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방이 양아치 아지트? 껌도 안 씹어요!"

동네 만화방 임종록씨 "인터넷 때문에 힘들어요"

등록 2009.06.19 22:59수정 2009.06.19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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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만화방이 몰락한 가운데서도 유지하고 있는 만화뱅크 ⓒ 박창우


"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 할 수 있어."
"내가 너의 소원을 이뤄줄게."
"마지막까지 희망을 버려선 안돼."


손발을 오그라들게 만드는 위 대사들은 만화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명대사(?)' 가운데 하나다. 그리고 이런 만화책은 어두컴컴한 만화방 소파에서 앉은 것도 누운 것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로 자장면 하나 시켜 놓고 읽어야 제 맛이다. 그게 왜 제 맛이냐고 묻는 당신이라면, 일단 만화방부터 가시라.

어쨌든 별다른 오락거리가 없던 1980~1990년대, 만화책은 그야말로 세대를 불문하고 우리의 눈과 귀를 사로잡은 새로운 문화로 자리매김했으며, 동네 만화방은 지금의 게임, 만화산업을 잉태시킨 밑거름이 되었다.

비록 만화를 보면 공부 못하는 아이, 만화방에 다니면 껌 좀 씹는 노는 아이라는 편견 가득한 시절이기는 했지만 누구나 한번쯤 만화책을 읽으며 우정과 사랑 그리고 꿈을 노래하곤 했던 시절이다.

만화가 좋아 시작한 만화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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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뱅크 임종록 사장 ⓒ 박창우

전북 전주시 금암동에 위치한 '만화뱅크'의 임종록(39) 사장 역시 중고등학교 시절 만화에 흠뻑 빠져있었던 평범한(?) 학생이었다. 실력이 안돼 만화가는 못되고 만화방을 운영하고 있다는 그는 대학가 주변의 만화방을 제외한 동네 만화방의 몰락 속에서도 현재 10년째 만화뱅크를 지켜오고 있다. 만화에 대해 할 말이 많다는 그를 지난 17일 만나봤다.
사실 지금의 만화뱅크는 임씨가 처음 문을 연 가게는 아니다. 그전부터 있었고, 심지어 임씨가 만화를 보러 자주 들렀던 곳이기도 했다.


1990년대 후반 비디오·만화책 대여점과 PC방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던 시기 동네 만화방들은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만화뱅크 사장 역시 가게를 내놓기에 이르렀다. 이를 보고 임씨가 1999년 자신의 가게를 정리하고 만화뱅크를 인수한 것이다.

"군 제대 후 회사생활을 2년 했거든요. 그런데 IMF가 겹쳐 명예퇴직 바람이 불어 회사를 그만두고 기름 장사를 했어요. 여기 만화뱅크에 기름을 넣으러 자주 왔는데, 가게가 나왔다는 얘기를 듣고 제가 인수를 했죠. 왜요? 그냥 만화가 좋았으니까요."

복사본 없으면 친구들에게 무시당하던 시절

20여 년 전, 중고등학교 시절 그는 만화가 좋아 숱하게 만화방을 들락거렸다. 주위에서는 만화를 본다고 하면 안 좋게 바라보곤 했지만, 그는 보는 거에 그치지 않고 직접 만화 캐릭터를 그릴 정도로 심취해 있었다.

"금암동 근처에 만화방이 여러 곳 있었거든요. 물론 지금이야 다 없어지고 몇 개 안 남았지만요. 제가 만화방을 많이 다녔는데, 아! 해명해야 할 게 하나 있어요. 텔레비전을 보면 옛날 만화방이 무슨 양아치들 아지트로 그려지곤 하는데, 아니거든요. 제가 많이 다녀봤기 때문에 하는 말인데 대부분 그냥 시간을 보내러 오는 사람들이에요. 만화방에서 껌 씹는 사람은 제가 본 적이 없네요. 하하."

그는 학창시절 <공포의 외인구다> <드래곤볼> <북두시권>과 같은 만화를 즐겨봤고, 또 거기에 나오는 캐릭터를 좋아했다고 한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비본'이라고 불리는 손바닥 만한 만화책 복사본이 없으면 무시당하던 시절이라고 그 당시를 회상했다.

만화를 보다가 멋진 캐릭터가 나오면 연습장에 그리고, 또 신간이 나오면 제일 먼저 만화방에 달려가고, 그에게 만화는 학창시절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게 만화를 좋아하면 만화가를 꿈꾸기도 했을 텐데…. 이에 대한 그의 대답은 이랬다.

"좋아하는 거랑 잘하는 거랑은 다르잖아요."

아….

