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비(鐵碑), 왜정시대 공출 1순위·고물상 표적

[09-019] 부의 상징이며 영원할 것으로 믿었던 철비, 목비나 석비보다 귀한 존재

등록 2009.08.12 14:47수정 2009.08.12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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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비(鐵碑), 왜정시대 공출 1순위·고물상 표적 ⓒ 서정일

▲ 철비(鐵碑), 왜정시대 공출 1순위·고물상 표적 ⓒ 서정일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에서 보듯 선조들은 이름을 소중히 여겼고 묘비·탑비·신도비·사적비·송덕비·공덕비 등 수많은 비(碑)에 이름들을 새겨놓았다.

 

그런데 비(碑)라고 하면 일반인들이 돌에 새긴 비석만을 떠올리겠지만 사실은 나무에 새긴 것(목비)과 철(쇠)에 새긴 것(철비) 등 다양한 형태가 있다. 단지, 석비에 비해 목비나 철비(鐵碑)가 남아 있는 것이 귀해 상대적으로 석비만이 돋보이고 눈에 띌 뿐이다.

 

한국에서 철을 처음 사용하게 된 것은 기원전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국가에서 철을 통제하던 것이 무너진 시기는 18세기경으로 이때부터 일반인들 사이에서 철비를 많이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철비가 부의 상징과 영원성에 대한 믿음에 따라 급속히 확산됐다고 한다.

 

그런데 다른 재료에 비해 단단하지 않고 새겼다고 하더라도 손실이 많은 목비가 희귀한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나무나 돌에 비해 훨씬 단단하고 18세기경 철 생산력 증대와 함께 급격히 늘어난 철비가 목비보다 더 귀하게 된 것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와 관련해 외서면 한장섭(88)씨는 "철비가 쇳덩이로 만들어졌기에 왜정시대에는 공출 1순위였고 산업이 한창 발달하던 시대에는 고물상의 표적이었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무리 시대가 변했다고 일제가 공적비나 송덕비를 공출해가고 여기에 고물상도 뽑아 가리라고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철비가 부의 상징이었고 더 오랫동안 남아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세워놓았을 조상들이 이 사실을 알면 땅을 치고 분통해 할 일이다.

 

"결국 시대를 초월해 '아주 작은 비석'만이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 있게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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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시 외서면 한장섭, 한상석씨가 외서면 복지회관앞에 두개 남은 철비를 바라보고 있다 ⓒ 서정일

순천시 외서면 한장섭, 한상석씨가 외서면 복지회관앞에 두개 남은 철비를 바라보고 있다 ⓒ 서정일

 

아무튼, 일제의 공출을 무사히 피하고 고물상의 눈까지 피해 살아남은 철비 2기(선정비, 공덕비)가 순천시 외서면 복지회관 앞에 서 있다. 길가에 있던 것을 15년쯤 전에 이곳으로 옮겨왔다는데 높이가 각각 120, 170 센티미터 너비는 각각 30, 50센티미터 정도다.

 

제작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낙안현이라고 새겨놓은 것으로 봐서 낙안군이 폐군되던 1908년보다는 훨씬 이전으로 보인다. 또 한때 낙안군이 낙안현으로 강등된 적이 있다는 문헌 기록을 볼 때 1800년대 이전일 것으로만 추정된다. 특별히 문화재로 지정될 만큼 대단한 것은 아닐지라도 희귀한 것임엔 틀림없다.

 

비공식 집계에 의하면 전국적으로 철비가 약 300여 개가 남아 있다고 한다. 지난 2007년, 포스코역사관에서 조사한 바로도 전국 23개 지역에서 47기 정도의 철비만 확인됐다고 하니 이곳 외서면의 철비도 분명 희소성은 있어 보인다.

 

현재 확인된 철비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된 것은 1631년 제작된 충북 진천군 '현감이원명선정거사비'와 경북 경주시 '영장유공춘호영세불망비'이며, 다음으로 강원도 홍천군 '현감원만춘선정비(1661년)'라고 알려져 있다.

 

철비의 머리[碑頭]에는 다양한 문양을 조각했는데, 서산군청 앞 철비에는 민속신앙의 대상인 일월칠성(日月七星)을, 화순 지역의 비에서는 청정을 상징하는 연꽃을, 경남 지역에서는 부와 자손의 번창을 기원하는 모란꽃 등을 즐겨 표현했다. 이밖에 인내를 상징하는 인동초 장식도 즐겨 사용된 문양이라고 한다.

 

"이제는 일제가 공출해가고 고물상이 뽑아가는 철비가 아닌 시대가 변해도 영원히 그 자리에 남아 있을 '아주 작은 비석'만 세워야 할 듯하다."

 

낙안군과 낙안군 폐군(廢郡)
현재의 순천시 외서면을 비롯해 낙안면, 별량면 일부, 보성군 벌교읍 그리고 고흥군 동강면, 대서면 일부의 땅은 옛 낙안군이었다. 101년 전인 지난 1908년 10월 15일, 일제는 항일투쟁무력화, 동학혁명진원지 분산, 침략거점 도시화를 위해 낙안군 자체를 없애버리고 주민들을 인근 지역 세 곳으로 강제 편입시켰다.

덧붙이는 글 예고: [09-020] 여름휴가 끝나야 오붓한 이미대
남도TV
#낙안군 #남도TV #스쿠터 #외서면 #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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