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하고도 오싹했던 여름산행

중원계곡에서

등록 2009.08.04 14:36수정 2009.08.04 14:36
0
원고료로 응원
a

본격적인 등산로로 들어가기 전의 중원계곡 하류, 더 없이 깨끗하고 맑은 물이 흐른다. ⓒ 김선호


중원계곡은 중원산과 도일봉 사이를 흐르는 물길이다. 계곡을 끼고 가는 산행길이 아름답다는 소문이 산행객들 사이에 이왕에 파다했었다고 한다. 나는 뒤늦게 소문을 입수(?), 요번 참에 다녀오면서 소문의 진상을 비로소 눈으로 확인하게 되었다.

훌륭했다. 기암과 어울린 푸른 숲, 그 사이로 맑디맑은 물길이 굽이쳐 흐르고 있었다. 마침, 장마 기간에 폭우가 여러 차례 쏟아진 덕분에 계곡물은 최고조에 이르고 있었다. 모든 쓰레기들은 다 휩쓸려 가고 청정자연이 고스란히 펼쳐져 있었다. 황송하게도 그 청정한 자연을 답사하는 행운을 누렸다. 감격스러웠다.


a

숲은 한 없이 깊고 푸르다 ⓒ 김선호


경기도 양평의 중원 계곡은 용문산이 뻗어낸 줄기 중 하나다. 중원계곡을 가자면 자연스럽게 중원산과 도일봉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어디로 가느냐는 산행실력과 시간이 좌우할 것이다. 첫 답사지였으며, 계곡을 낀 여름산행을 하자면 도일봉으로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줄곧 시리고 푸른 물줄기를 옆에 끼고 가게 되는 길이기 때문.

마치 냉동고 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몸을 움직이는 만큼 에너지가 땀으로 배출되었으나 그것은 그냥 내 피부의 일이었고 몸은 저 아래 계곡에서 품어내는 찬 기운에 조금 과장을 하자면 온 몸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a

중원폭포 물길은 세차고 여울은 깊다 ⓒ 김선호


중원 계곡 하류에서 벌써부터 물놀이 행락객들이 적지 않았다. 아침에 조금 늦게 출발했으므로 점심시간이 다 되어 있었으니 계곡 한 켠을 빌려 라면을 끓여서 점심을 먹었다. 라면이 끓을 동안 그새 아이들은 등산화를 벗고 물속으로 걸어들어 간다.

햇빛이 사정없이 내려 꽂히는 한낮인데도 발을 넣기가 무섭게 차다. 사방은 온통 흰 구름 둥실 떠가는 파란 하늘과 그 하늘과 겨루기라도 하듯 푸른 숲이 펼쳐졌고, 그 사이를 유유히 흐르는 계곡물뿐이다.

온통 자연 속에 잠기는 행복을 그렇게 일찌감치 맛보고 중원산 들머리에 들어선다. 등산로 들머리부터 마치 깊은 산 속에 들어선 느낌이었는데 난데없이 그곳에 사람들이 북적여서 깜짝 놀랬다. 숲 속에 공원이 만들어져 있었다. 피서를 온 사람들인 모양이었다. 피서객들에게 최고의 장소일게 분명해 보이는 그곳은 풀밭이 넓게 펼쳐지고 군데군데 오두막이 있었으며 그 옆으로 수많은 물길이 차고 맑은 물을 흘려보내고 있어 언제라도 물속으로 뛰어 들 수 있을 것 같은 장소였다.


본격적으로 등산로에 접어드니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진다. 온통 계곡물 흐르는 그 소리 하나가 숲을 가득 채운다. 동행이 말을 건네와도 무슨 말인지 분간할 수가 없을 정도다. 귀가 멍멍할 정도지만 그것은 자연의 소리였으므로 조금이라도 귀에 거슬길 게 없는 소리였다. 물은 그냥 흐르는 게 아니라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여울목에 가서야 그 푸르고 시린 물이 에메랄드빛 보석을 닮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을 뿐, 하얗게 포말로 쏟아져 내리는 물은 희디흰 수많은 '물방울의 난장'이 따로 없었다.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나왔고 그것은 시도 때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러한 계곡물길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그 중 포인트를 찍은 점은 중원폭포에서 였다. 폭포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웅장했다. 아마도 장마의 영향 때문이었을 것이고 우리는 시기를 잘 맞춰 왔던 덕분에 그 장관을 볼 수 있는 행운을 누렸을 것이다.

하늘아래 모든 것들이 청명하게 드러난 가운데 수천의 수억의 물방울들의 난장을 눈앞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니. 남태평양의 아름다운 산호초를 눈앞에서 확인하는 당신은 그곳이 파라다이스라 말할 테지만 나에게 이곳이야말로 파라다이스였다. 자연이 빚어내는  내 눈 앞에 펼쳐진 저 아름다움 앞에서 나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만다.

길은 앞으로 쭉 뻗어 있어 앞으로 가라고 나를 떠민다. 머물고 싶은 마음과 가야 할 마음이 서로 싸우게 되는 길이다. 그러나 너무 아쉬워 할 것 없다. 등산로는 줄곧 계곡을 옆에 끼고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a

손에 손 잡고 신발 벗고 물길을 건넌다. 손에 손을 잡고 ⓒ 김선호


어느 순간, 잠시 길이 끊어졌다. 물길이 막은 탓이다. 아니 애초에 거기 물길이 있었던 걸 사람들은 물길이 길을 끊었다고 억지를 부리는 걸 거다. 신발을 벗어야 했다. 그리고 누군가 물속에 들어가 손을 잡아주어야 건널 수 있었다.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는 어떤 이가 물 한가운데 들어가서 그 일을 해주고 있었다. 나 역시 그분에게 손을 맡기고 계곡물을 어렵사리 건넌다. 자칫 발을 잘못 디딜라치면 저 엄청난 속도로 흐르는 계곡물에 휩쓸려 갈 것 같다. 그러나 한쪽에 밧줄이 연결되어 있으니 최소한의 안정장치가 있는 셈이어서 그럴 염려는 거의 없다. 오히려 그렇게 물속에 빠져 계곡을 가로지르는 일이 즐거운 모양인지 너나없이 얼굴 표정들이 환하다.

