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락 성장소설] 하늘을 나는 돛단배 - 제17회

우리들의 모듬살이를 위하여(1)

등록 2009.09.14 10:29수정 2009.09.14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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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아, (치지지, 치지지지직…) 주민…(치직…똑, 땡, 뚜그르르…)…여러분에게…안내 말씸을(치직…)…디리겄습니다이…오늘…(칙칙)…앗다 어째서 마이크가 요렇게(똑, 딱, 땡그렁…)…가호당 두 사람쓱…(칙칙, 삐이이잉…) 어허, 요놈의 앰뿌가 뭔 지랄이라냐(치지직…)…해우하고 미역 비러 나오시요 이(치직)."

새로운 문명을 도입하여 실용화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느 때 부턴가 우리는 마을 이장의 거추꾼으로 일하던 윤식이 아버지가 야윈 목에 퍼런 핏줄을 뻗대며 내지르던 그 정겨운 '욋소리'를 다시는 들을 수가 없었다. 마을에 확성기가 들어온 것이었다. 동각의 방안에서 이장이 앰프의 스위치를 올리고서 밥상머리의 자기 부인에게 건네듯 작은 목소리로 뱉어내는 말들이 도깨비처럼 부풀어서 마을 구석구석에 쩌렁쩌렁 울려 퍼진다는 것은 참말 경이로운 일이었다. 그런데, 걸핏하면 고장이 나는 게 문제였고, 음량이 제대로 조절되지 않으면 깨 볶는 소리에다 아궁이에서 마른 콩대 타는 소리가 나기 일쑤였다. 거기 더하여 '삐이이' 하는…쇠솥바닥을 양철조각으로 긁어대는 것 같은 소리가 온 마을 사람들의 소름을 돋아나게도 하였다.  


그 즈음 나는 낚시질에 재미 들려 있었기 때문에 사리 때에는 만사 젖히고 바다로 내달렸다. 산으로 논으로 밭으로 나를 쉼 없이 내몰아서 어린 나의 노동력을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데에 도통하였던 어머니도, 내가 첫 출조에서 전문 낚시꾼들도 잡기 어렵다는 감성돔을 채 올린 사건 이후로는, 감히 나의 '낚싯길'을 가로막지 못 하였다.

"가자. 오늘 미역도 하고 해우도 한다 안 하냐."

모처럼 세 식구가 함께 나섰다. 어머니는 갈퀴와 바구니를, 그리고 아버지는 낫과 바지게를 챙기고서 갯가로 향했다. 나도 낚시도구들을 갖추고서 따라 나섰다. 그러니까 이장이 확성기에다 대고 방송했던 내용을 알기 쉽게 정리하자면 이러하다.

"주민 여러분께 안내말씀 드리겠습니다. 오늘 김과 미역을 채취할 것이니 집집마다 두 사람씩 갯바탕으로 나오세요!"

한 집에 두 명씩 나와서 여자는 갯바위에서 김을 채취하고 남자는 미역을 채취하도록 개포를 개방하겠다는 것이었다. 해태(海苔)라고도 부르는 김을 그곳 사람들은 '해우'라고 했다. 갯바위가 입는 바다(海)의 옷(衣)이라는 의미의 '해의'에서 변용된 말인 듯하다. 김이나 미역을 어느 때나 마음대로 채취하도록 하면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특정한 날을 잡아서, 인원도 호당 한 사람씩으로 한정해서 채취하게 하는 것이다. 고동을 잡고 굴을 따고 파래를 뜯고 낚시질을 하는 것이야 언제든 허용되지만 김, 미역, 톳 등의 주요품목은 마을에서 엄격하게 관리함으로써 고르게 분배될 수 있게 했던 것이다.


