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아입구→탈미입아... 일, 124년만의 회귀

[정치 톺아보기] 8·30 선거혁명은 '체제 순응적' 일본 민심의 대폭발

등록 2009.09.01 17:18수정 2009.09.01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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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만 엔 일본 최고가 지폐 일 만 엔에 새겨진 후쿠자와 유키치의 초상화. ⓒ 한성희


화폐를 보면 그 나라의 역사와 국가가 지향하는 바를 알 수 있다. 중국 인민폐(RMB)의 지폐 도안을 보면 1위안(元)에서부터 100위안까지 5종이 모두 마오쩌뚱(毛澤東) 초상 일색이다. 베트남의 동(VND)은 이 나라의 국부(國父)이자 통일 영웅인 호치민(胡志明) 일색이다. 12종이나 되는 지폐 중에서 최저액권인 100동을 제외한 11종이 모두 호치민의 초상으로 도안돼 있다.

그렇다면 이웃나라 일본돈 엔(円)은? 1000엔부터 1만엔까지 4종인 일본 지폐에는 2004년에 새로 유통한 신권을 포함해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시절에 활동한 작가와 학자의 초상이 고루 들어있다. 유일한 국내파 여성인 히구치 이치요(1872~1896)를 제외한 이들의 공통점은 메이지 시대에 활동한 '해외파'라는 점이다. 그중에서도 최고액권인 1만엔권에는 일본 근대화의 선각자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의 초상이 들어 있다.

게이오 대학을 창립한 일본의 대표적 지성이자 계몽 사상가인 후쿠자와는 원래 난학(蘭學)을 공부하였으나 세상의 중심이 네덜란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20대에 영어를 새로 배운다. 그리고 1860년 미국을 최초로 방문했던 일본 사절단에 합류해 샌프란시스코를 찾았고, 1861년에는 막부(幕府)의 유럽 사절단 일원으로 약 1년에 걸쳐 미국과 유럽을 순방했다.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 아시아 멸시관 뿌린 원조?

이런 경험으로 일찍이 유럽과 미국의 학문 및 서구사상에 눈을 뜬 그는 정부 각료로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활발한 언론 및 저술활동으로 당대의 여론과 국가의 나아갈 바를 결정한 경세가였다. 김옥균-박영효 같은 개화파는 그를 스승으로 모셨으며, 스스로 한국의 후쿠자와가 되기를 꿈꾼 춘원 이광수는 그를 '하늘이 일본을 축복하여 내린 위대한 인물'이라고 평가했을 정도다.

그는 일본에서는 근대화의 선각자이지만 한국과 중국 등 이웃나라에서는 군국주의의 씨를 뿌려 민족의 고통을 안긴 '나쁜 이웃'(惡友)이다. 특히 대만에서 그는 '가장 증오할 민족의 적'으로 불린다고 한다. 그는 1885년 3월 16일 자신이 창간한 <시사신보(時事新報)>에 실은 '파괴는 건축의 시작이다'라는 글에서 이렇게 '탈아론'(脫亞論)을 주장했다.

"일본은 오늘의 발전을 도모하는 데 있어서 이웃 나라의 개명(開明)을 기다려 함께 아시아를 흥하게 할 만큼 여유롭지 못하다. 오히려 우리는 아시아 국가들에서 벗어나 우리의 운명을 서구의 문명국가와 함께 하는 것이 낫다. 중국 및 조선 역시도 이웃나라라고 해서 특별히 대우할 필요 없이 서양 사람들이 하는 방식대로 대우하면 된다.


악우(惡友)를 소중히 하는 사람은 그 친구의 악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터럭만큼도 도움이 안 되는 나쁜 친구와 친해져서 함께 악명을 뒤집어 쓸 이유가 없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아시아 동방의 나쁜 친구들을 멀리해야 한다."

서양만이 문명의 총화라고 여기고 동양에 결별을 고했던 후쿠자와의 '탈아입구'(脫亞入歐,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 사회를 지향한다) 노선은 뒤집어보면 '아시아 멸시관'이었다. 그가 내건 '탈아입구' 노선을 추종한 덕분에 일본은 아시아에서 먼저 전근대를 탈피하는 데 성공했는지는 모르지만 이웃나라에는 무한한 고통과 희생을 강요했다.

일본 고도성장기의 바탕은 메이지유신 정신 이은 '55년 체제'

이웃나라를 연대와 협력의 상대가 아니라 일본이 '문명화'시켜야 할 침략의 대상으로 여긴 '탈아입구'를 통한 그의 국가 발전전략은 결국 전쟁을 통해 국가의 번영을 추구하는 군국주의 노선으로 귀결된다. 계속된 침략과 영토 확장으로 이웃나라를 생산기지화해 국가 발전을 위한 자원을 확보하고 타국으로부터 획득한 전쟁배상금으로 국부(國富)를 축적하는 전형적인 식민지 수탈정책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일본 근대화의 선각자일지 몰라도 우리에게는 아시아 멸시관으로 침략의 과거사를 자랑스러운 역사로 분칠하려는 우익세력을 낳은 군국주의의 원조이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그의 '탈아입구' 노선은 제2차 세계대전 패배를 계기로 '입구'(入歐)가 '입미'(入美)로 바뀌었을 뿐, 전후에도 계속된다.

