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부연' 날에 떠난 부여 여행

등록 2009.07.28 10:38수정 2009.07.28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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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림사터오층석탑과 석불좌상이 모셔져 있는 건물 이제야 부여의 문을 살짝 열고 들여다본다 ⓒ 김정봉


부여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고 딱 꼬집어 자신있게 말하는 사람도 드물다. 부여를 보고 백제를 이해하려 한다면 더더욱 어려워 진다. 이처럼 알듯 모를 듯한 곳이 부여여서 여행지로 선뜻 부여를 택하기 어렵다.

부여는 123년 지탱한 백제의 세 번째 도읍터였지만 백제의 유물이 많이 남아 있는 건 아니다. 그래서 상상력을 갖고 보지 않으면 별로 보고 올 것이 없다고들 한다. 어쩌면 부여에 유물이 많지 않아서가 아니라 우리가 백제를 너무 모르고 있거나 마음에 두고 있지 않아서인지 모른다.


택리지에서는 부여를 "땅이 기름져서 부유한 자가 많으나, 도읍터로 논한다면 판국이 좀 작고 좁아서 평양·경주보다 훨씬 못하다"라 하고 있다. 실제로 부여군의 인구가 8만에 이르지 못하고 부여읍만 겨우 3만에 그치고 있어 소읍의 규모를 벗어나지 못한다. 부소산 반월루에 올라 부여읍을 보면 거의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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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읍 전경 부소산 반월루에 올라 부여읍을 보면 거의 한눈에 들어온다 ⓒ 김정봉


최남선은 '삼국고적순례'에서 부여를 "보드랍고 훗훗하고 정답고 알뜰한 맛은 부여 아닌 다른 옛 도읍에서 도무지 맛볼 수 없는 것"이라 하였다. 사람들의 성정(性情)이 지형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기에 부여의 지형과 부여인의 성정을 동시에 표현한 말이 아닌가 싶다. 어쩌면 백제를 두고 한말 같기도 하다.

우스갯소리지만 '날이 부우옇게 밝았다'에서 나왔다는 부여는 아침의 땅이다. 그 맛을 느끼기 위해 새벽녘에 출발하였다. 손에 잡히지 않는 부여길을 드러내기라도 하듯 공주-부여 간 국도는 안개에 덮여 있다. 옅은 안개가 부지런한 여름 햇살을 막고 있어 부여는 부옇게 보였다.

생각과 달리 부여는 정갈하고 고즈넉한 그런 곳은 아니다. 개발과 발굴이 여기저기 동시에 진행되어 고즈넉하기보다는 어수선하다. 유명한 답사기 책에서 나온 '부소산 산자락을 타고 오르는 허름한 흙담집과 울도 없는 뒤란에서 아무렇게나 자란 키 큰 옥수숫대를 보면서 백제의 여운을 느낄 수 있는' 그런 곳은 이미 아니다.

부여와 첫만남, 정림사지오층석탑


부여를 제대로 알려면 능산리 고분을 먼저 보아야한다는 말을 뒤로 하고 제일 먼저 찾은 건 정림사터오층석탑. 백제의 땅에서 백제의 상징물을 제일 먼저 보고 싶었다. 정림사는 사비성 내에서도 중심에 있었고 도읍기(都邑期) 당시 절 중에 최고였다. 그 곳에 아직도 건재하고 있는 정림사터오층석탑은 부여, 아니 백제의 상징물이다.

정림사터탑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먼저 넓은 주차장은 방향을 잃게 하고 그 다음 박물관 매표소가 가로막는다. 도둑고양이 마냥 반쯤 열린 문으로 들어가긴 했지만 정림사터 옆구리로 들어간 꼴이 되어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다. 정림사터 가운데로 들어갈 수 있도록 정림사터와 박물관 입구를 달리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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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림사터 전경 박물관매표소에서 표를 끊고 들어오면 정림사탑 정면이 아닌 옆구리부터 보게 된다. 제대로 보려면 다시 물러나 연못 앞으로 다시 가야한다 ⓒ 김정봉


백제의 절이 주로 도시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고 지금은 건물들로 둘러싸여 있는데다 정림사터 일대를 너무 지나치게 꾸며 놓아 정림사터는 다른 폐사지에서 느껴지는 애잔한 분위기는 나지 않는다. '검소하지만 누추해 보이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라는 말에서 누추해 보이지 않지만 사치스럽게 보인다.

아무튼 옆구리로 들어온 길을 일부러 연못 앞까지 물러나 다시 탑의 정면을 향해 섰다. 멀리서 보면 탑은 왜소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다가갈수록 장중해 보인다. 그렇다고 둔하거나 무겁게 보이지 않는다.