어촌 주민들에게 가장 큰 재산은 개포, 즉 그 마을 사람들만이 해산물을 독점적으로 채취할 수 있는 해안선이다. 더군다나 당시에는 미역과 김을 양식장을 설치하여 대량생산하는 기술이 도입되지 않아서 갯바위에 붙어 있는 것만을 채취하였기 때문에, 개포의 중요성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마을과 마을의 해안경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이냐를 놓고 양쪽 주민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기도 하고, 멀리 바다에 떠 있는 무인도가 어느 마을 소속이냐를 두고 송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면소재지가 있는 이웃 섬 평일도에서 벌어졌다는 '칠기섬 분쟁'이 좋은 사례라 할 만하다. 어느 여름 날, 옛날 얘기를 해달라는 내 성화에 아버지는 이제 얘깃거리가 다 떨어졌다면서 바로 그 '칠기섬 분쟁'에 관한 얘기를 들려주었다.


원래 '칠기'라고 하는 그 섬은 나무도 없고 풀도 없고 도팍만 앙상한 바우섬이었그등. 그랑께 인근 마을들에서 아무도 '그거이 우리 동네 섬이다' 이렇게 주장을 안 했든 것이여. 그란디 그 무인도에 가서 조사를 해봉께 해우며, 미역이며, 톳 같은 해초가 겁나게 많드란다. 그사실이 알려징께 그 주벤에 있는 4개 마을에서 서로 '우리 섬이다!'하고 나선 것이여. 각 마을 이장들은 그 섬을 즈그가 차지할라고 돈 보따리를 싸들고 육지 관청을 뻔질나게 왔다갔다 했는디 아, 심판을 내레줘야 할 부사(府使)라는 작자는 돈은 돈대로 받어 묵고 시간만 질질 끎시롬 도대체 판결을 안 내레 주는 것이여. 그래서 어느 날 관청에 갔다 오든 길에 이장들이 타합을 한 것이제.

-앗다, 이라다가는 송사비용 땀세 우리 4개 마을이 모두 망하게 안 생게부렀소. 그랑께 오늘은 뭔 수를 쓰든지 겔판을 내고 갑세다.
-좋은 방법이 있겄능가? 뭔 수로 겔판을 내자는 것이여?
-쩌그 잔등너메 풀밭에서 우리 이장들끼리 돌림판으로 씨름을 해갖고 이긴 사람이 칠기섬을 차지하도록 하면 어짜겄소? 
-씨름? 그거 좋제. 그렇게 하자고.
그렇게 해서 칠기라는 그 섬을 상품으로 걸어놓고 이장 니 사람이 한바탕 내기씨름을 했든 것이여. 겔국 도장리 마을 이장 조 씨가 일등을 해갖고, 시방 칠기섬은 도장리 소속이 돼부렀당께. 

아마 모르긴 해도 우리나라 씨름대회 역사상 우승자에게 돌아가는 부상(副賞)치고는 그 네 마을 이장들이 리그전으로 붙었던 그 씨름 시합의 상품이 가장 거창한 것 아니었을까.

낚시질 삼총사인 우리(희원이와 종석이와 나)가 호미로 갯지렁이를 파는 사이, 아직 미역밭에 물이 안 났으므로 남자 어른들은 갯바위에 둘러앉아 이런 저런 동네일을 토론하였고, 김밭에는 어지간히 물이 났으므로 여자 어른들은 갈퀴로 김을 따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란디 참 이상해."
호미질을 하다가 종석이가 대뜸 남자 어른들 쪽을 힐끗 건너다보고서 말했다.
"뭣이?"
"동네에서 미역 비러 나오라고 할 때 '온 짓'이네, '반 짓'이네 정해 논 것 말이여."
"아, 아무리 일을 많이 해도 시무 살이 안 되면 반 짓이고, 일을 안 하고 도팍에만 앙저 있어도 늙은 사람들은 온 짓으로 받어 묵는 것, 그것 말이제?"
"맞어. 야, 선호 나는 어치케 생각해?"

