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 내음 솔솔 퍼지는 골목길

[인천 골목길마실 60] 뜨거운 햇볕에는 무엇보다 ‘고추 말리기’

등록 2009.08.21 09:25수정 2009.08.21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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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가 내리는 날이면 매미는 조용합니다. 사람들이 온통 아스팔트와 시멘트를 깔아 놓아 아주 비좁게 된 흙땅에서 여러 해를 겨우 살아낸 매미로서는, 여름날 찾아오는 장마비가 반갑지 않으리라 느낍니다. 그렇지만 올해 장마비는 장마답게 길게 이어지지 않고 똑똑 끊어집니다. 그치지 않을 듯 퍼붓다가도 어느새 말끔히 그치고 구름이 걷힙니다. 하늘에 매지구름이 사라지고 파란빛이 차츰 넓게 드러나면, 골목길 사람들은 그동안 치워 놓았던 고추더미를 길바닥에 풀어 놓습니다. 장판이나 검은그물을 깔고 고추를 위에 얹어 놓습니다. 때로는 비닐 덮개를 따로 마련해 놓고, 비가 오건 말건 길바닥에서 쉬도록 해 주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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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깔아 놓은 고추가 아니라, 하나하나 알뜰히 간수하며 예쁘게 깔아 놓은 고추입니다. 고추 둘레로 꽃그릇 마련한 매무새와 빗자루로 늘 쓸어 내는 매무새를 헤아리면 쉽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 최종규


볕이 맑은 날, 햇볕이 따사롭게 내리쬐면서 등줄기에 땀이 줄줄 흐르도록 하는 날, 자전거를 몰거나 두 다리로 성큼성큼 골목길을 거닙니다. 골목길을 거닐거나 천천히 달리면서 꽃그릇과 빨래 둘레에서 햇볕을 듬뿍 받고 있는 고추를 바라봅니다. 예전에는 고추장을 즐겨먹었지만 이제는 고추가루며 고추장이며 먹지 못하는 몸으로 바뀌었기에, '고추 널이'를 보면서 지난날처럼 애틋하고 즐거운 느낌이 되지는 않습니다. 고추가 아닌 곡식을 널어 놓는다든지, 또는 무화과 꽃봉오리나 감을 깎아 말린다든지, 옥수수를 매달아 말린다든지 한다면 새삼스러우면서 반갑다고 느끼겠지요. 아무래도 사람들은 누구나 당신 삶을 건드리거나 당신 삶에 가까운 모습에 마음이 끌릴 테니까요.

그러고 보면, 가난하고 수수하더라도 언제나 즐겁게 이웃사랑으로 어깨동무하는 여느 사람들 삶을 꾸밈없이 바라보려는 삶이 아닐 때에는 골목마실을 하면서 골목길 사진찍기를 즐길 수 없겠구나 싶습니다. 나 스스로 골목사람인 가운데 골목동네에서 살아가는 몸이 되지 않고서는 골목길 사진을 찍을 수 없으며, 어쩌다가 찍더라도 푸근하고 넉넉하게 담아내기는 어렵구나 싶습니다. 왜냐하면, 저보고 '잘 빠지고 싱싱 내달리는 스포츠카'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하면 한 장도 찍어 줄 수 없습니다. 도심지에 솟은 높은 건물을 찍어 달라거나, 깊은 밤에 괜히 전등불을 켜 놓고 밝히는 한강다리나 무슨무슨 다리들을 찍어 보라고 할 때에도 한 장조차 찍을 수 없습니다. 저하고는 동떨어진 모습이요 자취이며 삶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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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다닐 길만 빼고 고추를 깔아 놓습니다. 이렇게 해도 어느 누구 투덜대지 않습니다. 모든 골목집마다 이렇게 해 놓지 않으면 자리가 안 나니까요. ⓒ 최종규


집살림꾼이 밥하고 빨래하고 아이 보고 씻기고 걸레질하고 설거지하는 모습들은 얼마든지 알뜰히 찍어낼 수 있습니다. 두 다리로 씩씩하게 걷거나 골목에서 노는 아이들이나 자전거 마실 즐기는 사람들 또한 언제나 신나게 담아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헌책방 마실을 하면 한결같이 기쁘고 뿌듯하게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한편, 교보문고나 영풍문고처럼 으리으리 커다란 책방에서는 사진 한 장 못 찍으며, 이런 곳에서는 굳이 내가 사진을 찍어야 할 까닭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고추를 못 먹고 고추가루며 고추장 또한 못 먹는 주제에, 골목길 고추 말리기를 사진으로 담습니다. 골목길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또, 고추를 말리는 자리 둘레로 숱한 꽃그릇이 있고, 빗자루가 있으며, 우리 동네를 두 동강 내려는 산업도로 공사터가 있는 가운데, 골목사람들 손길이 듬뿍 묻은 빨래가 있습니다. 알뜰살뜰 가꾼 골목 텃밭이 있고, 세월이 고스란히 묻은 골목집 바깥벽하고 어울리는 고추들이 있고, 가지런히 줄을 지어 놓은 매무새라든지, 몇 알만 따로 그러모아 말리는 모습이라든지, 바라보기만 해도 절로 웃음을 자아내는 고추 말리기라고 느끼면서 사진을 한 장 두 장 찍습니다.

사진을 찍는 제 머리 위로 여름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느라 고추도 잘 마르고 제 몸도 뜨겁게 잘(?) 달아오릅니다. 몇 시간에 걸쳐 이 동네 저 동네 고추 말리기 사진을 찍고 집으로 돌아오니 옷과 사진기가 땀으로 흠뻑 젖습니다. 사진을 찍는 동안 살며시 제 온몸과 사진기로 스며든 고추 내음을 찬물로 말끔히 씻어내고 두 다리를 쭉 뻗습니다. 아기한테 아빠 배에 올라타라고 하면서 함께 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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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 틈틈이 드나드는 골목에서는 담벼락에 기대어 아주 조금밖에 널어 놓지 못합니다. 같은 골목이라도, 사람만 드나드는 골목과 차가 함께 드나드는 골목은 사뭇 다릅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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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만 드나드는 골목에서는 퍽 느긋하고 넉넉하게 고추를 깔아서 말립니다. 그런데 꼭 요만큼만 작게 그러모아 따로 널었네요.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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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집은 늘 '주거환경개선'이라는 이름으로 헐리고 아파트로 바뀌어야 한다고만 외치는 이 나라입니다. 그런데, 기와집 바깥벽 꾸밈새 하나하나를 가만히 돌아보면, 바로 우리네 집살림 문화요 예술이 아닐까 싶습니다. 비오면 빗물을 받아서 꽃그릇에 물을 주는 이러한 매무새야말로, 우리가 찬찬히 들여다볼 '생활예술'이 아닌가 싶습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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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 말리기도 좋고, 고추 말리기가 아닌, 한여름 골목길 한켠 구경도 좋습니다. 이웃 동네 삶터를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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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 내음을 맡는 골목길 빨래에는 어떤 느낌이 깃들일까요.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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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규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덧붙이는 글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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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골목마실 #인천골목길 #골목길사진 #고추 말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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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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