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관급' 밥퍼 전도사의 '가리봉 연가'

김성중 전 노사정위원장 "힘들지만 행복합니다!"

등록 2009.09.03 15:27수정 2009.09.03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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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중 전 노사정위원장 가족이 '자축 밥퍼 봉사'를 마친 뒤에 환한 웃음을 짓고 있다. 오른쪽부터 큰딸 부부, 김 전 노사정위원장 부부. ⓒ 조호진


"감~사~합~니~다!"
"정말 잘 먹었습니다!"

제육볶음에다 상추쌈으로 든든히 배를 채운 이주노동자들이 무료급식소를 나서면서 하는 인사다. 연신 허리를 숙이는 재중동포 노인들뿐 아니라 한국에 온 지 1년이 안 된 지엔반뚱(26·베트남)은 서툰 한국말로, 한국 생활 10년 가까이 된 무슈르몬(44·우즈베키스탄)은 능숙한 한국말로 감사 인사를 한다.

김성중(57·전 노사정위원장) 사단법인 지구촌사랑나눔 상임고문 가족들이 지난달 30일 '외국인노동자의집/중국동포의집' 무료급식소에서 '자축 밥퍼 봉사'를 했다. '자축 밥퍼 봉사'는 결혼 등의 기념일을 맞은 자원봉사자들이 이주노동자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후원봉사 프로그램으로 30만 원을 내면 고기 반찬을 대접할 수 있다.

'자축 밥퍼 봉사'는 김 상임고문의 제안이다. 이주노동자들과 허술한 식사를 함께 하면서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결혼, 승진, 입학, 생일 등의 기념일에 어려운 이웃을 도우며 보내자는 취지로 지난 5월 시작했다. 밥퍼 전도사로 나선 김 상임고문은 노동부 재임시절 알고 지내던 언론사, 경총, 기업, 동창회 관계자들에게 권유했다. 그런데 뜻 깊은 취지에 공감한 이들이 늘면서 릴레이로 이어질 정도로 호응이 좋다.

이날 '자축 밥퍼 봉사'는 지난 6월 20일 결혼식을 치른 김 상임고문의 큰딸 김원(27·대한항공)과 이민환(35·서울대공과대연구소 연구원)씨의 결혼을 자축하는 밥퍼이다. 이날 부인 채길순(54·반도체기업 '나리지온' 대표이사)씨 등 가족 4명이 구슬땀을 흘리며 400여 명에게 점심을 대접했다.

김 상임고문 가족들은 이날 진땀깨나 뺐다. 누전으로 형광등이 차단되면서 백열등을 급히 설치하는 등 비상상황이 벌어진 데다가 환풍기가 정지되면서 수증기가 지하의 좁은 식당을 가득 채웠다. 그래도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새내기 신부와 키 큰 신랑은 환한 표정으로 밥을 푸고 반찬을 담으면서 "어려운 분들에게 식사대접을 하면서 결혼을 자축하게 돼 너무 행복하고 감사해요"라며 미소를 짓는다.

'밥퍼'와 '바뻐'로 보낸 자원봉사 1년... 돈 내고 몸 바치는 자리가 더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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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중 전 노사정위원장이 밥퍼 봉사를 하면서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다. ⓒ 조호진

지난해 7월 노사정위원장에서 물러난 김 상임고문은 퇴임 직후인 지난해 8월부터 이 단체가 운영하는 '한국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에서 임금체불과 산업재해 등에 대한 상담 봉사활동을 했다. 그런데 그만 이주노동자를 돕는 일에 깊숙이 빠지면서 '상임고문'이란 무거운 짐을 떠안았다.

'상임고문'이란 자리는 속되게 표현하면 '얼굴마담' 자리다. 정치인이나 고위관료 출신들이 대개 그렇듯이 일신의 영달을 위한 포석 차원에서 얼굴마담 노릇을 한다. 김 상임고문 또한 대충 생색내다가 슬그머니 도중하차할 '얼굴마담'일 것이란 예상도 있었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김 상임고문은 '개혁전도사'와 '밥퍼전도사'로 '바뻐'와 '밥퍼'를 연발하며 1년을 보냈다. 월·수·금은 법무법인 '태평양' 상임고문으로 일하고, 화·목·일은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보내는 주6일제 근무를 하면서 특유의 흰머리를 날리며 역삼동과 가리봉동을 오가느라 몹시 바빴다.

그는 이주노동자들에겐 '고마운 아저씨', 재중동포 사이에선 '은인'으로 불린다. 임금체불 해결은 물론이고 쉼터 및 급식소 개선에 나서는 등 이주노동자들의 고충 해결에 앞장섰기 때문이다. 이 단체가 운영하는 여성과 남성 무료쉼터는 불법건축물로 햇볕이 들지 않던 곳이다. 그런데 남녀 쉼터를 햇볕 잘 드는 4층으로 옮겼는데, 특히 지하 다락방 쉼터에서 지내던 여성들의 얼굴엔 화색이 돌 정도다.

