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석방기도회 박정희 정부는 아주 싫어했죠"

[해외리포트] 김대중 구명 운동 벌인 '호주의 양심' 존 브라운 목사

등록 2009.08.22 17:40수정 2009.08.28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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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김대중 선생이 돌아가셨네요. 그분 사형시키지 말라고, 감옥에서 석방하라고 기도회 열고, 한국과 호주 정부에 편지(청원서) 보내고 한 게 엊그제 같은데…."

호주 행정수도 캔버라에 거주하는 존 브라운 목사(76·한국명 변조은)는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를 마치 자기의 스승이 타계한 것처럼 슬퍼했다. 그는 기자와의 인터뷰를 통해서 "18일 당일 호주 언론에 크게 보도된 김 대통령 서거 뉴스를 접하고 묵상하면서 조용히 기도를 드렸다"고 말했다.

"아이고, 김대중 선생이 돌아가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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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한 18일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 김 전 대통령의 영정사진이 놓여 있다.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남소연


"김 선생이 일본에서 납치될 때부터니까 참 긴 세월을 한국 독재정권들과 싸웠습니다. 생각해보면 징그러워요. 어떻게 죄 없는 사람을,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해서 목숨 걸고 헌신하는 사람을 사형! 무기! 하면서 탄압했는지."

위의 말은 영어를 기자가 번역한 게 아니다. 존 브라운 목사는 1960년부터 12년 동안 한국 선교사 생활을 하면서 한국어를 완벽하게 익혔다. 대학에서 한국어로 강의까지 했으니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잠시 장로교신학대학교 제자인 홍길복 목사(65·시드니우리교회)의 증언을 들어보자.

"존 브라운 교수님한테서 이사야서 41장 원서강해를 듣고 시험을 쳤습니다. 그 며칠 후에 답안지를 돌려받았는데, 정말 믿기 어려운 사실을 목격했습니다. 한국에 온 지 5년 남짓한 선교사가 학생들이 한글로 작성한 답안을 빨간 펜으로 일일이 교정해 놓았는데, 놀랍게도 한글 맞춤법이 정확했습니다."


하루는 존 브라운 목사가 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가는데, 청년 두 사람이 "야, 양코배기 새끼가 탔다"며 시시덕거렸다. 브라운 목사는 잠자코 있다가 버스에서 내리면서 "새끼는 나쁜 말이지요. 기분 나쁘고요"라고 한마디 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언젠가 브라운 목사가 "참 웃긴다"는 말을 하자 홍길복 목사가 "목사님은 천재적인 언어감각을 갖고 태어나셨습니다"라고 했다. 그랬더니 브라운 목사가 버럭 화를 내며 한소리 했다고 한다.

"그게 무슨 소리냐. 내가 한국말을 배우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한 후 장로교신학대에서 공부한 홍 목사는 유신 시절 긴급조치 위반으로 고초를 당한 바 있는데, 훗날 브라운 목사의 초청으로 호주에 정착했다. 브라운 목사의 제자 중에는 홍 목사의 동기들인 인명진 목사, 김진홍 목사도 있다. 그들은 당시엔 진보적인 목사들이었다.

"민주화 투쟁 중심에는 항상 김대중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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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대통령의 일생을 보도한 호주 국영 abc-TV 화면 캡처. ⓒ 호주 국영 abc-TV


다시 민주화투쟁 시절 얘기로 돌아가자. 존 브라운 목사는 한국의 60, 70년대를 회고하면서 "나중에 통일운동이 추가됐지만, 그 당시만 해도 민주주의 쟁취와 노동자 권익 찾기가 변혁운동의 주된 테마였다"면서 "특히 민주화 투쟁의 중심에는 항상 김대중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우리 선교사들이야 기도회 열고, 청원서 보내기 등으로 구명운동으로 투쟁했지만, 김대중 선생은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투쟁했다"면서 "누군들 자기 목숨이 아깝지 않겠는가, 그런 측면에서 한국인들은 선생에게 빚 진 자들"이라고 주장했다.

브라운 목사는 특히 'YH 사건', '도시산업선교회 사건', '국제어패럴 사건' 등에 깊이 관여했다. 도시산업선교회에서 일했던 호주 출신 스티브 라벤다 선교사도 그의 추천으로 한국에 왔다. 라벤다 선교사는 강제추방명령을 받았지만 브라운 목사가 추방당하기 전날 자진 출국시켰다. 그래야 다시 한국에 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브라운 목사는 호주로 돌아온 뒤에도 한국의 민주화에 무관심할 수 없었다. 홍길복 목사, 인명진 목사를 포함한 여러 제자들이 긴급조치 위반으로 수감돼 있을 때 감옥으로 위로편지를 보내주고, 관계 당국에 선처를 호소하는 편지를 끊임없이 보냈다.