종석이와 얘기를 주고받던 희원이가 내 의견을 물어왔다. 온 짓은 '온전한 한 몫'이고 반 짓은 '절반의 몫'이다. 동네에서 공동으로 미역을 채취하는 날이면 가호마다 한 사람씩의 남자가 바닷가에 나가야 하는데, 열아홉 살 이하의 미성년자가 나가면 미역을 분배할 때 절반의 분량밖에 받지 못한다. 가령 열아홉 살 된 사람이 나가서, 바닷물을 온통 뒤집어쓴 채 첨벙거리고 다니면서 미역을 베고 그 미역을 공동 분배장소로 져 나르고 하느라 아무리 된 고생을 하더라도, 결국 그가 분배받는 몫은 성인들이 받아가는 분량의 반밖에 되지 않았다. 반면에 일흔 살 노인은 갯바위에 올라앉아서 고무신에 바닷물도 적셔보지 않고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따위 괜한 잔소리만 늘어놓고서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했는데도 온 짓을 받았다. 종석이와 희원이의 불만은 그것이 불합리하다는 것이었다.

"그래도…철구 즈그맹킬로 아부지가 죽고 없는 집은 국민학생 철구가 나와서 미역을 비어도 온 짓을 다 주는디?"
"맞어. 그것은 좋은 일이여."
"시무 살 안 된 사람이 나오드래도, 즈그  아부지가 몸이 아퍼서 못 나온다고 미리 이장한테 말을 하면 그 집은 또 온 짓을 다 주그등. 그라고 나이가 아조 많은 사람은…일을 안 해도 그만하게 대접을 해주는 거이 맞는 것 같기도 한디…."
"그래도, 열야닯 살이나 열아홉 살 묵은 사람이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반절밲이 안 주는 것은 나는 반대여. 그것은 평등한 거이 아녀."
"듣고 봉께 그 말도 맞는 것 같다야."

나는 종석이, 희원이와 함께 그런 얘기를 나누면서 나 스스로가 대견하다 느꼈다. 어머니 치맛자락만 붙들고 어리광 부리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 사이에 어른들의 마을 공동체 운영에 관한 문제점들을 도마에 올려놓고 갑이다 을이다 따질 만큼 철이 들어버렸으니!
"종석이 너가 후제 이장이 되면 맘에 안 든 것은 고치고 그라면 되겄네."
"선호 너가 하제 왜 나한테만 하라고 그라냐?"
"나는…대통령 될 것잉께, 그랄라면 쩌그 웃녘으로 나가서 일단 출세를 해야 하그등."
"뭣이여? 하하하…"

우리는 낚싯대를 들고서 각자 방향을 달리하여 볼락 낚기에 나섰다. 이제는 나의 낚시질에도 이력이 붙어서 어느 바위 어디쯤에 자리를 잡고 어느 구덩이에 낚싯줄을 드리우는 게 유리하다는 것을 웬 만큼 꿰고 있었기 때문에 희원이나 종석이와 붙어 다닐 필요가 없었다.

"물었다!"
건너편 갯바위에서 종석이가 외쳤다. 제법 큰 볼락 한 마리가 공중에서 원을 그리며 뱅글 돌았다. 얼마 뒤에는 희원이 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나에게도 몇 번의 입질이 왔으나 번번이 잇갑만 따먹히고 말았다. 다시 낚시를 담갔을 때 무엇인가 묵직한 것이 걸린 듯하여 잡아 올렸다.

"어어? 기다!"
몰밭에 사는 커다란 게 한 마리가 몰밭 위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게 다리 하나가 아슬아슬하게 낚시에 걸려 있었다. 나는 조심조심 낚싯줄을 당겨 드디어 게를 바위 위로 끌어올리는 데 성공하였다. 그렇게 큰 게를 더군다나 낚시로 낚아 올리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나는 고놈을 망태에 넣었다. 

볼락 세 마리에다 열기 한 마리를 낚았다. 썰물이 져서 바닷물이 저만치 내려가 있었다. 바위에 올라서서 바라보니 미역을 베고 김을 채취하는 마을 사람들로 인하여 바닷가 전체가 무슨 짐승처럼 굼틀대고 있었다. 배가 고팠다.

"지왕님 아니, 용왕님, 나 없는 사이에 또 강세나 한 마리 물게 해주십사."
낚싯대를 갯바위에 내려놓고 아래쪽으로 내려왔다. 우거진 바닷말을 살그머니 옆으로 젖혔다. 해삼 똥이 기다랗게 뻗쳐 있었다. 진짜 똥이 아니라 해삼이 모래나 갯벌을 삼켰다가 양분을 섭취하고 내놓은 흔적이었다. 그 해삼 똥을 따라가자 아니나 다를까 제법 큰 해삼 한 마리가 있었다.

