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고 여린 청소년’, 심지에 폭력을 들이대지 마셔요

[책읽기가 즐겁다 269] 김진아 외 아홉 사람, <열정세대>

등록 2009.05.08 17:36수정 2009.05.08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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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름 : 열정세대
- 글 : 김진아 외 아홉 사람
- 펴낸곳 : 양철북 (2009.2.16.)
- 책값 : 9800원

 (1) 아이들을 폭력에 길들게 하는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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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그림 ⓒ 양철북

엊저녁, 옆지기가 동생 머리카락을 잘라 주었습니다. 중학교 1학년인 처남(옆지기한테는 막내동생)은 오늘 학교에서 '두발검사'를 한다면서, 이때 걸리지 않으려면 머리를 깎아야 했는데 깜빡 잊었다고 합니다.

열네 살 처남이 학교 다니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노라면, 학교 공부보다는 동무들하고 뛰어놀기를 훨씬 더 좋아하지 않느냐 싶던데, 아마도 학교에서 담임 교사가 '두발검사'를 한다고 알려주었어도 곧 잊어버렸으리라 봅니다. 그리고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테지요.

처남 머리는 그리 짧지 않습니다. 제가 다닌 중학교를 떠올리면, 더구나 제 고향이며 일터인 인천에서 중학생인 요즈음 아이들 머리길이를 살피면, 경기도 일산에서 중학교를 다니는 처남 머리길이는 '인천에서는 고등학생 머리길이'라 할 만합니다.

.. 우선 가출이라는 용어는 항상 청소년에게만 사용되고 있어. 그렇지? 너 '가출 어른'이라는 말 들어 봤냐? 없지? … 어른들에게는 가출 대신 다른 멋들어진 단어가 사용되지. 독립. 음, 이 얼마나 장대한 말이냐 … 사실 학교 폭력은 학교의 폭력적인 구조와 문화 때문에 가능하거든. 일종의 폭력적 문화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는 거야. 그런데도 청소년 개인의 문제인 것처럼 희석해 버리지. 그래서 폭력 청소년을 학교 바깥으로 쫓아내면 모두 해결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거야 … 가출하고 나서 나는 진짜 미래 계획을 세울 수 있었어. 전에는 희미하게 보이던 미래가 조금씩 명확하게 보익 시작했다 … 하지만 이 따스한 공간(집)이 가장 폭력적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라. 부모님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해서 바보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야 ..  (16∼19, 22쪽)

옆지기가 처남 머리를 잘라 주는 동안, 때가 어느 때인데 학교에서 '머리길이 살피기'를 하는가 놀랍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우리 학교는 아이들 머리길이를 살피는 일을 '교육'이라고 여기는지 궁금해집니다. 이런 지시사항을 내리는 교육부도 놀랍고, 이런 지시사항이 없었다면 학교장 스스로 이런 지시사항을 마련했을 테니 이 학교 교장 또한 더없이 놀랍습니다. 그리고, 학교장이 이런 지시사항을 내렸다 하여도 담임을 맡은 교사 스스로 '터무니없을 뿐더러 해서는 안 되는 짓'을 곧이곧대로 따르며 아이들을 억누르는 셈이기 때문에 한 번 더 놀랍다고 생각합니다. 교사 되는 사람들은 '아이들 머리카락 길이를 짧게 맞추어야, 아이들이 바르고 착하고 얌전하고 슬기롭게 크리라' 생각하고 있을까요? 이런 짓에 교육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요?


..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감동도 경제적 가치 앞에서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세상이 서글플 뿐입니다. 감동을 주지 못하고, 감동을 받지 못하는 사회와 삶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  (55쪽)

제가 국민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들어간 때는 1988년입니다. 이때(에도 그렇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인천에서) 중학생은 머리길이가 3센티미터가 넘어가면 안 되었습니다. 그나마 앞머리는 눈썹에 안 닿으면 된다고 했지만, 그예 빡빡이 머리라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말이 3센티미터이지 빡빡 밀라는 소리와 다르지 않았고, 하루아침에 머리통이 허옇게 드러나는 아이들이 우글우글 모여 학교에 들어가고 나오고 하는 모습은 조금도 좋아 보이지 않았습니다(그러나 이런 모습이야말로 '참교육'이 이루어진다며 좋아한 분들이 있었겠지요).