일본의 팽창주의적 국가발전전략은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으로 종식되었다. 그들이 수십년 동안 서양 문물을 추종하고 모방해 창조했던 모든 것들이 잿더미로 변했다. 그러나 일본은 1945년 얄타회담과 함께 시작된 냉전체제에서 비롯된 이웃나라의 불행(6.26 전쟁)과 미국의 우산 속에서 경제를 부흥하고 마침내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처럼 단기간에 국가 재건이 가능했던 이유는 메이지유신 이래 100여년 넘게 발전해온 일본의 국가전략이 변함없이 이어져 왔기 때문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그리고 이러한 국가전략은 보수정당의 통합을 통해 기형적인 '1.5당'을 출범시킨 이른바 '55년 체제'에 힘입은 바 크다.

55년 10월 일본 사회당의 통합에 자극받은 보수세력이 11월 자유당과 민주당의 합당으로 자민당을 만든 것은 당시 일본내 혁신 정치세력의 성장과 소련·중국의 위협 등 일본 안팎의 사회주의 세력의 도전에 대한 일종의 미-일 보수세력의 대응이었다. 이후 대외적으로 미-일 동맹, 국내적으로 국가주도 고도성장으로 상징되는 '55년 체제'는 한-미-일 동맹과 조-중동맹 등으로 전후 동북아 안보·경제 질서에 큰 영향을 줬다.

8·30 선거혁명은 '체제 순응적'인 일본 민심의 대폭발 사건

그런 점에서 자민당의 대몰락으로 나타난 이번 8.30 중의원 선거(총선) 결과는, 지난 93년 일시적 단절은 있었지만 54년 동안 유지된 55년 체제가 붕괴된 것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 언론은 일본 열도에 '민심 이반의 대지진'이 일어나고 '선거혁명의 쓰나미'가 휩쓸었다고 표현할 정도다.

자민당에 대한 민심 이반은 개혁정치를 구현하지 못한 집권당에 대한 정치 불신과 경제 불황과 저성장에 따른 중산층의 불만 표출, 사회보장·고용제도를 포함한 일본 사회의 총체적인 시스템에 대한 일본 국민들의 변화 열망이 맞물린 결과로 평가된다. 동아일보 도쿄특파원 출신으로 한일의원연맹 간사장을 맡고 있는 '일본통'인 이낙연 의원(전남 함평영광장성, 민주 3선)의 진단도 이와 다르지 않다.

"체제 순응적이고, 대세 추수적인 온순한 일본 국민의 민심이 폭발한 것이다, 이것 또한 대세 추수적인 것인지 모르겠지만. 정치적으로는 세습정치와 관료주의에 대한 염증 등 자민당의 한계에 경종을 울린 지 이미 10년이 넘었다. 경제적으로는 격차 사회(양극화)의 심화와 폐색감(閉塞感)의 축적에 따른 답답함, 중국의 비상과 일본의 답보에 따른 불안 및 상실감 등이 이번에 폭발적 양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정치 불신과 경제 불황의 영향이 가장 컸지만, '대세 추수적'이고 '체제 순응적'인 일본 국민들이 반세기여만에 변화를 선택했다는 것은 의미가 적지 않다. 체제 순응적인 일본 국민들이 사실상 '행동하는 민주주의' 역사를 처음 쓴 것이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신자유주의에 충실했던 미국 부시 행정부과 일본 자민당 내각 이후에 일본 유권자들이 이처럼 변화를 선택한 것은 일본의 안보와 국가발전을 적극 보호·지원해준 우방인 미국에서 최초의 흑인 대통령을 탄생시킨 오바마 정부의 출범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하토야마의 '우애혁명', 일본 넘어 이웃나라로 향할까

하토야마 유키오 민주당 대표(왼쪽)는 지난 6월 5일 방한해 이명박 대통령을 만났을 때 "성숙한 동반자 관계로 나아가기 위해 협력해 나가자"고 말한 바 있다. ⓒ 청와대 제공


그리고 일본 유권자들이 이런 변화를 안심하고 선택한 데는 '우애혁명'을 내걸고 '뉴재팬'의 비전을 제기한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민주당 대표의 존재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중앙일보의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는 ''새로운 일본'을 기대한다'는 제목의 칼럼(중앙일보, 31일자)에서 이렇게 진단했다.

"일본 유권자들은 하토야마의 사회자유주의적인(Social liberal) 정책 공약에 표를 던졌을 것이다. 하토야마 정부는 어린이들에게 매달 270달러의 아동수당을 지급하고, 고속도로 통행료를 없애고, 중소기업 법인세를 18%에서 11%로 내리겠다고 약속했다. 하토야마는 자신의 개혁을 우애혁명이라고 부른다. 우애(Fraternity)는 그의 조부 하토야마 이치로 이래 정치 명문 하토야마네의 전매특허다. '우애의 일본을 만들자'는 그에게 관료 주도의 정치와 결별하는 것, 시장경제와 사회적 공정·평등의 균형을 잡는 것이 우애혁명이다."