석재를 다듬어 옥개받침을 곡선으로 처리하여 목조건축의 공포를 재현해 놓았다. 지붕인 옥개석은 딱딱하지 않고 부드러운 느낌이 든다. 옥개석은 하늘을 향해 살짝 고개 들고 있지만 상쾌할 뿐 경망스럽지 않고 층마다 그 크기를 달리한 데서 오는 비례미는 경쾌함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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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림사터오층석탑 멀리서 보면 왜소해 보이나 가까이 다가갈수록 장중한 맛이 난다. 느끼하지도 질리지도 않아 보고 또 보게 한다. 가난한 집 잘생긴 맏아들에게서 느껴지는 훗훗한 정이 있다. ⓒ 김정봉


보고 또 보아도 느끼하지 않고 질리지 않아 또 보게만든다. 옆에 있던 아내도 "느끼하지 않고 질리지 않고 잘 생겼네"라고 한마디 한다. 단번에 정면 승부하지 않고 두고두고 곱씹는 맛을 느끼게 하는 백제의 맛은 누구에게나 느껴지는 것인가 보다.

육당이 말했듯이 '보드라워' 만지고 싶고 '훗훗하여' 함께 어우르고 싶고 '정다워' 따뜻한 정이 드는 것이다. 잘 나가는 집의 석가탑과 다보탑, 감은사 탑에서 맛볼 수 없는 가난한 집의 잘생긴 맏아들에게서 느껴지는 훗훗한 정이 있다.

부소산과 능산리 고분에서 백제의 숨결을

부여에서 백제를 보려면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신동엽 시인은 "백제, 천오백 년, 별로 오랜 세월이 아니다. 우리 할아버지가 그 할아버지를 생각하듯  몇번 안 가서 백제는 우리 엊그제, 그끄제에  있다"라고 했다. 1500년 세월이 중요한 것 같지 않다. 백제는 그리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가까이 있다. 부소산과 능산리 고분을 걸으며 백제를 상상해보고 백제의 숨결을 느껴 본다.

부소산은 부여의 진산(鎭山)으로 북으로 백마강이 휘돌아 흐르고 남쪽 기슭에는 왕궁이 있었다. '부소'는 백제 때 언어로 소나무의 뜻이 있어 소나무가 많은 산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부소산에는 소나무가 유난히 많다. 산성길을 따라 심어져 있는가 하면 어떤 곳은 전체가 소나무 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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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소산 산성길 부소산에는 이름처럼 소나무가 참 많다. 소나무가 심어져 있는 산성길은 부여시민의 사색과 휴식의 공간이다. 부여시민들의 금원(禁苑)이 아닌 후원(後園)인 셈이다 ⓒ 김정봉


경주의 남산에 불교 유물이 많다면 부소산에는 누정이 많다. 왕궁과 가까이 있는 부소산은 창덕궁의 후원처럼 사색과 휴식의 공간인 하나의 큰 후원(後苑)이었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금원(禁苑)은 아니었을 게다.

부소산에는 달맞이대(영월대)가 있던 자리에 영일루(해맞이대)가 있고 부여가 한눈에 다 내려다보이는 반월대가 있으며 송월대터에 사자루가 부소산 제일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사자루 너머에는 낙화암과 백마강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백화정이 있고 그 아래에 고란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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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정 1929년, 낙화암 바로 위에 지어진 정자로 백마강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다. 부소산에는 백화정외에 영일루, 반월루, 사자루 등 누정이 있어 누정에 올라 백제를 상상하기 좋다 ⓒ 김정봉


예전에 달을 맞이하는 곳(영월대)과 달을 보내는 곳(송월대)이 쌍을 이루어 있었던 것이 어느새 달은 사라지고 해(日)가 등장하였다. 사자루가 1919년에, 영일루가 1964년에 지은 것이니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다. 이름도 예전대로 영월루, 송월루라 지으면 어떨까 싶다.

누정은 보는 맛도 있지만 누정에 올라 주변의 풍광과 누정에 얽혀 있는 이야기를 음미하는 맛이 더하다. 누정에 올라 솔냄새를 맡으며 "우리 엊그제, 그끄제에 있는" 백제의 숨결을 느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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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산리고분 흐릿하게 들어오는 앞산의 능선과 봉긋봉긋 솟아 있는 고분이 참 많이 닮았다. ⓒ 김정봉


공주 구읍지에는 '부여 관아에서 동으로 10리쯤에 왕릉이 있다'하였다. 능산리 고분을 두고 한 말이다. 능산리산 중턱에 7기의 능이 보드랍게 모여있다. 능은 어머니의 젖가슴처럼 봉긋봉긋 솟아 있다. 경주 왕릉이 규모가 커서 보는 이를 압도하지만 백제 왕릉은 아기자기하다. 앞산의 둥근 능선과 닮아 있다. 이런 것이 '보드랍고 훗훗하고 정답고 알뜰한 맛', 백제의 미가 아닌가 싶다.   
 
