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좋아도 되는 걸까?

[혼자 여행 떠난 간 큰 엄마 3]

등록 2009.04.30 11:23수정 2009.04.30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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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부터 일본의 '로템부로(노천온천)'을 보면 한 가지 궁금증이 일었다.

 

'춥지 않을까?'

 

이번 여행의 꽃이랄 수 있는 '료칸'(일본의 전통여관)과 로템부로를 맛보기 위해 지금껏 살아오면서 가장 비싼 숙박료를 지불해야 했다. 일본이 물가가 비싸다는 것을 알았지만 료칸의 가격은 상상 이상이었다. 게다가 유후인은 가격이 좀더 쎈 편이고 1인실은 더 비싸다.

 

하지만 어차피 '지른' 일 아닌가. 하루쯤 호사를 하는 기분으로 큰맘먹고 묵기로 했다.

 

눈이 즐거워지고 입이 즐거운 가이텐료리를 맛본 뒤 슬슬 온천으로 향했다. 온천은 밤 11시까지 아무 때나 횟수에 상관없이 즐길 수 있다. 방 안에 준비되어 있는 유카타를 입고 그 위에 하오리를 걸쳤다. 일본의 호텔에는 대부분 유카타가 준비되어 있다. 일본에 도착한 첫날밤 묵었던 호텔에도 유카타가 있었지만 불편해서 입지 않았다. 칭칭 감기거나 벗겨지거나 둘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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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천탕으로 향하는 길. ⓒ 안소민

노천탕으로 향하는 길. ⓒ 안소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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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탕 노천온천으로 가는 길. 바로 건너편에 남탕이 있다. 아침저녁으로 남탕과 여탕이 번갈아가며 바뀐다 ⓒ 안소민

여탕 노천온천으로 가는 길. 바로 건너편에 남탕이 있다. 아침저녁으로 남탕과 여탕이 번갈아가며 바뀐다 ⓒ 안소민

 

그러나 여기는 료칸 아닌가. 온천을 즐기려면 유카타를 입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입었더니 의외로 편하다. 그리고 딸그락 소리가 나는 게다까지. 처음에는 넘어질 것 같아서 뒤뚱거렸다. 우리가 보통 신발을 신고 걸을 때의 그 자세로는 불편하다. 걸음걸이를 아예 바꿔야 한다. 아예 질질 끄는 느낌으로 신었더니 그제야 좀 낫다. 제일 싫어하는 것 중의 하나가 신발을 질질끄는 것인데 여기서는 그게 통한다.

 

여행지에선 때론 걸음걸이도 바꿔야 한다

 

몸을 대충 씻고 온천에 들어갔다. 생각보다 물이 무척 뜨거웠다. 동네 목욕탕 온탕을 생각했다간 오산이다. 어쨌거나 아무도 없는 노상온천에서 몸을 담그고 있으니 꼭 별세계에 와있는 기분이 들었다. 하늘은 까맣고 별은 총총했다. 김은 모락모락나고 물 흐르는 소리만 졸졸.

 

평소의 이 시간이라면 나는 저녁 설거지에 아이들 뒤치다꺼리, 쓰레기 분리수거로 정신이 없을 것이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 지도 모르고 또 하루의 저녁을 넘기고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마치 내 자신이 우주궤도를 이탈한 행성처럼 신비로운 기분과 약간의 쓸쓸함이 찾아들었다. 하지만 그 쓸쓸함이라는 게 싫지만은 않았다. 

 

온천에 몸을 담그고 있으니 예전에 들었던 한 일본인분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한국으로 시집을 온 그녀는 온천이 너무나 그리워 처음으로 한국의 온천에 갔단다. 그리고 일본과 너무 다른 한국의 온천문화의 차이에 깜짝 놀랐다고 했다. 때를 밀고, 수다를 떨고, 맛사지를 하고... 너무 복잡하고 번잡스러워 처음에는 적응이 안됐다고 그녀는 말했다.

 

물론 어느 쪽이 더 낫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번 일본여행에서의 온천 체험은 색다른 즐거움이었다. 그리고 늘 품어왔던 궁금증. 노상온천은 춥지 않을까? 아마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다고 해도 춥지 않을 것이다. 춥기는커녕 무척 시원하고 산뜻할 것이다. 그만큼 온천물이 뜨겁기도 하지만 밖으로 나왔을 때 피부에 와닿는 대기의 그 싸늘한 촉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시원하고 개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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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칸에서 일하시는 분들. 무척 친절하고 상냥했다. ⓒ 안소민

료칸에서 일하시는 분들. 무척 친절하고 상냥했다. ⓒ 안소민

 

밤 11시까지 두세 번 더 드나들며 실컷 온천을 즐긴 후 다음날 아침 새벽에 노천탕으로 향했다. 노천탕의 백미는 뭐니뭐니해도 물안개가 자욱히 피어오르는 새벽 노천탕이 아닐까 싶다. 지난 저녁에는 온천물이 꽤 뜨겁다고 느껴졌지만 새벽에는 공기가 더 차가워서 그런지 온천물이 오히려 따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좋은 풍경의 끄트머리에서 꼭 생각나는 사람