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면서 '단발령'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깜짝 놀라던 일이 떠오릅니다.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머리카락이란 몸뚱아리와 마찬가지였기에, 머리카락을 잘랐다고 하여 목숨을 끊은 사람이 나왔다고 했는데, 지난날 우리 삶자락을 헤아린다면, 중학교에서 우리들 머리카락을 이토록 밀어대는 일은 '우리가 스님이 될 생각'이 아니라면 해서는 안 되는 짓이었습니다. 스스로 밀고 싶으면 밀며, 깎고 싶으면 깎도록 해야 할 뿐이었습니다. 일본제국주의가 우리한테 이름을 빼앗고 말을 빼앗고 땅을 빼앗고 문화와 몸 모두를 빼앗은 아픔과 생채기를 목소리 높여 가르치던 교사들인데, 정작 이런 교사들이 가위를 들고 교실과 학교 구석구석 누비며 어디 숨은 '놈'이 없는지 샅샅이 뒤졌습니다. '두발검사' 하는 날이면 교사들은 하나같이 새벽밥 지어먹고 학교 곳곳에서 눈알을 부라리며 지켜서곤 했고, 이렇게 지켜선 다음에도 운동장으로 죄다 불러내어 하나하나 자로 머리길이를 재면서 다시금 가위질을 해대었고, 조리로 돌을 솎아내듯 하루 동안 교실과 골마루와 뒷간에서 서너 차례 가위질을 해댄 다음에야 비로소 살얼음판 같은 가위질이 끝나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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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피는 아이들을 중징계 먹인다는 으름장이 골목길 한켠에 붙어 있습니다. 후미진 데에서 아이들이 담배를 피우니까요. ⓒ 최종규


.. 문득, 어른들은 '십대 동성애자'라는 말을 인정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십대는 미성숙하고 덜 완성되었다고 생각하잖아 ..  (64쪽)

가위질은 고등학교에 갔어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고등학교에서는 3센티미터는 아니었습니다. 앞머리가 눈을 찌르지 말고, 옆머리가 귀를 덮지 않으며, 뒷머리가 옷깃에 닿지 않으면 되었습니다. 이러다 보니, 인천이라는 데에서는 '학교옷'을 안 입어도 누가 중학생이고 고등학생인지를 한눈에 알아챌 수 있었고, 신분증이 없어도 신분증처럼 알아보았습니다. 극장에 들어갈 때이든 전철을 탈 때이든 버스표를 살 때이든 머리길이만으로 우리 '신분'이 드러났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교사를 비롯한 모든 어른은 우리 '푸름이(청소년)'를 '한꺼번에 다스릴(일제단속)' 수 있었습니다.

시험점수에 따라 줄세우기 하는 짓만으로도 모자라, 아니, 줄세우기는 한 달에 한 번밖에 못하니까 심심했는지(?) '두발검사'에다가 '복장검사'에다가 '소지품검사'를 수도 없이 해댔고, 굵직한 몽둥이를 어깨에 얹고 다니는 교사들 가운데에는 중고등학생한테까지 '손톱검사'를 하면서 골마루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매질을 일삼는 사람이 어김없이 학년마다 한둘씩 있었습니다.

.. 처음에는 집으로 갔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자 차마 집으로 갈 수가 없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 용돈 몇 푼 더 벌지 모르지만, 촛불집회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르바이트를 그만둔 이유는 순전히 그 때문이었다 ..  (99쪽)

어린 처남이 "아이! 내일 두발검사 하는데 어떡하지?" 하며 걱정을 하기에 옆지기는 머리를 손수 잘라 주었습니다만, 제 마음은 "얌마, 머리 그냥 그대로 두고 학교에 가. 가서 청소년 인권을 말하면서 따져!" 하고 말해 주고 싶었습니다. 이에 따르는 어떤 앙갚음을 교사들이 해댄다 할지라도, 아이들한테 '인권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교칙만 있다'고밖에 생각할 줄 모르는 교사들한테, '어린이도 푸름이도 어른과 똑같은 사람이다'고 당차게 외쳐야 한다고 말해 주고 싶었습니다.