"흐흐흐, 잘 됐다."
난 해삼의 한 끝을 입으로 베어낸 다음 창자를 꺼냈다. 그 창자를 쭉 훑어서 내용물을 빼내고 바닷물에 헹군 뒤 후루룩 입안에 넣었다. 고소하기가 깨소금 같았다. 이번에는 아직 살아 굼틀거리는 해삼 몸뚱어리를 베어 먹기 시작했다. 

"앗다, 선호 너 해심 한 마리를 참 알뜰하게도 묵는다 이."
깜짝 놀라 돌아보니 수길이 작은어머니가 내 쪽을 바라보며 씽긋 웃고 있었다. 아마도 내 가 해삼창자를 훑어서 먹는 모습까지 모두 지켜본 모양이었다. 조금 창피했다. 해삼을 먹는 것은 창피해 할 일이 아니었으나, 집에 가져가서 식구들과 나눠 먹지 않고 혼자 먹어 치운 것은 아주 조금 창피한 일이었다. 하지만 보나마나 재주가 좋은 어머니가 토방마루에다 갯바구니를 쏟아놓으면 해삼이며 군소며 소라 따위가 줄줄이 쏟아질 것이기 때문에 동생들 몫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나는 낚싯대를 두고 온 곳으로 건너가려다 말고 갯바위에서 김을 뜯고 있는 수길이 작은어머니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그거…샌북 껍데기 갖고 온 것 알면 큰일 날 것인디…."
전복 껍데기로 갯바위의 김을 박박 긁어 채취하던 수길이 작은어머니가 화들짝 놀라 그것을 바구니 속에 얼른 감추었다. 
"누구한테 말하면 안 돼 이."
그래도 내가 바구니 쪽으로 향한 눈길을 거두지 않자,
"알었다. 쩌그다 땡개불란다."

수길이 작은어머니가 전복 껍질을 깊은 바다에 던져 버렸다. 미역이나 톳은 공동으로 채취해서 공평하게 분배를 할 수 있었지만, 갯바위에서 뜯는 김은 그렇게 할 수 없었으므로 한 집에 여자 한 사람씩만 나와서 재주껏 채취해가라 하였다. 따라서 손재주가 좋고 바지런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채취한 물량에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름으로 규칙은 있었다. 김을 채취하는 도구로 갈퀴만을 사용해야 한다는 규칙이 그것이었다. 생일도에서는 썰물이면 전복이 심심찮게 잡혔는데 속살을 먹고 난 그 전복 껍데기는 여러모로 쓸모가 있었다. 무엇보다 가마솥 밑바닥에서 누룽지를 긁을 때 그 보다 더 좋은 도구가 없었다. 

그런데, 그 전복 껍데기를 김을 채취할 때 숨겨 갖고 가는 여자들이 더러 있었다. 남들이 갈퀴로 뜯을 때, 몰래 전복 껍데기로 박박 긁어버리면 그 바위에서는 그 해 겨울의 김 소출이 그걸로 끝이었다. 따라서 전복껍질로 김을 채취하다가 개포 관리를 책임 맡은 '주비장'에게 발각되면 바구니 째로 압수당하는 벌칙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수길이 작은어머니가 그러한 공동체 구성원간의 약속을 어긴 것은 아주 잘 못 한 일이었다. 하지만 전복껍질을 바닷물에 던져버리는 그 모습에 나는 감동을 받았다. 내가 부쩍 어른이 된 듯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배가 고팠으므로 물속에서 하늘거리는 미역 한 가닥을 뜯었다. 그리고 바위틈에 널려 있는 성게 한 마리를 잡았다. 위쪽으로 달려가 흐르는 민물에다 미역을 헹궈서 소금기를 씻어내고 성게를 반으로 쪼갰다. 노란 성게 알을 손가락으로 꺼내 미역위에 올린 다음 상추쌈을 하듯 뭉뚱그려 입안에 밀어 넣었다. 볼이 미어질 것만 같았다.

