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도서관장, 주부 그리고 기무사 사찰대상자

일본 민족학교 아이들과 꾸는 꿈이 죄가 되는 세상

등록 2009.09.04 12:33수정 2009.09.04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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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내가 운영하고 있는 사립 어린이도서관인 숲속작은도서관이 회원도서관으로 소속되어 있는 한국어린이도서관협회 사무국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일본에 재일동포들이 우리말을 배우고 있는 '민족학교'라는 곳이 있는데 우리말 교육에 필요한 어린이책들을 좀 보내주면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거 같다고 하네요. 그냥 책만 보내기보다는 그 학교가 어떤 곳인지 도서관 관장들이 한 번 방문해보면 어떨까요? 같이 가시지 않을래요?"

그것이 시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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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즈오카조선초중급학교 도서실에서 우리 그림책을 들고 기뻐하는 아이들 ⓒ 백창화


그해 9월, 어린이도서관 관장 7명은 처음 일본에 가서 민족학교 세 곳을 방문했습니다. 시즈오카조선초중급학교, 도요하시조선초급학교, 아이치조선중고급학교. 4박5일 내내 우리는 참 많이 울었던 거 같습니다. 어른이 되고 나서… 누군가와 큰 이별을 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눈물이 복받치고 서럽고, 슬프고, 마음 아프고… 그리고 기쁘고… 이토록 몇 날 며칠을 울며 보낸 날이 얼마나 있었을까요.

'재일본 민족학교'는 저와 이렇게 처음 인연의 끈을 맺었습니다.

한국에 돌아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언가 찾았습니다. 먼저는 그곳 아이들이… 일본 땅에서 태어나 일본인의 모습으로 살지만 한민족임을 잊지 않으려… 우리 말을 배우고, 우리 글을 배우고, 우리 역사를 배우는 그 아이들의 똘망똘망한 눈망울에 답하고 싶었습니다.

출판사들을 돌아다니며 아름다운 우리 말과 그림이 수려한 우리 그림책과 동화책들을 후원받았습니다. 60-70년대 일본 책들만 적당히 꽂혀 있는 학교의 낡은 도서실에 언제나 우리 아이들이 가까이 볼 수 있도록 좋은 우리 책들을 꽂아주고 싶었습니다.


그 책들을 직접 만든 그림책 작가 선생님들을 모시고 가서 그들 말에 의하면 '본토 발음'으로 우리 그림책을 읽어주고 싶었습니다. 우리 노래를 함께 부르고 싶어서 가수도 초청했습니다. 너무나 어렵다는 한글의 정확한 발음과 문법에 대한 그곳 선생님들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한글을 연구하는 교수님에게도 도움을 부탁했습니다.

추석이 무엇인지 모르고, 송편이 어떤 떡인지 모르는 아이들을 위해 우리 전통놀이도 함께 하고 서울에서부터 쌀가루와 떡시루를 들고 가 아이들과 함께 송편도 만들어 먹으며 우리 전통과 문화를 나누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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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찌조선중고급학교 한반도 통일지도를 그리고 있는 중급부 학생들 ⓒ 백창화


이 모든 활동을 하는 데는 많은 돈이 필요했지만 어린이도서관에는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문화예술위원회와 서울시에 민간단체 보조금지원사업 프로젝트를 신청했지요. 사업 내용이 너무 좋다고 하여 두 단체에서 모두 3년 연속 보조금을 지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서울시에서는 2007년과 2008년 두 해 연속, 민간단체 서울시 시정 참여사업에 '우수 사업'으로 선정돼 성과를 인정받기도 했습니다.

우리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 민족학교 어린이들과 학부모들은 국립박물관, 경복궁과 한옥마을 등을 견학하며 생전 처음 밟아보는 '조국'이라는 이름의 이 땅과 하늘,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서울의 모습을 직접 보며 얼마나 즐거워했는지요.

그동안 일본에서 쓸모도 없는데 열심히 배워두었던 우리 말이 한국에 오니 얼마나 유용한지요. 저마다 일본에 돌아가면 우리말 공부를 더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이 대단했습니다.

