠하지 않은 건물인 봉래루가 세차게 퍼붓는 눈발에 온몸이 가려운지 늙은 피부를 마구 긁고 있다. 누 밑을 지나 돌계단에 올라서자 대웅전이 환히 모습을 드러낸다. 어두운 누 밑을 지나자 밝은 피안이 열린다는 건 얼마나 멋들어진 상징인가.

 

소래사는 언제부터 내소사가 되었을까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4권 전라도 편 불우(佛宇) 조는 "신라의 혜구두타(惠丘頭陀)가 창건한 것인데, 크고 작은 두 소래사가 있다. "라고 내소사의 역사에 대해 쓰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이야기는 이 근방에 대래사와 소래사란 두 절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소래사가 언제부터 내소사라 불리게 되었을까. 왜, 무슨 까닭으로 내소사가 되었을까. 한자사전에서 내소(來蘇)란 말을 찾아보면 이렇게 쓰여 있다. 인덕(仁德)을 갖춘 훌륭한 인물이 나와서 선정을 베풀어 고달픈 백성이 소생하는 일 혹은 임금이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는 일 등으로 풀이 돼 있다. 어쩌면 소래사가 내소사로 바뀐 이면에는 언젠가  내소사를 중건·수리할 적에 임금이 시혜를 베풀지 않았을까 추측할 수 있다.

 

전혀 근거가 없어 보이긴 하지만, 석포리에 상륙한 소정방이 이 절에 찾아와서 시주했으므로 그 뒤부터 내소서라고 불렀다는 이 지방 민간에 전해오는 전설도 있다. 이 경우에도 역시 소래사란 명칭이 바뀐 이유는 명쾌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소정방이 행위의 주체자이니 소래사가 되어야지 목적물이 앞에 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소정방이 다녀가고 나서부터  이름이 바뀐 게 사실이라면 주어와 목적어가 도치된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어쩌면 끔찍한 침략의 역사를 잊고 싶어하는 민중의 무의식에 깃든 공포가 작용한 것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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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291호 대웅보전 ⓒ 안병기

보물 제291호 대웅보전 ⓒ 안병기
 

내소사의 상징이 돼버린 꽃살문
 
대웅전은 병풍처럼 펼쳐진 가인봉 아래 한 떨기 연꽃처럼 피어 있다. 공포를 이루는 쇠서가 뻗쳐올라 추녀를 한껏 떠받치고 있는 모습이 무척 힘차다.
 
 대웅보전을 받치고 선 재목들은 나그네에게 날것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어 나뭇결이 가진 자연스런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또한 공포의 단청 역시 벗겨진 지 한참 오래되었다. 단청이 사라진 대웅보전의 공포는 세상의 어떤 아름다운 색도 결국엔 공(空)이 가진 힘에 밀려 사라진다는 사실을 나그네에게 온몸으로 설법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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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모란연꽃살문 ⓒ 안병기

빗모란연꽃살문 ⓒ 안병기

내가 얼마 만에 다시 이곳에 찾아온 것일까. 감회에 젖어 한 떨기 아름다운 꽃인 대웅전을 장엄하려는듯이  흩날리는 하얀 눈떨기들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본다.
 
저것은 화룡점정인가 아니면 쓸데없이 덧붙이는 사족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이런 내 사념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눈발은 자꾸만 흩날려서 대웅전 꽃문살에 가 닿는다. 내가 알지 못해서 그렇지 저 눈발들에도 그리움이란 게 있다는 건가.
 
대웅전 앞으로 바짝 다가가 8짝의 분합문에 아로새겨진 빗국화꽃살문·빗모란꽃살문·빗모란연꽃살문·솟을모란꽃살문을 차례로 살펴본다.

 

나는 잠시 꽃문살의 아비가 되어서, 그 옛날의 이 문짝을  처음 짜던 소목이 되어 점점 더 늙어가는 문살이 안타까워 쓰다듬어 본다. 이정록의 시 '꽃살문'을 되뇌면서.

 

꽃에는 정작 芳年(방년)이라는 말이 없다네.

그래, 천년만년 꽃다운 얼굴 보여주겠다고

누군가 칼과 붓으로 나를 키워놓았네만

그 붓끝 떨림이며 자흔 바람에 다 삭혀내야

꽃잎에 나이테 서려 무는 芳年(방년) 아니겠나?

꽃이란 게 향과 꿀을 퍼내는 출문이다 열매로 가는 입문이라

나도 고개 돌려 법당마루에 오체투지하고 싶네만

무른 주둥이 훔치는 햇살 천년 바람 천년,

법당마당의 싸리비질 자국만 돋을 새김하고 있다네.