처음 미역을 씹을 땐 약간 텁텁했다가 성게 알이 섞이자 고소하고 달콤하였다. 꿀꺽 삼켰다. 훌쭉하던 배가 볼록 일어나는 기분이었다. 행복하였다. 그러나 한편 걱정이 되었다. 훗날 출세를 위해 윗녘으로 나가 산다면 바로 이 행복은 포기하고 살아야 할 터인데…그것이 큰 걱정이었다.

갯돌 밭 한 쪽에 미역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시방 우리 동네 전체 호수가 쉰네 가호잉께 요놈을 54등분해야 한다 이 말이여. 자, 우선 미역을 한 바구리 담어 보드라고."
"저울 어딨어, 저울 갖고 와!"
"한 바구리 담었으면 일단 저울에 달아서 멫 근이 나가는지 보라고."

미역 분배가 시작되었다. 미역 한 바구니를 담아서 저울에 달아 기준 무게를 정하고, 그 무게만큼의 미역을 계속 저울에 달아내었다. 젊은 사람들이 달려 다니면서 저울에 단 미역 바구니를 갯돌 밭 위에 줄을 맞춰서 한 무더기씩 쏟았다. 한 바구니씩 쏟아 부어서 쉰네 무더기를 만들었는데도 아직 미역이 남았다. 그럼 이번에는 또 어느 분량만큼 달아서 추가로 분배할 것인지를 정해야 했다. 그렇게 해서 그야말로 콩 한 쪽이라도 공평하게 돌아가도록 나눠 가지는 것이었다. 집에 성인 노동력이 있음에도 미성년자가 채취 작업에 나온 경우 '반 짓'만 주도록 규정돼 있었으나 그 날은 다행히 그런 사람이 없었다. 

"자, 자, 모다들 입이 궁금항께 요놈 한 깍지는 엿을 바꿔서 한 입씩 물고 일을 하드라고."
희철이네 형이 아직 분배하지 않는 마을 공동의 미역 무더기에서 한 아름을 안아다가 엿장수에게 건네주었다. 어떻게 알고 오는지, 미역을 베는 날이면 어김없이 육지에서 엿장수가 객선을 타고 섬으로 건너와 바닷가로 내려왔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붉은 엿 한 덩어리씩이 분배되었다. 찌그러진 양은냄비나 떨어진 고무신을 찾으려고 부산을 떨지 않고도 우리가 맛난 엿을 공으로 먹을 수 있는 때가 바로 미역 베는 날이었다. 엿을 더 사고 싶은 사람은 이제 자기 몫으로 분배받은 미역을 주고 사면 될 것이었다.

"자, 요놈을 저녁에 좃아놔야 낼 아침에 발장에 떠서 몰릴 것 아니오."
어머니가 식칼과, 도마와, 민물에 씻은 김을 담은 양푼을 가지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바다에서 채취해온 김을 잘게 부수는 기계가 들어온 것은 훗날 양식을 하면서 부터이고, 돌김 밖에 없던 시절에는 일일이 손으로 다져야 했다. 아버지가 젖은 김 한 줌을 집어 도마에 놓더니 식칼로 다지기 시작했다. 김 무더기를 뒤집어 가면서, 혹은 방향을 바꿔 가면서….

'따다다다다…'
아버지의 칼질 솜씨는 인정해줄 만 했다. 그러나 빠르긴 한데 좀 거칠었다. 더러 젖은 김 부스러기가 농짝으로도 튀고, 벽에 붙여놓은 달력 속의 국회의원 얼굴에도 튀고, 일찍 잠이 든 동생 선유의 볼따구니에도 날아가 붙었다.

나는 부러 밖으로 나와 마당에 섰다. 은은하게 들려오는 파도 소리, 집집마다에서 새어나온 도마질 소리, 그 소리들이 팽나무 우실에 부딪쳐 만들어내는 정겹고도 교묘한 화음을 감상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드는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그래, 나는 혼자가 아니여!'
#돌김 돌미역 #공동생산 공동분배 # 확성기 #볼락 #엿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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