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사과 한 알

등록 2009.06.15 11:30수정 2009.06.15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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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탯줄이 가는 줄 알았다
송아지 탯줄처럼 저절로 끊어지는 줄 알았다
의사는 가만히 가위를 내밀고
나는 곱창처럼 주름진 굵은 탯줄을 잘라냈다

사과꼭지를 잘라내는 일은 어렵지 않다
탯줄처럼 사과꼭지는 이제 더이상 쓸모가 없다
사과 한 알을 떨구면서 나무는 얼마나 아팠을까
배꼽같은 꼭지가 키워낸 맑은 사과 한 알


몸과 몸이 이어진 줄 하나에 삶이 있었다
죽음은 사랑하는이에게 보내는 마지막 선물이다
아내의 헝크러진 머리칼을 다듬으며
고생했다고 하자 아내는 베트남말로 엄마를 찿았다

시작노트

작년 이맘때 쓴 글이다. 새벽인 걸로 기억한다. 첫 애를 낳던 기억이 하도 생생해 탯줄이 기억에 남아 쓴 것 같다. 아내의 출산과정은 힘겨웠지만 이제 여섯살이 된 아이의 첫 울음소리는 여전히 내 귀에 울리는 것 같다. 십년이 넘게 사과밭을 했지만 사과에 대한 변변한 시가 없었다. 가까이는 보이지 않는 것도 좀 멀어지면 보일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 이후 모든 이들이 시인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생활 속에서 건져올린 시 한 편이 삶을 증거하는 이 기적이 혁명이 되기 위해서는 삶이 바껴야 한다. 허나 습관 하나 바꾼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그 절망 속에서 누군가는 몸을 던지고 누군가는 제 몸에 불을 지른다. 사랑이 없다면 가능한 일이 아니다.

불가능할 것 같은 상상조차 어려운 일들이 이제 막 태어나는 아이의 울음소리이거나 커져가는 사과 한 알에서 시작된다면 당신의 분노와 나의 노래는 우연히 만나 반가운 인사를 나눌 수도 있겠다.
#시 #시인 #현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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