물론 벌써 하토야마와 민주당 개혁의 한계를 지적하는 얘기들도 나온다. 민주당은 원래 정치적으로 개혁성향의 자민당 분파와 사민당 일부 세력이 만든 '잡탕 정당'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낙연 의원은 "역설적으로 엄청난 변화가 아니기에 일본 국민이 민주당에 정권을 믿고 맡긴 것"이라면서 "특히 하토야마가 자민당 창당 주역의 손자이기에 더 믿고 온건한 변화를 선택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우리가 주시하는 것은 차기 총리가 확실한 하토야마의 '우애혁명'이 일본 국내뿐만 아니라 이웃나라와 해외에도 향해 있다는 점이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우애'는 어쩌면 단일민족인 일본 내보다는 이웃나라와의 공생과 선린에 더 필수조건일 것이다. 그 또한 신외교의 키워드로 ▲미국 일방외교 비중 축소 ▲아시아 협력ㆍ통합 추진 ▲북한과의 대화 확대 등 '아시아 중시' 노선을 천명한 바 있다.

그런 점에서 8·30 선거혁명은 짧게는 '55년 체제'의 붕괴이고, 길게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내걸었던 '탈아입구'(脫亞入歐)에서 124년만에 '탈미입아'(脫美入亞) 노선으로 돌아온 일대 사건으로 풀이할 수 있다.

노무현의 한미외교를 떠올리게 하는 하토야마의 미일관계

하토야마 대표는 지난 27일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 기고문에서 "이라크 전쟁 실패와 금융위기로 인해, 미국 주도의 세계화 시대는 막을 내리고 다극 체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지난 23일 TV 인터뷰에서도 "지금까지의 일본 외교는 미국의 형편에 맞추는 것이지만, 이젠 우리 의사를 강하게 주장할 수 있는 대등한 관계여야 한다"고 말했다.

민주당은 미국과 대등한 외교라는 틀 안에서 주일미군 지위협정 개정을 추진하고, 오키나와(沖繩) 후텐마(普天間)에 있는 미 해병대 비행장도 일본 내 다른 지역으로의 이동을 추진한다는 입장이다. 또 이라크주둔 다국적군 지원을 위해 인도양에서 해상자위대가 벌이는 급유지원 활동의 시한 연장을 하지 않겠다고 공약했다. 그가 구상하는 미·일 관계는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추구했던 한미 외교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하토야마 대표는 또 "동아시아와 세계평화에 기여하기 위해 한일 양국간 신뢰관계를 강화할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그는 또한 재일 한국인을 비롯한 정주외국인의 참정권 및 법적 지위향상 등에도 개방적인 입장이고, 총리의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에 반대하는 등 과거사 인식에 있어서도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 <일본 상식문답>의 저자인 조양욱 전 국민일보 도쿄특파원은 "A급 전범을 합사한 뒤로는 천황(일왕)도 못 가고 외국 정상도 안 가는 위령시설(야스쿠니신사)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면서 "민주당은 도쿄 치요다(千代田)구에 있는 치도리카후치(千鳥ヶ淵) 국립 전몰자 묘역에 제3의 추도시설을 만들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제3의 추도시설'은 2002년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정상회담 때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참배할 수 있는 제3의 추도시설을 마련하는 게 어떻겠냐'는 우리측의 제안으로 처음 제기된 바 있으며 일본 정부는 이후 계속 '검토해 보겠다'는 입장만 되풀이한 바 있다. 검토에서 행동으로 옮길 때 한중일 관계는 진정한 우애관계로 바뀔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생전에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일본이 진짜 민주주의가 아니다"면서 "(일본이 미국 덕분에) 공짜 민주주의를 몇 십 년 했는데, 이제 청구서가 와서 우경화를 달리고 있는 것"이라며 "이제라도 진짜 민주주의 하려면 우리 한국 사람처럼 고문도 당하고 그런 각오하고 해야 민주주의가 내 것이 된다"고 밝힌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일본은 이제 비로소 '정상적 민주주의'의 입구에 선 셈이다.

그는 또 "이웃한 중국 또한 경제가 크게 발전하면서 중산층, 지식인이 늘어남에 따라 이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욕구가 커지고 있다"면서 "이에 집권층 내부에서는 중국의 부패, 빈부격차는 시장경제 때문이라는 신좌파와 공산당 일당지배를 완화하고 스웨덴 같은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할 필요가 있다는 신우파의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데 후진타오 주석이 후자에 동의했다는 분석이 나온다"고 진단했다.

중국은 물론 미국 오바마 정권에 이어 이웃한 일본에서도 분배와 평등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이 때에 한반도에서는 시대의 흐름을 역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탈아입구 #탈미입아 #하토야마 유키오 #후쿠자와 유키치 #일본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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