그렇다네, 이 문짝에  拈花(염화)가 없다면

어찌 어둔 법당에 微笑(미소)가 있겠는가

풍경소리나 목탁소리에도 나이테가 있는 법,

날 쓰다듬고 가는  저 달빛 구름그림자처럼

씨앗 쪽으로 잘 바래어가시게나.

                    - 이정록 시 '꽃살문' 전문 (문학사상 2007년 2월호)

 

내소사 꽃살문을 만난 지 십여 년만에 썼다는 이 시를 시인의 누리집에서 처음 본 후 아마 수십 번도 더 읽은 것 같다. 시인의 말마따나 이 문짝에 염화가 없다면 어찌 저 안 어두운 법당을 밝히는 부처의 환한 미소가 있겠는가. 이제 누가 뭐라 해도 이 꽃살문은 내소사의 상징이다.

 

사실 난 이 시보다 시 아래쪽에 써논 시작 메모가 훨씬 좋았었다. "서둘러 피우지 않았다. 꽃살을 뜯어 옮긴 뒤, 내 목젖 꽃술이 주야장천 심한 취기에 빠졌다"라고 시인은 꽃살문을 시로 쓰고 난 뒤의 허전함을 토로하고 있다. 어쩌면 딸자식을 시집보낸 심정이 그럴는지 모른다. 무릇 모든 아름다움은 공복을 자식으로 갖는다. 그러므로 오래 간직하고 있던 아름다움이 몸에서 빠져나간 뒤엔 필연적으로 텅 빈 쓸쓸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대웅전 천장에 그려진 아름다운 국악기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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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에 그려진 악기 ⓒ 안병기

천장에 그려진 악기 ⓒ 안병기

신발을 벗고 대웅전 안으로 들어간다. 대웅전 허공엔 용과 봉황이 날아다니고 있다. 또 꽃비가 내리는 천장엔 게 몇 마리가 기어다니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내소사가 해중사찰임을 드러내려는 의도이리라.

 

전설은 황금빛 새가 대웅보전의 벽화와 단청들을 모두 그렸다고 전한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까. 단청한 솜씨가 사람의 손으로는 도저히 그릴 수 없을 만큼 신묘하다는 뜻이 아닐는지.

 

 대웅전 천장에tj  가장 특이한 그림을 찾는다면 아무래도 장구·북·해금·당비파·박·쟁과 적·생황향비파·태평소와 나발·자바라 등 국악기 그림일 것이다. 아마 대웅전 천장의 단청에 악기 그림을 그려넣은 절은 이곳밖엔 없을 것이다.
 
검은 널판에 그려진 악기들은 비천상의 천의처럼 휘날리는 흰줄과 붉은 줄을 달고 있다. 악기 그림을 오래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어디선가 천상의 음률이 들리는 듯한 착각을 느낀다.

 

이 그림이 1633년의 중건 때에 그린 것이라 추정하면 35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부처께 바치는 소리 공양을 해온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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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도 유형문화재 제125호 설선당과 요사 ⓒ 안병기

전북도 유형문화재 제125호 설선당과 요사 ⓒ 안병기

 

대웅보전을 뒤로 한 채 돌계단을 내려와 설선당으로 간다. 설선당은 조선 인조 18년(1640년) 청영대사란 분이 승려들과 일반 신도들의 수학 정진 장소로 사용하려고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는 무설전과 처마를 마주 보고 서 있다. 마치 눈싸움이라도 벌이는 듯하다. 네 무설법(無說法)'이 더 좋은지 내 '유설법(有說法)'이 더 좋은지 어디 두고보자는 듯이.

 

약간 높은 곳에 있는 설선당은 조금 아래에 있는 요사채와 합쳐져 'ㅁ' 자형 구조를 이루고 있다. 낮은 곳에 있는 요사채를 2층으로 올려서 두 건물의 지붕을 수평이 되게 한 것이다. 자연 지형을 그대로 둔 채 건물을 지은 자연주의적인 건축기법이다. 다듬지 않은 주춧돌 위에 구불구불한 자연목을 그랭이질해 앉힌 것도 그 정신의 연장이라 보면 될 터이다.

 

나는 특히 설선당 부엌으로 들어가는 문의 둥근 문미를 좋아한다. 아마도 어렸을 적 부엌에서 불을 때고 나면 부엌문의 둥근 문미에 앉아서 쉬던 기억 때문일 것이다.

 

이 아름다운 종소리를 소리를 듣고 마음을 깨달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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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소사 동종 ⓒ 안병기

내소사 동종 ⓒ 안병기

보물 제277호 내소사 고려동종이 있는 봉래루 우측에 있는 보종각으로 간다. 목책 너머로 종을 기웃거려본다. 고려 시대 동종 양식을 잘 보여주는 종으로 높이 103㎝, 입지름 67㎝의 크기의 종이다.
 