 

그때까지 늘 나 혼자였던 노천탕에 갑자기 한 가족이 들어왔다. 할머니와 그녀의 딸인 듯한 여자, 그리고 그녀의 딸인 듯한 여자 아이 둘이었다. 아마도 가족여행을 온 모양이었다. 그들은 서로서로 등을 밀어준 뒤 탕에 들어갔다. 그리고 도란도란 즐거운 듯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도 아마 큰 맘 먹고 이 곳에 왔을 것이다. 일본인으로서도 결코 만만한 가격은 아니니까. 아마 누구의 생일이거나 무슨 기념일일지도 모른다. 머리에 수건을 얹고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그들 모습이 한 풍경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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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비를 피하기위해 들렀던 식료품 마트. 이곳에서 일본된장과 후리가케, 간장, 쵸코크림 등 주로 먹는 것을 몽땅 구입했다. ⓒ 안소민

잠시 비를 피하기위해 들렀던 식료품 마트. 이곳에서 일본된장과 후리가케, 간장, 쵸코크림 등 주로 먹는 것을 몽땅 구입했다. ⓒ 안소민

 

그리고 갑자기 친정 엄마가 떠올랐다. '나 혼자만 이렇게 좋아도 되는 걸까?' 엄마를 노천탕에 꼭 한 번 모시고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저히 혼자이고 싶어서 떠난 여행이지만 참 좋은 풍경, 맛있는 음식의 끄트머리에선 늘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가족인가보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주인아저씨와 식사를 도와주었던 아주머니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곳에 온 관광객 대부분이 료칸의 내부나 정원, 요리와 같은 것들은 사진을 많이 찍지만 정작 주인 아저씨와 종업원들을 찍은 사람은 없었는지 내가 사진을 같이 찍자고 하자 처음에는 좀 당황해하고 어색해하는 표정.

 

내가 온천이 무척 좋았다고 말하며 엄지를 치켜세우자 주인아저씨왈 나중에 남자친구와 함께 오란다. 어쨌거나 기분은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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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후인에서는 어디서나 유후다케가 보인다. ⓒ 안소민

유후인에서는 어디서나 유후다케가 보인다. ⓒ 안소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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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후인 다리에서 보는 풍경. 피부로 와닿는 느낌은 부드럽고 완만함, 평화로움 그 자체다. 사진이 그 느낌을 잘 못살린 것 같다. 유후인에서 가장 예뻤던 풍경. ⓒ 안소민

유후인 다리에서 보는 풍경. 피부로 와닿는 느낌은 부드럽고 완만함, 평화로움 그 자체다. 사진이 그 느낌을 잘 못살린 것 같다. 유후인에서 가장 예뻤던 풍경. ⓒ 안소민

 

료칸을 나서니 비가 부슬부슬내렸다. 이제 유후인을 떠나려 한다. 아직도 볼 것이 많이 남아 있다. 나중에 '아참~ 거기를 못가봤다'며 후회할지 모른다. 하지만 꼭 명소 한군데를 더 들르는 것보다 이 분위기를 그대로 내 것으로 만드는 게 더 중요할지 모른다.

 

길가에 수줍게 핀 수선화, 강변에 찬란하게 피어오른 유채꽃, 흩날리는 벚꽃, 그리고 물소리, 물안개가 자욱한 유후다케, 그리고 사람들의 소박한 미소 그것만으로도 유후인을 기억하기에 충분하다.

 

아 참! 그리고 봄비. 이번 여행의 마지막은 이 봄비로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는 길

 

인천공항에 도착해 핸드폰 전원을 켜자 엄마가 보낸 메시지가 먼저 떴다. 북한 로켓발사 때문에 엄마 가슴은 숯검댕이가 되어 있었다. 하필 그 와중에 혼자 해외여행 떠난 딸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일본에서도 난리가 났다. 티비에서는 특집방송을 내보냈고 지하철역에서도 호외를 뿌리는 등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난 여기저기 구경하면서 즐길 동안 엄만 계속 걱정하셨던 거다.

 

리무진버스를 타고 전주집으로 내려오는 길, 그제서야 가족들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참 빠르기도 하다) 끼니는 잘 챙겨먹었는지, 사고는 없었는지, 아이들끼리 싸우지는 않았는지... 그리고 이어서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직장업무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들. 내일 출근하면 해야 할 일을 마음속으로 헤아리다 순간 피식 웃음이 났다.

 

'내가 정말 다시 돌아온 거 맞구나' 길지 않은 비행이라도 나름대로의 착륙준비는 필요한 법.   

 

집에 와보니 아무런 일도 없었다. 아이들은 엄마 없이도 알아서 잘 지내고 있었다. 내가 있을 때보다 밥도 잘 먹고 일찍 일어났단다. 기특하다. 아이들은 내가 걱정했던 것만큼 세상살이에 서툴지 않았다. 엄마가 없으면 금방이라도 어떻게될까봐 전전긍긍했던 내 생각이 조금은 성급했던 것이다. 고마웠다.

 

 

2009.04.30 11:23 ⓒ 2009 OhmyNews
#유후인 #나홀로 베낭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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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스또엡스키(1821-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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