실제로 한 해 한 해 만남이 거듭될 때마다 그들의 우리말 실력은 월등히 높아졌고 학부모들 중에는 우리 정부에서 실시하는 '한국어 인증 자격증' 시험에 도전하는 이들도 늘어갔습니다.

2009년입니다. 눈물로 시작했던 만남이 기쁨과 웃음, 화합과 우정으로 쌓여가고 있는 교류 5년째입니다.

8월 14일, 우리는 뜻밖의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기무사의 한 대위가 저를 비롯한 민족학교 방문자들, 방문교류활동의 내용을 샅샅이 추적하고 감시했던 사찰 내용이 담긴 수첩이 발견되었다는 것입니다. 수첩 속에는 지난 1월 8일부터 11일까지 우리의 모든 행적을 밀착 추적 감시한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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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 민족학교 이야기 '버스를 타고 전차를 타고' ⓒ 백창화

협회는 한국에 민족학교의 존재를 좀 더 잘 알리고, 그동안의 우리들의 교류 과정을 자세히 담아 사진집을 발간했습니다. <버스를 타고 전차를 타고>. 그 책의 출판을 기념하기 위해 혜화동의 한 카페에서 모임을 가졌더랬습니다.

그동안 협회와 함께 민족학교를 방문하고 교류해왔던 분들, 어린이도서관 운영자와 동화작가, 출판인, 문화예술계 분들 70여 명이 모인 자리였습니다. 그 자리에 참석했던 이들 중에 10여 명을 집중 사찰한 내용이었습니다.

기무사 대위의 수첩에는 카페에서 제가 몇 시에 그곳을 나와 어디로 이동했는지 적혀 있습니다. 다음날, 제 아들의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잠시 견학 갔던 지방의 한 대안학교 이름과, 그곳 교장의 활동 내용까지 적혀 있을 정도로 사찰은 치밀하고 집요했습니다.

저는 그냥 웃음만 나옵니다. 저는 우리 아이들이 책과 문화가 숨쉬는 공간에서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사립 어린이도서관을 만들고 운영하는 어린이도서관 운영자입니다. 우연히 만나게 된 일본의 민족학교 아이들이 바로 우리 도서관에 매일 들러주는 그 아이들과 너무도 똑같이 사랑스럽고 귀하게 느껴져서 그 아이들과도 우리 책과 우리 문화를 나누고 싶었을 뿐입니다.

한국에서 살면서 우리 말의 귀함을 모르고 우리 문화의 소중함을 알지 못하는 내 아들에게 이국 땅에서 저렇게 어렵게 우리말을 지켜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 아이들과 우리 아이들이 격의없이 한데 어울려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 한국과 일본 사이에, 한국과 북한 사이에, 그리고 한국과 전 세계 사이에 벽은 무너지고 경계는 사라져버리는 아름다운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고….

그런 꿈을 꾸었습니다.

2009년.
나는 지금 이런 꿈을 꾸는 일이 죄가 되는 세상에 살고 있는 걸까요?

세상을 향해 품어본 도서관 선생님들과 작가, 출판인들이 함께 꾸었던 이런 꿈이 국군 기무사에 의해 감시당하고, 미행당하고, 사찰당해야 하는 일인 것일까요?

도서관에서 아이들과 함께 소박한 정을 나누고, 가족들 앞에선 평범한 아내요, 엄마이던 한 사람의 일상이 2009년 여름, 갑자기 흐트러져 버렸습니다.

내 이름은 어린이도서관 관장. 아내이자 엄마. 한 가정의 주부. 이제 그 뒤에 하나의 꼬리표가 더 달라 붙었습니다.

기무사 사찰대상자….

나는 누구일까요? 그들이 부르는 나의 또다른 이름은 과연 무엇일까요?
슬프고, 황망하고, 어이없고… 분노하며… 그저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 봅니다.
나의 부끄러움을 위해서….
#기무사 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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