만화방의 몰락, 힘겨운 유지

1999년 임씨가 만화뱅크를 인수할 당시만 해도, 전주에 만화방이 85개 정도가 있었다고 한다. 그 정도로 장사가 잘 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현재는 제대로 영업하는 만화방이 채 스무 곳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나마 대학가 주변에 몰려있고, 사실상 동네 만화방은 몰락한 상황이다.

"인터넷의 영향이 크죠. 만화방의 경우 한 달에 새로 나온 만화책을 구입하는 데 드는 비용만 200~300만 원 가량 들어요. 그런데, 컴퓨터로 다운받아서 보거나 인터넷 만화를 보니 만화방을 찾는 사람이 줄고, 결국 운영이 안 돼 문을 닫는 거죠."

임씨는 만화방이 몰락한 이유로 만화가들을 지적하기도 했다. 만화 시장이 어렵다보니 만화를 그리는 작가들이 줄어들고, 결국 출판사에서는 재판 위주로 만화책을 발행해 재미있고 신선한 만화책이 안 나온다는 것이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요즘에는 웹툰 쪽으로 만화가들이 몰려, 오프라인 만화는 그만큼 인기도 없고 고객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 힘겨운 과정을 거치며 만화방에서 마련한 자구책은 바로 요금제다. 예전에는 권당 얼마로 가격을 책정했지만, 약 5~6년 전부터는 시간제로 계산을 하고 있다. 손님들에게 부담없이 만화를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인데, 만화방을 운영하는 처지에서는 힘들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그럼에도 만화방 유지는 여전히 힘들다.

"사실 만화를 보러 오시는 지금 분들은 10년 전에도 오신 분들이에요. 만화책이 계속 연재가 되니까 쭉 이어서 보는 거죠. 손님 가운데 대부분 90%가 단골이죠. 하지만 새로 늘어나는 고객은 없고, 기존 고객들은 하나둘 떨어져 나가는 상황이에요. 계속 수입이 줄어드는 거죠. 비디오 대여점이나 PC방 같은 다른 서비스 업종도 마찬가지잖아요. 컴퓨터와 인터넷의 발달로 다들 늘어나는 손님은 없고 줄어들기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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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만화방 풍경(기사에 등장하는 만화방과는 관계가 없음을 밝힙니다). ⓒ 박창우

동네 만화방의 몰락은 또 다른 어려움을 동반했다. 바로 옛날 만화책의 처분 문제다. 신권은 계속 들어오고, 만화방의 공간은 한정돼 있고, 옛날 만화책은 자리를 잃고 버려져야 하는 현실이다.
예전에는 만화방이 하나 둘 계속 새로 생겼기 때문에 싼값으로라도 넘길 수 있는 창구가 있었지만, 요즘은 한권에 30원 받고 고물상에 넘기는 수밖에 없는 처지다.

"4000~5000원 주고 산 만화책을 30원에 넘긴다고 생각해 보세요. 가슴이 아프죠. 그래도 뭐 방법이 없으니…. 옛날 만화책을 처분할 수 있는 뭔가 새로운 대안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임씨는 예전과 많이 달라진 환경 속에서 사실상 만화방이 앞으로 더 나아질 거란 기대는 거의 없다고 한다.

다만, 지금처럼 어느 정도 유지가 되는 상황이라면 만족한다고 한다.

"손님이 만화 보고 재밌어 할 때, 가장 기쁘죠"

이곳 만화뱅크를 찾는 주 고객은 30~40대 남성이다. 시외버스터미널과 가까워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찾는 손님들이 많다. 물론 예전부터 이곳에 오던 단골이 대부분이지만 말이다.

임씨에게 손님들은 다름 아닌 '왕'이다. 그들이 만화를 보고 값을 지불하기 때문에 자신이 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손님들이 만화를 보면 좋고, 또 보고나서 "재미있다"고 얘기해 줄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

"언젠가 한 번은 만화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아저씨가 찾아왔어요. 어떤 것을 보면 좋겠냐고 제게 추천해달라고 했죠. 그래서 인기있는 <대물>과 <쩐의 전쟁>을 추천해 줬는데, 보고 나서 이렇게 재미있는 건 처음이라고 하셨어요. 그 말을 듣고 나니 괜히 힘이 나더라고요."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이의 아빠이기도 한 임종록씨는 24시간 운영이라는 만화방 특성 때문에 아르바이트생 한명과 12시간씩 교대로 근무를 하고 있다. 힘들 법도 하지만 그래도 요즘은 또 무협지 보는 재미에 빠져 힘든 줄 모르겠다고 웃어 보였다. 만화와 함께 살아와서 일까. 그러고 보니 인터뷰 내내 유독 미소가 끊이지 않았던 거 같다.

언젠가는 만화뱅크가 전주시의 만화명소로 기억될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만화같은 상상을 뒤로하고 만화뱅크를 나왔다. 한 배달원이 철가방을 들고 만화뱅크로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선샤인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선샤인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만화방 #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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