 (2) 학교에서 폭력에 길들지 않고자

그러나 처남한테 아무런 말을 해 주지 않았습니다. 반항이 아닌 저항은 앞으로 언제라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머리가 잘리지 않으면서 지내며 폭력에 조금이라도 물들지 않아야 하지만, 처남 스스로 이런 대목까지 살피는 눈길이 없기 때문에 섣불리 '인권'을 말하는 일은 샛길로 샌다든지 잘못 받아들일 걱정이 있습니다.

차근차근 다루어야 하며, 혼자서 불쑥 튀어나오는 말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머리길이를 살핀다고 하는 날 갑작스레 홀로 외치는 말이 아니라, 오래도록 차근차근 생각하고 돌아보고 동무들하고 이야기를 나눈 끝에 함께 움직여야 할 일이라고 봅니다.

처남 스스로 학급회의 같은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감을 꺼내어 교사가 함께하는 가운데 '인권이란 무엇이며, 학교란 어떤 곳이고, 교사가 할 일은 무엇인가'를 따져야 한다고 느낍니다. 억지로 밀어붙이는 교칙은 터무니없습니다만, 깊은생각 없이 튀어나오는 말 또한 교사한테도 학교한테도 동무들한테도 살갗 깊숙하게 파고드는 이야기나 몸짓으로 스며들기란 어렵다고 느낍니다.

.. 청소년 시절에는 입시 위주의 경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 꿈을 꾸어야 한다고 생각해. 왜 전국의 청소년들을 성적순으로 등수를 매기고(일제고사), 아름다운 우리 말을 쓰지 못하게 하면서(영어 몰입 교육), 공부하고 싶을 때 공부할 수 있는 자유를 주지 않는(0교시 수업, 야간 자율학습) 걸까? ..  (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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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학교는 문간에 전광판을 세워 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전광판에 새겨지는 말들이란... ⓒ 최종규


그러면서 제가 중고등학교 때 해 본 저항을 떠올립니다. 처음에는 반항이었지만, 한낱 맞대꾸하는 일(반항)만으로는 제 뜻을 교사와 학교한테 알릴 수 없을 뿐더러, 동무들한테도 제대로 나눌 수 없다고 느꼈습니다. 가벼운 맞대꾸나 철없는 맞대꾸를 딛고 서서, 차분한 맞섬이나 올바른 거스르기를 해야 교사도 생각을 고치고 학교도 다른 매무새로 나오게 됨을 깨달았습니다.

1988년 중학교 1학년 때에는 아직 세상을 제대로 모르던 때였기에, 전두환이 얼마나 나쁜 놈인 줄 몰랐고, 그때까지 학교에서 한 주에 한 번씩 거두던 '평화의 댐 성금'이라든지 다달이 거두던 '방위성금'이 어디로 들어가는 돈이었는지를 비롯해 '독재'라는 말도 몰랐습니다. '쿠테타'를 알 턱이 없었을 뿐더러, 어느 교사도 우리한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저 '새마을운동 체험 독후감'을 쓰는 숙제를 '더 얻어맞지 않으려고 쓸' 뿐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국민학교 6년을 마칠 때까지 쓰던 일기는 그냥 일기가 아니라 늘 '새마을일기'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습니다.

아무튼. 중학교에 들어서면서 갑작스레 머리를 빡빡이로 밀어야 하는 일은 제 마음에 깊이 생채기를 남겼습니다. 왜 깎아야 하는데? 안 깎으면 깡패가 되나? 안 깎으면 공부를 안 하나? 깎으면 모두 천재라도 되나?

더구나 한 달에 한 번씩 가야 하는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을 때마다 거칠게 휘젓는 가위질과 마구 문지르는 머리감기는 고달플 뿐이었고, 머리 깎는 돈이 몹시 아까웠습니다. 늘 그렇지는 않았으나 국민학생 때에는 집에서 어머니가 머리를 깎아 주시곤 했는데, 중학생이 되건 고등학생이 되건, 머리를 깎아야 한다면 집에서 스스로 깎도록 하면 될 노릇이고, 저마다 제 머리와 몸과 마음에 따라서 간수할 노릇이 아닌가 싶었기에, 이 마음을 곰곰이 다스려서 토요일 학급회의를 할 때에 늘 안건으로 올렸습니다. 받아 주든 안 받아 주든 '안건으로 올려야 할 까닭'을 예닐곱 가지나 열 몇 가지씩 쪽지에 적어 놓고는 읽었고, 우리 학교는 우리 인권을 너무 짓밟고 있으니 이러한 일들을 고쳐야 한다고 거듭 외쳤습니다.