중앙엔 활짝 핀 연꽃 위에 본존불이 앉아 있고 양쪽에 협시불이 서 있다. 원래는 청림사 종으로 만들었던 것을 조선 철종 원년(1850)에 내소사로 옮겨온 것이다.

 

<한국금석전문>(아세아문화사)이란 책에는 이 종의 명문과 그 명문을 해설하는 글이 수록돼 있다. 본문보다는  거기에 덧붙인 명문이 훨씬 감동적이다.

 

내가 기유년(己酉年:1849년, 헌종 15) 9월 7일에 청림사에 머물면서 이듬해 9월 7일에 이 금종을 뚫어 내소사(來蘇寺)에 옮겨 매달았다. 명(銘)에 이르기를 "본성(本性)은 금강(金剛)을 보전하고 몸은 전륜(轉輪)을 본받는다. 소리를 들으면 마음을 깨닫고, 꽃이 피면 과실이 맺히리라"라고 하였다.

 

숭정 기원후(崇禎紀元後) 네 번째 계축년[四癸丑]9) 9월 27일에 은사(隱士) 김성규(金性圭)가 쓰고 시주하다. 지전완암정우(持殿完岩正宇)

 

현재 종은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소리를 울리지 못하는 종은 한갓 쇠붙이에 지나지 않는다. 1966년에 고 조규동 교수가 채록한 <한국의 범종>을 복각한 신나라에서 나온 2장짜리 음반엔 내소사 종이 내는 아름다운 소리도 들어 있다. "소리를 들으면 마음을 깨닫고, 꽃이 피면 과실이 맺히리라"라던 명문의 기원대로 들을 적마다 가슴이 아련해지는 소리를 갖고 있다.

 

만일 균열 우려 때문에 종을 치지 못하는 것이라면 녹음된 소리를 들려주는 것도 한번 고려해보는 것이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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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밭. 맨앞 제일 왼쪽이 '혜안 범부지비' ⓒ 안병기

부도밭. 맨앞 제일 왼쪽이 '혜안 범부지비'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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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소사 들머리 전나무 숲길. ⓒ 안병기

내소사 들머리 전나무 숲길. ⓒ 안병기

근대 내소사를 중흥시킨 비범한 '범부' 해안 스님

 

내소사를 떠날 시간이 다가왔다. 천왕문을 나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들를 곳이 있다. 오른쪽 산기슭에 있는 부도전이다. 몇 기의 부도들과 비들이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묵묵히 견디고 있다. 앞줄 제일 왼쪽에는 '해안범부지비(海眼凡夫之碑)'가 서 있다. 근대 내소사를 일으켜 세우는데 큰 역할을 한 해안(海眼)선사(1901~1974)의 행적을 기리려고 세운 비다.

 

1932년부터 내소사에 주석한 해안선사는 계명학원을 설립해 학교에 가지 못한 아동들과 배우지 못한 청년들을 교육하는 한편 선원인 서래선림을 열어 호남불교의 선풍을 진작시켰던 스님이다. 이런 해안 스님을 두고 선사라는 호칭 대신 '범부'라고 명명한 사람은 다름 아닌 불경 번역에 평생을 바치신 탄허 스님이다. 비의 뒷면엔 '생사어시 시무생사(生死於是 是無生死)'이라 새겨져 있다. '생사가 바로 이곳에서 나왔으나 이곳에는 생사가 없다'는 뜻이다.

 

해안 스님은 시도 잘 쓰셨다. 그중에서도 '멋진 사람'이란 시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구름을 찾아가다가 바랑을 베개하고/  바위에서 한가히 잠든 스님을 보거든/  아예 도(道)라는 속된 말을 묻지 않아도 좋다." 라는 구절은 이 스님이 얼마나 걸리는 데가 없는 자유자재한 스님이었는가를 알게 해준다.

 

해안 스님의 시 한 구절을 생각하면서 전나무 숲길을 걸어간다. 문득 이 전나무는 절 쪽에서부터 심기 시작한 것일까 아니면 바깥쪽에서 안으로 심어 들어온 것인지 궁금증이 생긴다. 안쪽엔 제법 줄이 잘 맞춰져 있는데 바깥쪽으로 걸어나갈수록 줄이 삐뚤어진다. 이로 미루어 천왕문쪽에서부터 심어나갔음을 알겠다. 

 

내소사를 완전히 걸어나을 떄까지 눈발은 그치지 않는다. 이제 떠나가면 내소사를 향한 내 그리움도 저렇게 하염없이 구비칠 것을 ….

2009.04.28 18:48 ⓒ 2009 OhmyNews
#부안 #능가산 #내소사 #꽃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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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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