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의 쌍둥이 자매가 부른 '그날이 오면'

2009년 광복절에 부치는 글

등록 2009.08.15 10:10수정 2009.08.17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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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주년 광복절

나는 해방둥이다. 누가 내 나이를 물으면 해방된 지 몇 해 되었느냐고 따지면 금세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올해는 광복 64주년이 되나 보다. 해마다 맞이하는 광복절이지만 이즈음은 진정한 '조국의 광복'이나 '조국의 통일'에 대한 어떤 희망보다 절망을 더 느끼게 한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것일까?

오히려 '광복' '통일'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을 구시대적이고 케케묵은 골동품처럼 취급하는 이즈음이다. 광복절을 앞둔 이즈음 갑자기 이태 전에 미국 버지니아주 센트빌 '심훈기념관'에서 본, 전 금란여고 교장 이철경 선생이 쓰신 심훈 선생의 시 <그날이 오면>이 보고 싶어 그때 사진을 찍어 내 컴퓨터에 저장된 파일을 화면에 띄우고 감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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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경 선생의 <그날이 오면> ⓒ 심재호


그날이 오면

                         심 훈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 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올리오리다.
두 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六曹)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딩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 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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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각경 선생의 <그날이 오면> ⓒ 심영주


이 액자는 심훈기념관 벽에 걸려 있기에 나는 가슴 뭉클하여 마음 속으로 읊었다.  그때 심훈 선생 막내아들 심재호씨가 나와 나눈 대화다.

쌍둥이 서예가 자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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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훈 ⓒ 심재호

심 : 이철경 선생의 글씨입니다. 그분이 손수 쓰셔서 생전에 저에게 준 액자입니다.

박 : 저도 글씨를 보고 마지막 '갈물 이철경'이라는 서명을 보지 않고도 그분이 쓴 것으로 짐작했습니다. 제가 마지막 근무한 학교가 이대부고였는데 2002년 금란여고와 이대부고가 한 학교로 합병을 했습니다. 금란여고 교사(校舍)가 이대부고 교사가 되었는데, 그곳으로 이전하고 보니 교무실에도, 도서관에도 전 교장인 이철경 선생의 서예작품이 걸려 있어 글씨가 눈에 익었지요.

심 : 그분은 저의 사촌매부로 북한의 생물학자 리정구씨 누님입니다. 리정구씨는 분단 전에는 이화여대에서 교편을 잡았는데 김옥길 총장도 제자였다고 들었습니다. 그분의 아버님은 이만규 선생으로 한글학자이며 배화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고, 여운형 선생의 비서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그분의 쌍둥이 딸이 리각경·이철경 자매로 각각 남과 북에서 서예가로 이름을 날렸지요. 제가 1987년 북에 가서 언니인 리각경씨를 만났더니 저희 아버지의 시 <그날이 오면>을 쓴 족자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족자는 지금 제 큰 딸 영주네 집 거실에 걸려 있습니다. 리각경·이철경 자매는 쌍둥이로 자랐지만 분단 이후 언니인 리각경 선생은 북에서, 동생인 이철경 선생은 남에서 서로 그리면서도 만나지 못한 채 몇 해 전 모두 세상을 뜨셨습니다.

제가 리각경 선생을 만나 동생 이철경 선생 아들 서유석이 남쪽에서 유명한 가수가 되었다고 전했더니 헤어질 때 글씨 한 점을 주더군요. 제가 서울로 가 그 글씨를 서유석씨에게 전했습니다.

박 : 언제 리각경 선생의 '그날이 오면' 작품을 보고 싶습니다. 쌍둥이로 태어났지만 아버지의 핏줄을 이어받아 한글 서예가로 남과 북에서 이름을 떨친 이야기와 또 같은 이(李)씨지만 리각경과 이철경으로 불리는 것은 분단의 현실을 단적으로 말하는 듯하여 가슴이 매우 찡합니다.

피를 토하듯 쓴 '그날이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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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훈 선생의 서간문 <감옥에서 어머님께 올린 글월> 육필 원고 ⓒ 심재호

불현듯 리각경씨가 쓴 시 <그날이 오면>의 족자가 보고 싶었다. 그렇다고 비행기를 타고 워싱턴 근교 버지니아주 센트빌까지 찾아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고심 끝에 심재호씨에게 따님 댁에 있는 리각경 씨가 쓴 시 <그날이 오면>의 족자를 디지털카메라로 촬영하여 메일로 보내달라고 어려운 부탁을 드리자 엊그제 내 메일함에 도착했다.

북녘의 서예가 리각경씨와 남녘의 서예가 이철경씨는 쌍둥이 자매로 태어났다고 한다. 늘 같은 학교를 다녔는데 공부도 자매간 서로 1, 2등을 다투었고, 두 분 모두 한글학자인 아버지 이만규 선생의 영향으로 한글서예가가 되었다. 쌍둥이 자매였지만 결혼 뒤에는 남과 북으로 나뉘어 살게 되었다.

1987년 마침 사돈댁 심훈 선생의 막내아들 심재호씨가 서슬 퍼런 분단의 선을 넘어 북의 평양으로 찾아온다고 하자, 리각경 선생은 반가운 마음에 심훈 선생의 시 <그날이 오면>을 써서 족자로 만들어 선물로 주었다. 그 얘기를 듣고 남녘의 동생 이철경 선생도 심훈 선생의 시 <그날이 오면>을 써서 액자로 만들어 심재호씨에게 선물했다고 한다.

리각경·이철경 쌍둥이 자매는 끝내 생전에 서로 만나지 못하고 두 분 모두 이 세상을 떠났다. 아마도 두 분 모두 서로 만날 통일의 <그날이 오면>을 머릿속에 그리며 한지에다가 피를 토하듯 먹물을 입혔을 것이다.

2009년 광복절에 즈음하여 그동안 성원해 주신 독자 여러분에게 이 귀한 작품과 그 뒷이야기를 전해 드린다. 이번 광복절 아침에는 남과 북, 그리고 해외에서도 조용히 심훈 선생의 시 <그날이 오면>을 읊자. 그리고 우리 모두 '그날'이 오라고 엎드려 천지신명에게 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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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당진 부곡리에 있는 필경사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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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사에 있는 심훈 무덤 ⓒ 심재호

#그날이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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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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