.. 이제 중ㆍ고등학교에서 풍물 동아리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대학을 가기 위해서는 한가하게 동아리 활동을 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게다가 학생들이 동아리를 만들어도 부모들이 반대해 동아리실이 폐쇄되기도 한다. 학생은 오로지 공부만 해야 하는 것이다 … "우리 학교가 생긴 지 1백 년이래요. 선생님들도 우리 학교 출신이 많아요. 그런데 문제는 선생님들이 자신들이 배운 교육 방식 그대로 우리를 가르친다는 점이에요. 시대가 바뀌었는데도 예전 방식 그대로예요. 정말 심해요. 앞뒤가 꽉 막힌 선생님들이 많아서 친구들도 무척 힘들어 해요 … 제가 학교를 떠난 이유는 학교 안에만 있으면 많은 걸 놓칠 것 같아서였어요. 생각과 상상력이 고갈된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학교라는 거대한 배가 흘러가는 방향대로 같이 흐르니까요 … 학교 안에서 상상하지 못하던 아이는 밖에 나와도 상상할 수 없어요. 그러면 그 아이는 아예 상상할 수 없게 되어 불행해지는 거예요 ..  (138, 144∼145쪽)

나중에, 중고등학생 가운데 생각있는 학생이 모여 '대학생처럼 하는 학생운동 모임'이 있음을 알았는데, 이 모임에 있던 이들 가운데 우리 인권을 따진 동무들은 한 번도 못 보았습니다. 틀림없이 그런 모임이 있다 했고, 그곳에서 여러 가지 책도 읽는다 했는데, 물위로 떠오르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반장을 뽑을 때 '전교 몇 등에 드는 테두리'에서 후보자를 고를 수 있던 일이라든지, 교사들이 휘두르는 몽둥이질이 없어져야 한다는 외침 따위에는, 반 동무들이 뜻을 같이했어도 담임 교사는 언제나 '오늘 이 이야기는 이 교실에서만 있었던 걸로 한다'며 끝맺고는, 교감이나 교장한테 한 번도 보고를 올리지 않았습니다. 학급회의 주제는 대충 아무것이나 바꾸어 적고 토론한 줄거리도 대충 채워 넣었습니다. 이를테면, '학교를 깨끗이 하자'라는 주제로, 청소를 잘하자라느니 쓰레기를 줍자 같은 이야기가 나왔다고 적습니다. '공부를 잘하자'라는 주제로, 다가오는 시험에서는 더 부지런히 공부하자라느니, 예습과 복습을 잘하자라는 이야기가 나왔다느니 하면서.

.. "청소년 운동을 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우리 나라는 의무만 있고 권리는 없는 나라라는 이야기를 많이 해요. 현재 우리 나라 청소년들은 공무원도 될 수 있고 결혼도 할 수 있어요. 또 원하기만 하면 군대도 갈 수 있고요. 그런데 유독 참정권만 없어요. 이건 좀 말이 안 돼요." ..  (180쪽)

중학교 세 해에 걸쳐 끝없이 싸우고 싸웠습니다. 맞으면서도 우리가 왜 맞아야 하느냐고 따졌고, 교사들이 잘못하면 우리가 교사를 때리면 되느냐고 따졌습니다. 소지품검사를 거스르고자 했으나 언제나 거스르지 못하게 되었고, 교과서 아닌 책을 빼앗아 갈 때면, 그 책이 무슨 불량불온도서라도 되는데 빼앗느냐고 따졌습니다. 자율학습이라면 자율로 하고픈 사람만 해야 하지 않느냐고 따지고, 보충수업은 보충해야 하는 아이들만 해야 하지 않느냐며 따졌습니다. 그렇지만 어느 한 가지 달라지지 않았고, 어떤 한 가지도 나아지는 구석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딱 한 번, '청소년 인권선언문'을 전지에 옮겨적어 한 주 동안 학교 문간에 세워 놓도록은 했는데, 한 주가 지난 다음에는 쓰레기통에 처박혔습니다.