브라운 목사는 비단 정치·사회적인 사안에만 관심을 기울인 것은 아니다. 빈민구제 쪽에 더 큰 관심을 뒀다. 그래서 김진홍 목사가 설립한 활빈교회에 호주의 소를 보내줬고, 도시산업선교회를 통해 노동운동과 도시빈민운동을 함께 지원했다.

브라운 목사는 남을 돕는 일에는 적극적이지만, 평생 가난하게 사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기자가 4년 전에 브라운 목사를 만났을 때 아주 낡은 차를 몰고 다니는 걸 보고 한 말씀 드렸더니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32만km를 달렸으니 그럴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도 끄떡없습니다. 목사는 크고 좋은 차를 타면 안 됩니다. 교인에게 상처를 주기 때문입니다. 호화롭게 살고 싶으면 목사 노릇 그만두고 사업을 해야죠. 예수님께서는 늘 가난하고 소외당한 사람의 편에 계셨고 평생 집도 없이 사시다가 가셨습니다."

결과적으로 브라운 목사가 한국에 기여한 공로는 선교사 생활과 장로교신학대학 교수생활 이 전부가 아닌 셈이다. 한국 농촌의 빈곤퇴치운동과 도시빈민운동, 노동자인권운동, 정치민주화운동에 기여한 공로도 결코 그에 못지않기 때문이다.

특히 김대중 석방운동을 열심히 펼친 브라운 목사는 독재정권의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매주 목요일마다 '김대중 석방을 위한 기도회'를 열면서, 그 자리에서 한국 정부, 호주 주재 한국대사관, 호주 외무성, 한국 주재 호주대사관에 청원서를 보냈다.

"남은 일은 한국과 세계가 그의 뜻을 계승하는 것"

60-70년대 김대중 구명 운동을 벌였던 존 브라운 목사. ⓒ 윤여문


8월 22일 오전,  캔버라로 전화를 걸어서 브라운 목사와 인터뷰를 가졌다. 그는 76세의 노인이지만 아직도 호주 원주민인 애보리진 인권운동을 위해서 열심히 뛰고 있다. 그가 캔버라로 이사를 간 이유도 연방정부를 상대로 효과적인 운동을 하기 위해서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 김대중 대통령을 직접 만난 적이 있는가?
"서로가 감시당하는 입장이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활동이 김대중 선생에게 전부 전달된 것으로 알고 있다. 특히 내가 호주 정부 당국자들에게 수시로 연락하는 입장이어서 만난다는 것 자체가 자칫 김 선생에게 해롭고 내가 구명운동을 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1960-70년대의 한국 인권상황은 세계적으로도 최악에 속했다."

- 그렇게 열심히 석방운동과 구명운동을 했던 사형수가 마침내 대통령이 됐을 때의 느낌은.
"'하나님, 감사합니다' 수십 번 그렇게 기도했지. 지금 생각해도 그날의 감격은 내 생애 최고의 순간 중에 하나다. 그래서 한국으로 달려가서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했다."

- 호주 언론들이 김대중 대통령 서거 내용을 적극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호주 국영 abc-TV와 주요 신문들이 크게 보도했는데 그건 당연한 반응이다. 김 선생이 한국의 위대한 지도자이기도 하지만 세계적인 지도자이기 때문이다."

- 김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받은 인물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건가?
"그렇지 않다. 선생은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세계적인 화제를 불러온 인물이었다. 호주 지식인들이 그의 구명운동에 적극 나선 것도 호주 언론에서 그의 투쟁을 지속적으로 보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김대중 선생 소식을 해외에 전파하는 걸 박정희 독재정부가 아주 싫어했다."

- 한국에서 노벨 평화상 수상을 놓고 시비가 일었는데 혹시 알고 있나?
"나중에 들었다. 호주는 노벨상을 20개 가까이 받았지만 평화상은 없다. 사실 노벨상 중에 평화상이 하이라이트 아닌가. 그게 외국에서는 얼마나 부러워 하는 일인데.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 속상하다."

- 호주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높이 평가하는 걸 보면서 한국에서의 평가가 인색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동감이다. 김대중 선생의 죽음은 한국인의 슬픔이기도 하지만, 세계적인 지도자이기 때문에 세계인이 슬퍼할 일이다. 이제 남은 일은 한국과 세계가 그의 큰 뜻을 잘 계승하는 것이다. 나는 그 일을 위해서 계속 기도하는 중이다."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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