'껍데기는 가라' 시인 신동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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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강 흐르는 백마강 강물을 보며 '강물처럼' 사는 삶을 생각해 본다 ⓒ 김정봉


부여의 유적들이 부여를 투영한다면  부여가 낳은 시인 신동엽은 시속에 부여와 백제를 담았다. 미완의 혁명인 4·19와 동학혁명 그리고 남북문제, 통일의 답을 백제에서 찾았고 그 중심엔 부여가 있었다.

시인 최성수는 "역사에 관심이 많았던 신동엽은 전주사범 이후 일년 남짓 머물렀던 부여에서 시간이 백제와 만나는 인연이 되었다. 후에 그의 시의 핵심적 배경을 이루는 백제의식이 그의 삶 속에 잉태되었다."라고 하고 있다. (온몸으로 밀고간 시의 자유정신vs 사랑과 낭만으로 쓴 미래역사의 꿈 신동엽, 최성수, 숨비소리)

이런 백제에 대한 그의 역사의식은 4·19혁명을 노래하는 시에 그대로 나타난다. 그는 4월 혁명을 어느 날 갑자기 표출된 사건이 아니라 역사의 흐름 속에 나타난 연속된 사건으로 인식한다. 시 <아사녀>에서  역사의 흐름을 '고흔 반도에 이주해 오던 그 날부터 삼한(三韓)으로 백제(百濟)로 고려(高麗)로 흐르던 강물'로 표현하면서 역사의 흐름 중심에 여지없이 백제를 언급하고 있다.

이처럼 신동엽은 부여에 대한 애착과 백제역사의식을 드러냈다. 이런 의식은 그대로 서사시 <금강>으로 이어진다.

백제, 옛부터 이곳은 모여 썩는 곳 망하고 대신 기름을 남기는 곳/ 금강 옛부터 이곳은 모여 썩는 곳  망하고 대신 정신을 남기는 곳/ 바람버섯도 찢기우면, 사방팔방으로 날아가 새 씨가 된다.

신동엽, 그가 태어난 부여 동남리에 생가가 있다. 그러나 아무도 살지 않아 윤기를 잃었다. 그가 살았을 적 초가지붕은 기와가 대신하고 마당엔 어울리지 않게 잔디가 심어져 있다. 마루는 먼지가 쌓여 그를 기리는 마음의 여유조차 주지 않고 자물통으로 잠가 버린 문은 그와의 대화를 막고 있는 듯하다. 생가는 죽어가고 있다. 생가 보존 노력은 신동엽의 부여에 대한 애착에 비하면 너무 미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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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엽 시인 생가 파란색페인트가 칠해진 기와, 잔디가 심어진 마당, 먼지를 뒤집어 쓴 마루, 자물통으로 굳게 닫은 문...생가는 죽어가고 있다 ⓒ 김정봉


그를 기리는 시비가 백마강가 나성터에 자리하고 있다. 이 시비는 그가 작고한 다음해(1970년 4월7일)에 세운 것이다. 시비건립을 두고 말이 많았다고 한다. 원래 부여시민으로부터 사랑받고 가까이 할 수 있는 부소산에 세우려 했으나 한국전쟁 중 그의 행적을 문제 삼은 일부의 반대로 이 나성터에 나앉은 것이라 한다.

시비 주변은 을씨년스럽다. 주위 풍광과 어울리지 않은 덩치 큰 반공순국추모비가 그의 행적을 문제 삼기라도 하듯 부적처럼 서있다. 이 비는 다분히 정치적 목적으로 세워졌다 전해진다. 아직도 우리사회에 존재하는 껍데기다.

묶여 있는 개 한 마리는 외지인을 경계하며 연신 짖어 대고 덩치 큰 또 다른 개 한 마리가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분위기를 음산하게 한다. 나성을 안내하는 푯말은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비스듬히 서있고 썰렁한 주차장에는 쓰레기가 뒹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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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엽 시인시비 쓰레기 뒹구는 주차장, 먼지 먹은 나성푯말, 부적처럼 서 있는 커다란 비석, 외지인을 경계라도 하듯 주위를 배회하는 덩치 큰 개...시비 주위분위기는 을씨년스럽다 ⓒ 김정봉


부여가 내려다보이는 부소산에 있을 시비는 나성터에 나앉아 있다. 신동엽 생애에 대한 부적처럼 덩치 큰 비석이 시비의 시야를 가리고 있다. 정림사터에 쏟은 정성은 지나치다. 신동엽 시인의 생가는 생기를 잃고 있다. 신동엽 시인의 부여에 대한 애착과는 달리 그에 대한 부여인들의 대접은 너무나 소홀하다. 우리 시대에 존재하는 껍데기는 주차장에 뒹구는 쓰레기처럼 곳곳에 존재한다. 능산리 고분 앞 산자락에 묻힌 고인은 조용히 그러나 엄중히 외치고 있다.

껍데기는 가라.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래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기로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부여 #백제 #정림사터오층석탑 #부소산 #신동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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