교사들은 버젓이 동무들 뺨따귀를 올려붙이거나 코피가 터져도 주먹질을 그치지 않는 일을 교실에서도 해댔습니다. 이런 학교를 다녔다는 일은 '내 창피'라고 여겨, 중학교 졸업사진책은 안 사기로 했습니다. 졸업장도 안 받으려고 했으나 어머니 얼굴을 생각해서 받기로 했습니다. 기껏 하는 마지막 몸부림이라고 할까요. 전교에 너 혼자만 졸업사진책을 안 산다니 말이 되느냐고 담임이 몇 번이나 달래고, 집에 전화를 걸어 부모님이 도장을 찍어 주십시오 하고 했어도 끝내 저는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어처구니 학교를 다닌 일을 돌아보고 싶지도 않지만, 그렇게 비싸게 팔아치우는 졸업사진책도 마뜩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고 얼마 뒤, 연합고사를 마친 지 며칠 지나지 않은 어느 날입니다. 중학생 때에도 1학년 때부터 아침 여덟 시 이십 분부터 0교시를 해서 밤 열 시까지 자율학습과 보충수업이 이어졌는데, 연합고사를 치르고 나서야 비로소 0교시와 자율ㆍ보충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면서 아무런 수업을 하지 않았습니다. 더는 교과서 진도를 나가지 않았고, 수업 때에는 비디오를 틀어 주었고, 때로는 운동장에서 나가 놀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끼리 웃고 떠들고 찧고 노는 모습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수학 교사 한 사람이 "왜 이렇게 떠들어!" 하면서 우리보고 책상을 들고 벌을 서라 했습니다.

맨 뒷자리에 앉아 있던 저도 얼결에 책상을 함께 들고 벌을 받았지만(저는 동무들하고 떠들지 않았습니다. 그저 조용히 맨 뒷자리에서 책을 읽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늘), 수학 교사가 비꼬듯 되뇌는 설교는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을 뿐더러, 네가 그동안 우리한테 한 짓이 있는데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읊느냐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십 분쯤 팔이 덜덜 떨리도록 책상을 들고 있다가, 이 수학 교사가 우리한테 한 시간 내내 책상을 들고 있으라고 하는 소리에 불뚝 성이 나서, 교단으로 책상을 냅다 집어던졌습니다. 동무들만 떠들었어도 나 또한 한 반 동무로 벌을 받기도 해야 할 테지만, 십 분 넘게는 벌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어차피 이 학교는 한두 달 뒤면 나하고도 인연이 끝인데, 너 같은 사람한테 입발린 설교는 듣기 싫으니 입을 다물라는 뜻으로.

수학 교사 얼굴에 대고 책상을 던졌는데, 안타깝게도 수학 교사 얼굴은 살짝 스치고 칠판에 꽝 하고 박았습니다. 갑자기 날아온 책상에 놀란 수학 교사는 더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고, 책상을 던진 저를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저를 쳐다보고 무어라 한 마디를 더 했으면, 이번에는 걸상을 들고 뛰쳐나가 휘둘렀을는지 모르니까요.

수학 교사가 아무런 대꾸도 없고 시늉도 없기에 걸상에 털썩 주저앉아, 수업이 다 끝날 때까지 팔짱을 끼고 앉았습니다. 동무들보고 "야, 니들도 앉아. 저런 놈이 시키는 대로 할 게 뭐야?" 하고 말했는데, 다들 끽소리 없이 책상을 들고 있기만 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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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마치고 집으로 가는 아이들은 자유로움을 되찾습니다. 그러나 이 자유로움은 얼마나 이어갈 수 있을까요. ⓒ 최종규


.. "후문 개방 사건 이후로 생각이 많았어요. 학교의 주인은 학생인데, 어른들도 학생들도 이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어요. 선생님들은 더더욱 그렇고요 … 어른들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청소년들을 아무 생각이 없는 존재로 치부해 버려요. 고등학생도 그렇게 생각하니 중학생은 더하죠." ..  (219, 224∼226쪽)

마침종이 울리고 모두들 책상을 내리고 팔 빠져 죽는 줄 알았다느니 투덜투덜댑니다. 수학 교사는 교무실로 돌아갑니다. 아무 일도 더 일어나지 않습니다. 수학 교사가 학생과로 부르면 한판 몸싸움이라도 벌일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학교에서는 이 일을 쉬쉬하고 끝냈습니다. 그리고 그날 뒤로 우리들 '연합고사 끝나고 나서 졸업 때까지 이루어진 수업'은 더 개판이 되었고, 교사들도 더는 몽둥이질을 해대지 않았습니다.