하산하는 이들은 물길을 건너다 아예 물속으로 잠수하는 이들도 있다. 가끔씩 만나는 그런 정경들을 보자면 나는 항상 그들이 동심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어른들이 그토록이나 순수하게 웃을 수 있는 모습을 어디서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등산화를 벗고 신는 일은 사실은 매우 번거롭다. 그래서 신발을 벗고 물길을 걷는 일이 꼭 재미만 있는 것이 아니었는데 세번째 물길 앞에선 다른 길을 궁리해 보게 되었다. 조금 위로 가면 물길이 좁아진 어딘가에 디딤돌이 될 만 한 암반이 있는 곳이 있을 것 같았다.

a

중원계곡의 아름다움 앞에선 할말을 잃는다. 이렇게 물 속에 손도 담그고 잘도 걸어갔는데 다음 물길을 앞 두고 다치게 될 줄이야. ⓒ 김선호


그러나, 그것이 화근이었다. 나를 따라온 아들 녀석이 다리를 다치고 만 것이다. 사실은 길이 매우 미끄러웠다. 계곡을 옆에 끼고 있었고 그 계곡의 찬 기운이 산길을 감싸고 있었으므로 산길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던 것이다. 긴 바지를 입히지 않았다는 일이 너무 후회스러웠다. 후회는 너무 늦어 생각보다 깊은 상처를 낸 아이 다리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마침 옆에서 그걸 본 한 부부 등산객이 지니고 있던 밴드를 세 개(가지고 있던 밴드를 다) 주셔서 지혈은 시킬 수 있었다.

그쯤에서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은 지혈을 시켰으니 괜찮을 것 같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마냥 안심할 수 없어서 여전히 계곡을 한 쪽으로 끼고 가는 산길을 조금 더 오르다 하산을 서둘렀다. 아마도 도일봉 가는 중간 지점이었을 것이다. 총 4km 여가 넘는 길 중 2km를 조금 더 간 지점이었으니.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은 다음으로 기약을 하고 돌아서 왔다.

아이의 상처는 생각보다 깊었다. 일요일이어서 응급으로 동네 병원에 가서 찢긴 상처를 꿰매야 했을 정도로. 그 아이를 데리고 벌써 6년째 일요일 산행을 다녔다. 그러는 동안 한 번도 그렇게 큰 상처가 난적이 없었다. 그래서 잘 챙기곤 하던 기본 의약품도 이번엔 빼놓고 간 산행이었던 것이다. 산행을 나서기에 앞서 우리는 '설마' 보다는 '혹시'에 방점을 두어야 했다.

상처를 꿰매고 나온 아이에게  '조심'을 당부했다. 그랬더니 아이의 대답이 이랬다. '지금까지 다치지 않았던 게 행운이었죠.' 나는 상처가 더디 나을 것 같은 이 더운 여름에 다친 아이가 안쓰럽다는 생각만 했는데 아이의 의젓한 답변에 그만 머쓱해지고 만다.

날카로운 바위에 다리를 찢겼을 때도, 마취주사를 맞고 다리를 꿰맬 때도 그리고 상처가 다 나을 때까지도 '아프다'고 엄살 한번 안 피운 아이가 참으로 대견하다. 어릴 때부터 산행을 해온 아이의 마음 한 가운데 산의 넓은 마음 한 자락이 들어와 있었을까.  측량이 가능하다면 그걸 확인하고 싶지만 그랬으면 참 좋겠다. 그래서 인생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넘어지고 다쳤을 때 지금 그랬던 것처럼 의연했으면 더 바랄 게 없었다는 생각을 한다.

아이의 다리 상처가 아물어 간다. 그러나 상처는 흔적을 남길 것이고 그 흔적을 볼 때마다 아이는 아마도 중원계곡 그 산길을 기억할 것이다. 다쳤을 때의 느낌이 오싹하게 떠오를 것이지만 기운차게 흐르던 중원계곡을 끼고 간 그 시원한 여름날의 산행을 상처의 흔적이 복기시켜 줄 테지. 아픈 상처마저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아이 덕분에 나 역시 중원산 도일봉 계곡 길을 걸었던 일은 아름다운 산행으로 기억할 수 있을 듯싶다. 비록 끝까지 가보지 못한 산행에 대한 아쉬움이 없지 않지만.

덧붙이는 글 | 지난 7월 26일에 다녀왔습니다.


덧붙이는 글 지난 7월 26일에 다녀왔습니다.
#중원계곡 #도일봉 #중원폭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금반지 찾아준 사람이 뽑힐 줄이야, 500분의 1 기적
  2. 2 검찰의 돌변... 특수활동비가 아킬레스건인 이유
  3. 3 '조중동 논리' 읊어대던 민주당 의원들, 왜 반성 안 하나
  4. 4 '윤석열 안방' 무너지나... 박근혜보다 안 좋은 징후
  5. 5 "미국·일본에게 '호구' 된 윤 정부... 3년 진짜 길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