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동창회의 계절 - 갈까 말까 망설이는 이유가 있다

동창회는 꼭 먹고 마시고 노래방 가야하나

등록 2009.07.24 09:54수정 2009.07.24 09:54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한 여름이다. 장마가 끝나고 시작 될 폭염의 시기.
이 여름을 나는 '동창(문)회의 계절'이라 부른다. 이 시기를 부르는 여러 호칭들이 있음을 안다. 그러나 나는 굳이 '동문회의 계절'이라 부르려 한다.


후줄근한 나이. 52살의 내 여름은 더 이상 정열과 도전과 해변과 바캉스로 추상될 수 없다. '동창회'를 찾는 나이임을 털어 놓지 않을 수 없다. '동창회'에서나 활기가 도는 나이임을 고백한다.

올 여름도 세 곳에서 동문회가 열린다.
뜻이 맞는 선후배가 뒤섞여 모이는 어느 동문 모임은 내가 사는 이곳 장계로 오겠다고 한다. 어머니 곁에서 움직일 수 없는 내게 고맙고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나는 초,중,고,대 를 통 털어 44살이 넘어서 동문회라는 데를 가 보게 되었다. 이토록 좋을 수가 없었다. 소주잔이 한 번 오고 가면 우리의 기억은 꼭 1년씩 또는 5년씩 역 주행했다. 슬그머니 말을 놓고 너, 나 하다가 어느새 수 십 년을 거슬러 정확히 그때 그 시절에 당도한다.

기억도 못 할 직업과 사는 곳을 건성으로 묻고 답하고 명함을 주고받는다. 명함에 쓰인 글자 몇 개를 놓고 얼기설기 인연을 갖다 붙이면서 각별함을 재차 확인한다. 그게 좋다.

학교 때는 말 한마디 나눠보지 못했던 여학생과 옆자리에 앉아 무릎을 맞대고 정말 오랜 지기처럼 굴 수 있는 동창회. 그게 좋다. 이름도 얼굴도 생소한 동기와 악수한 손을 호들갑스레 흔들고 과장된 반가움을 주고받는 동창회. 그게 참 좋다.


"누고? 니가 **이가? 우와~~"
하고 내 지르는 괴성(?)이 여기저기서 터진다. 역시 좋다.

그러나....
올 여름. 세 군데나 되는 동창회 일정을 짚어 보면서 나는 머뭇거린다. 시간을 낼 수 없어서만이 아니다. 천편일률적인 그 분위기, 그 상차림, 그 복색, 그 수다. 그리고 그 과음, 그 과식. 그 배설의 언어들 앞에서 머뭇거리지 않을 수 없다.

이 대목에서 칼럼 한 대목을 인용한다.
내가 일하는 '전국귀농운동본부'와 엠오유(Memorandum of  Understanding)를 체결한 전남 강진군 군수 황주홍 선생의 글이다. 이분은 미국 미주리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진보적 지식인 출신이다.

......(전략)
대한민국은 '소모임의 박람회장이다. 한국인의 모임 성격은 딱 두 가지다. 친목모임 아니면 접대모임이다. 친목모임은 과거 지향적이다. 같은 곳에서 태어난 이들의 향우회,
같은 해 태어난 이들의 (동)갑계, 교문을 같이 드나든 사람들의 동문회, 미국 같이 다녀온 직장인들의 찬미회, 시청 총무과를 거친 공무원들의 총우회, 배낭여행에서 만난 젊은이들의 배사랑회…등등

우리들의 소모임은 과거 어느 한 때의 인연을 매개로 한다. 당연히 주된 활동과 이야기도 미래보다는 과거를 향한다. 접대모임은 안면 터서 청탁하는 것이다. 고위험 사회에서의 '보험'들기다. 공식적으로 안 되는 일을 사사롭게 해결하는 모임이다. 거의 매일 저녁 대접하고 접대 받는 분들도 부지기수다. 밥 먹고 술 먹고 1차 가고 2차 가고, 노래방 가고 찜질방 가고, 폭탄주 마시고 건배하고 … (후략)

우리 동네로 먼 길 마다않고 오기로 한 동문 모임의 추진자가 말했다.
"그냥 계곡에서 고기 좀 굽고, 저녁에 술 마시고 밥은 민폐 끼치면 안 되니까 장계 나가서 사 먹고..."

내 머릿속을 아무리 뒤져 봐도 요즘 만나서 고기 굽는 모임은 동창회뿐이지 싶다. 만나서 매식을 하는 모임도 동창회뿐이다. 누구나 뻔히 다 아는 항생제와 성장 호르몬이 범벅인 쓰레기 보다 못한 장터의 고기들. 사육하는 과정에서부터 동물에 대한 인간의 야만이 절여진 동물의 시체덩이를 갖은 양념으로 버무려 굽거나 끓여서는 술과 질펀한 농(弄)으로 모든 고귀한 가치들을 폐기한다.
우리들의 동창회는.

멀쩡한 그릇을 쓸어내 마구 버려지는 남은 음식. 그럼에도 다투어서 함부로 추가 주문을 하는 외침들. 한쪽에서 터지는 고성과 다툼. 화해한다고 다시 채워지는 술잔. 그렇게 해서 총기를 잃은 퀭한 눈빛과 핼쓱한 얼굴로 맞는 아침은 참 고역이다.

집에서 먹는 음식들을 조금씩 싸 가져 와서 먹거나 생협의 자연농 식품으로 간편하게 먹을 수는 없을까. 오로지 배부르게 먹고 취하고 흥청거리는데 쓰는 그 돈의 일부를 뜻 있는 곳에 쓸 수 없을까. 좋은 책을 한 권을 공동구매하여 나눠 가지면 안 될까? 3만 원에서 5만 원씩 걷는 회비를 줄이면 안 될까. 회비와는 별도로 10만 원 50만 원을 내는 기부자들의 돈을 꼭 그 자리에서 탕진해야 하는가? 그런 식으로 스트레스를 풀고 우정을 확인해야 하는가? 동창회는 꼭 그래야 하는가. 술 대신 뜨거운 보이차로 우정을 달굴 수는 없을까?

52살.
뭘 먹어야 하는지 보다 뭘 안 먹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는 나이다. 뭘 해야 하는지 보다
뭘 안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는 나이다. 개고기까지 푸짐하게 준비했다면서 오라는 ****학교 동창회 공지문. 보고 싶은 얼굴들. 가고 싶은 그 동경어린 시절. 그럼에도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머뭇거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동창회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농(農)을 중심으로 연결과 회복의 삶을 꾸립니다. 생태영성의 길로 나아갑니다. '마음치유농장'을 일굽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캐나다서 본 한국어 마스크 봉투... "수치스럽다"
  2. 2 황석영 작가 "윤 대통령, 차라리 빨리 하야해야"
  3. 3 300만명이 매달 '월급 20만원'을 도둑맞고 있습니다
  4. 4 샌디에이고에 부는 'K-아줌마' 돌풍, 심상치 않네
  5. 5 '25만원 지원' 효과? 이 나라에서 이미 효과가 검증되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