뿐만 아니다. 30년 넘는 행정 경험으로 이 단체의 어수선한 운영방식을 뜯어 고치느라 숨이 가빴다. 일부 직원들의 반발도 있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는 직원들에게 피자를 사주면서 개혁에 동참해 달라고 구슬리기도 했지만 게으른 직원들에겐 호랑이가 되기도 했다. 궂은일로 피곤함을 자처한 것은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도움의 질을 높여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외국인노동자전용의원' 등을 운영하는 이 단체는 입원실을 폐쇄할 정도로 재정이 쪼들린다. 무보수 명예직인 김 상임고문은 매월 후원(100만 원)뿐 아니라 주변 및 지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느라 바쁘다. 김 상임고문이 관계하는 법무법인 태평양은 올해 초부터 매월 450만 원 후원과 함께 변호사를 매주 파견하여 무료 법률상담을 해주고 있으며 공익소송도 도와줄 계획이다.

'만만세운동'도 그의 제안이다. 불황이 닥치면서 수입의 기둥이었던 기업과 기관들의 후원이 크게 줄면서 운영난이 가중됐다. 그는 후원구조를 안정화시키기 위해선 개미 후원자들의 참여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취지로 아이디어를 냈는데 조직 개편과 직원 보강이 끝나는 대로 본격 추진할 예정이다. '만만세운동'은 매월 1만 원의 후원자 1만 명을 확보하자는 후원 확대 운동이다.

행복한 자원봉사자와 이주노동자 대부가 함께 부르는 '가리봉 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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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중 전 노사정위원장이 부인과 함께 밥퍼 봉사를 하고 있다. ⓒ 조호진


"정부가 됐든 민간단체가 됐든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선 반드시 반발이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노동부 관료로 30년 넘게 일하면서 각종 개혁에 앞장선 경험이 있지만 민간단체에선 또 다른 어려움이 있더군요. 개인적인 영달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주노동자들의 삶을 개선시키자는 것이었는데도 일부 직원들이 반발하며 협조하지 않을 때는 야속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김해성 대표와 대다수 직원들의 협조 덕분에 개혁의 성과가 나타나고 있어 다행입니다."

이 단체의 개혁전도사로 보낸 1년의 소회이다. 김 상임고문은 어떤 일이든 일단 손을 댔다면 매듭짓는 성격이다. 전체 직원들에게 조직개혁에 대해 브리핑하고, 우수한 사회복지기관들을 견학하기도 하고, 직접 줄자를 들고 쉼터를 드나들면서 개선방안을 짜냈다. 1년에 걸친 개혁 추진으로 열악했던 쉼터는 개선됐고, 급식소는 공사를 앞두고 있으며, 직원들은 바뀌었다.

"습한 지하 쉼터에서 햇살 잘 드는 곳으로 옮겨드렸더니 재중동포 노인들이 '지옥에서 천당에 온 기분'이라며 제 손을 잡고 울먹이더군요. 조국에 왔다가 이방인처럼 냉대 당하는 것을 보면 가슴이 아픕니다. 낯선 땅에서 배곯는 이들에게 고기반찬을 대접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제안했는데 '자축 밥퍼 봉사'에 참여한 분들 모두 행복해 하더군요. 세상에서 받은 혜택의 일부나마 나누며 살 수 있다면 그 인생은 행복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김 상임고문의 행복한 인생관이다. 고위관료에서 낮은 자리로 내려온 그는 제2의 봉사 인생에 열정과 헌신을 쏟아붓고 있다. 한쪽 눈으로만 보면 사서 고생하는 일이다. 하지만 행복하다. 쓰러진 이들 일으켜 세울 수 있으니 행복하고, 허기진 이들에게 고기반찬을 대접할 수 있으니 행복하고, 이주노동자와 다문화가족들에게 친한(親韓) 감정을 심어줄 수 있으니 행복하다.

이 단체 대표를 맡고 있는 김해성 목사는 당뇨와 간질환 환자다. 병원과 무료 쉼터 등의 운영난에 지쳐 건강이 더 악화되곤 하는 그에게 김 상임고문이 구원군처럼 나타나서 손을 잡아준 것이다. "김 상임고문의 수고가 어떤 치료약보다 더 건강을 회복시켜주고 있다"는 김 목사는 모처럼 밝은 표정을 지으며 이런 각오를 털어놓는다.

"어떤 분들은 '어떻게 이런 곳에 사람을 살게 하느냐' 비난하기도 하고, 어떤 분들은 '화재나 폭발사고가 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느냐'고 우려하기도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돈은 없고 오갈 데 없는 이주노동자들은 몰려들고, 반찬값조차 없어서 가락시장에서 야채를 얻어다 먹여야 할 형편입니다. 그런데 김 상임고문이 용기를 북돋워주어서 쉼터와 급식소를 개선할 수 있게 됐습니다. 단체 운영이 너무 힘들어서 어떤 때는 주저앉고 싶을 때도 있었는데 이젠 희망이 솟고 있습니다. 이주노동자들과 다문화 가족들을 돕는 일이 더 힘차게 진행될 것입니다."

이주노동자의 대부로 불리는 목회자와 퇴임 이후 낮은 곳으로 내려온 고위관료 출신 자원봉사자가 함께 부르는 '가리봉 연가', 그 합창으로 인해 찌들고 누추한 가리봉 이주노동자들과 다문화 가족들의 얼굴에 웃음이 깃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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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고기반찬에다 상추쌈으로 모처럼 허기를 채운 이주노동자들의 표정도 행복했다. ⓒ 조호진


#이주노동자 #자원봉사 #밥퍼 #노사정위원장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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