이제 와 중학생 때 일을 돌아보면, 조금도 잘한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참 철이 없었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철이 없었기 때문에 당돌한 짓을 저질렀고, 저 또한 폭력교사들과 마찬가지로 폭력에 찌들고 길드는 바람에 '폭력에 맞서는 폭력'밖에는 생각해 내지 못했습니다. 폭력은 폭력으로는 어떻게든 이길 수 없음을 알지 못했을 뿐더러, 어느 누구도 이러한 이음고리를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학교에서 독후감 숙제로 읽으라 내준 책 가운데 이러한 이음고리를 보여준 책은 하나도 없었고, 이무렵 국민학교 교감 자리에 오른 아버지 또한 아들인 저한테 '사람됨 이끄는 가르침'이라든지 '사람다움을 보여주는 책'을 하나도 일러 주지 못했습니다.

동무들이라고 다르지 않았습니다. 폭력에 맞선 폭력을 '짱'이라느니 '멋있다'라느니 하는 말로밖에 바라볼 줄 몰랐고, '네가 잘못했어' 하고 말해 준 녀석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폭력은 폭력으로 이기려 해서도 안 되지만, 폭력을 굳이 이겨야 한다고 해서도 안 됨을 알 길이 없기도 했습니다. 제도권 학교 틀거리와 교과서로는 우리가 '틀에 잘 짜여진 톱니바퀴'가 되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시키는 대로 잘 따르고, 먹이는 대로 잘 먹어야 훌륭한 사람이 되고 '민주시민'이 된다고 앵무새 말을 거듭 할 뿐이었습니다.

 (3) 푸름이 목소리를 푸름이 입으로

이야기책 《열정세대》를 꼼꼼히 읽고 난 지 여러 달 지났습니다. 푸름이들 나이와 자리를 헤아리면서, 제가 그 나이에 어디에서 무엇을 했고 누구를 만났으며 어떤 책을 찾고 어떤 공부를 하는 가운데 무슨 꿈을 키웠는가 곱씹습니다.

우리를 낳아 기른 어른들은 우리를 보며 '너희는 전쟁도 겪지 않고 평화로운 세대야'라느니 '너희는 보릿고개도 부대끼지 않고 넉넉하게 살아가는 배부른 세대야'라느니 하는 말을 일삼았는데, 어찌 보면, 어른들은 우리 푸름이를 '배부른 돼지'로 기른 셈 아니었으랴 싶습니다.

틀림없이 당신들처럼 배를 곯거나 헐벗는 삶은 아니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당신들처럼 학교도 못 가고, 학교에서도 더 끔찍한 콩나물시루에서 더 모진 몽둥이질에 시달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우리한테도 당신들처럼 고단함이 있었고, 허구헌날 운동장 돌 줍기를 해야 했으며, 날이면 날마다 매타작에 엉덩이와 허벅지와 뺨따귀가 성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고작 한 학년 위인 선배들은 건들거리면서 종아리를 걷어차거나 침을 찍찍 뱉었고 돈을 빼앗기는 동무가 많았습니다. 후미진 골목에서는 너구리 소굴 같은 하얀 연기가 피어났으며, 자유공원과 화도진공원 같은 데는 동네 양아치들이 학교옷을 구겨입고 술판을 벌여 이 옆으로 지나가기도 무서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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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요금이 '청소년' 요금으로 바뀐 줄 아는 사람이 드뭅니다. 그리고 '초등생' 요금은 그대로이고 '어린이' 요금이 아닌 줄 깨닫는 사람 또한 드뭅니다. ⓒ 최종규


.. 청소년들을 인간적으로 대하고 권리를 인정한다면 법으로 명시된 최정임금을 준수하는 건 기본이 아닐까? 그게 진짜 인간적으로 대하는 것 아니겠냐고 ..  (24쪽)

