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찰의 추억

등록 2009.06.01 09:34수정 2009.06.01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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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졸업한 고등학교는 별 건 없지만, 교복만큼은 예쁘다고 유명한 학교였다. 네이버 검색창에 우리 학교의 이름을 치면, "000고 교복"이라는 유사 검색어가 뜰정도로 교복이 유명했다. 그런데 내가 입학한 첫 해부터 명찰이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아크릴 명찰이 아닌, 박음질을 통해 부착하는 명찰로 바뀌었다. 예쁜 교복과 박음질 하는 명찰은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았다. 오히려 미적 조화만 떨어뜨릴 뿐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동기들도 하필이면 우리 때부터 바뀌냐고 불만이 많았다. 아크릴 명찰로 바꿔달라고 학교에 요구하는 서명을 하기도 했다. 물론 모든 학교가 그렇듯이, 우리 학교도 이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시간이 꽤 흐른 뒤, 학생부장이 수업으로 들어오는 시간에 우연히 명찰 얘기가 나오게 되었다. 애들은 교복의 미적인 조화를 해치는 촌스러운 명찰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러자 학생부장은 그에 대해 변명이라며,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을 소개했다. 우리 학교 학생이 근처 대형서점 앞에서 중학생들의 돈을 빼앗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중학생이 바로 경찰에 신고를 했는데, 명찰에 이름이 있어 잡을 수도 있었다는 얘기였다. 그러면서 선생은 명찰은 학생들의 비행을 방지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무시무시한 발상이 깔려있다. 학생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간주하는 것이다. 너희 학생들은 범죄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으니깐, 가슴팍에 이름을 공개적으로 보여주고 다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사 분들게 묻고 싶다. 당신들은 예비 범죄자가 아니냐고? 메스컴에 뜨는 보도에 의하면 당신들도 학생들 못지않게 온갖 범죄를 저지른다. 더욱이 당신들은 교사의 권위를 이용해서 학생들에 대한 범죄를 은폐할 권력도 있다. 당신들이야말로 관리의 대상이 아니냐고?

 

명찰 제도는 주민등록번호와 같은 존재이다. 인권 단체 측에선 주민등록번호 제도에 대해 비판을 한다. 주민등록번호는 국민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간주하고, 국가가 나서서 개인들을 관리하는 것은 인권 침해라는 뜻이다. 그러나 문제는 주민등록번호 제도에 대해선 비판이 다뤄지면서도, 정작 학교 명찰에 대해선 쉽게 다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학생들의 다른 인권 문제도 마찬기지다. 학생들의 인권은 주로 무시당하기 십상이고, 비판을 해도 너넨 학생이니까 식으로 묵살되곤 한다. 게다가 정치권에서 학생 인권 문제를 다루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나이가 어린 학생들은 투표권이 없어서, 정치인들이 굳이 학생들의 의사를 대표할 필요가 없기 때문일까?

2009.06.01 09:34 ⓒ 2009 OhmyNews
#인권 #고등학생 #명찰 #주민등록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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