《열정세대》를 읽는 동안 이 책에 나오는 아이들은 조금이나마 '눈을 뜬' 아이들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이제는 이 아이들한테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어른이 한둘쯤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 보았자 턱없이 모자란 손길입니다만, 대학교를 다니다 그만두는 날까지 따뜻한 손길이라곤 '학교 둘레'에서 한 번도 못 받았던 제 삶을 생각해 보니, 부럽기도 하고 슬프기도 합니다. 그래도 이 아이들은 잘되었다며 한숨이 나오기도 하며, 이렇게 살가운 어른이 있어도 좀더 깊이 파고들지 못하는 어른들 모습이 보인다는 느낌에 아쉽기도 합니다.

.. "조중동의 문제는 자신들의 시선이 옳고, 전부이고, 객관인 것처럼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자기들이 일부이고 하나의 관점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우리만 옳고 다른 신문들은 틀리다'는 식이잖아요. 그게 가장 잘못된 점이죠 … 주위 친구들을 보면 지금 당장 자기와 상관이 없어 보인다고 외면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하지만 뭐든지 세상과 연결되지 않은 건 없잖아요. 쇠고기 수입 문제, 쌀 수입 개방 문제, 독도 영유권 문제, 비정규직 문제 들이 커다란 고리에서 보면 결국 자신의 문제라는 걸 알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  (160, 165쪽)

무엇인가 허전하구나 싶어 다시금 책을 들춰봅니다. 이 아이들과 같은 나이였을 때 어슷비슷하게 생채기를 입어 보았던 어른이었기에 기꺼이 이 아이들한테 손길을 내밀 수 있지 않았느냐 싶습니다. 그러나, 어른들이 예전에 겪은 생채기하고 아이들이 오늘 겪는 생채기하고는 같지 않습니다. 비슷해 보일 수 있으나 하나도 같지 않습니다. 사회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며 경제가 다릅니다. 학교 시설이 다르고 교육제도가 다르며 입시지옥이 다릅니다. 지난날 같은 군사독재자가 나라를 어두움에 내몰지 않습니다만, 군인이 아닌 사람이라 하여도 국가보안법을 없애지 않았습니다. 교육밭이나 문화밭에 평화와 자유와 민주를 심지 않았습니다. 너나없이 돈벌이를 외치지만, 돈벌이를 왜 해야 하는지를 말하지 못합니다. 자립형사립고니 교육평준화니 외칠 줄은 알아도, 이런 교육이 푸름이인 오늘 아이들한테 어떤 눈높이에서 다가가는 일인지를 들여다보지 못합니다.

그래도 하나,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가슴팍에 뜨거운 심지 하나를 붙안고 있습니다. 아이들한테 손길 내민 어른들 또한 어른들대로 가슴자리에 따뜻한 촛불 하나 꺼뜨리지 않았습니다. 심지와 촛불이 제대로 만날 수 있다면, 심지와 촛불이 오래도록 어깨동무를 하면서 만날 수 있다면, 그리고 이 여린 심지가 무럭무럭 자라나서 열 해나 스무 해쯤 뒤 새롭게 커 나갈 더 작은 심지한테 촛불이 되어 다가설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책 하나로 빈틈없는 끝마무리를 바라서는 안 될 노릇이요, 이 책 《열정세대》에서는, 심지와 촛불이 만나는 이야기를 읽어내면 넉넉하며, 이 심지와 촛불이 다음 심지와 촛불로, 또 다음 심지와 촛불로 꾸준히 이어나가면서 우리 손으로 차츰차츰 새롭게 일구는 우리 터전으로 다시 태어나자고 하는 이야기를 새겨낼 수 있으면 즐겁다고 느낍니다. 그래, 한 걸음씩 아닌가?

겨우 마음을 놓으면서 책을 덮고 책꽂이에 꽂아 놓습니다. 우리 처남이 이 책을 알아보면서 스스로 집어들어 읽을 날을 기다립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작은자전거 : 인천+부천+수원 자전거 사랑이] http://cafe.naver.com/inbu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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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세대 - 상상력과 용기로 세상을 바꾸는 십대들 이야기

김진아 외 지음, 참여연대 기획,
양철북, 2009


#청소년 #청소년책 #학교 #제도권교육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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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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