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남이면서 14번 제사 도맡았던 아버지의 '사과'

[추석진담③] 칠순 넘어서야 어머니께 "욕봤네"..."부모님, 저도 사랑합니데이"

등록 2009.10.02 10:27수정 2009.10.02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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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버지는 4남 2녀 중 셋째아들이다. 위로 형님이 두 분 계시지만 아버지가 제사를 직접 모신다. 내 아버지지만 참으로 '독특하신 분'이다.


1년에 제사를 무려 14번 지내고, 부모님, 그러니까 나에게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되시는 두 어른 모두 다 중풍으로 자리보전하신 6년 동안 얼굴 한 번 안 찡그리고 대소변을 다 받아내신 그런 분이다.

그런 내 아버지가 남들이 볼 때는 효자일지 몰라도 어머니한테는 또 한 분의 시아버지나 다른 없었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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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추석 차례상 1년에 14번이나 그것도 셋째아들이면서도 내 아버지는 제사상을 정성스럽게 고집스럽게 차리셨다. ⓒ 서정삼


3남이면서 연 14회 제사 도맡았던 아버지

하지만 이제 아버지 연세 76세, 어머니도 71세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할머니 연세쯤 되신 거다. 체구도 작아지고 한 해 한 해 기력도 예전같지 않으니 세월의 무게는 어쩔 수 없나보다.

1주일 전 둘째 큰아버지님이 돌아가셨다. 시골서 올라오신 두 분을 모시고 병원 영안실로 향했다. 문상을 하고 난 후 큰어머님과 집안 식구들이 모인 음식상에서 자연스레 이야기가 오갔다.


"우리 저 양반은 매일 술만 자시고 나한테는 큰소리만 펑펑 치다 가셨는데 자네는 정삼이 애비 만나 호강하고 잘 살았제?"

큰어머니가 어머니한테 하시는 말씀이다.

"호강은 무신 호강을요. 저 사람도 매일 술입니다. 나이도 있고 이제 기력도 없을 텐데 허구한 날 하루도 안 빠지고 술이네요."

"그래도 삼촌은 인물도 훤하고 살면서 속 안 썩혔으니 자네야 서씨 집안에 시집 잘 왔지 뭐."

"형님도 참 시집을 오긴 뭘 잘 와요. 얼굴도 함 못 보고 덜컥 어른들 시키는 대로 와서 고생만 죽도록 했는데…."

어머니 얼굴에는 지난 세월, 그것도 위로 큰집 형님이 두 분이나 계셨음에도 부모 모시고 제사까지 챙겨야 했던 회한의 그림자가 지나가는 듯하다. 큰어머니도 딴에는 위로라고 하시려던 말씀이 이상하게 아버지 편을 든 것처럼 되어 분위기가 어색해지려는데 갑자기 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허허 이 사람 고생 많이 했죠. 나 만나 촌에서 한평생 농사나 짓고... 그런 의미에서 내 잔 한잔 받게. 욕봤어. 고생했고. 그리고 인물이야 나보다도 이 사람이 더 낫죠. 허허허."

칠순 넘어서야 어머니에게 "고생했네, 욕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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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버지... 온 산천이 들먹거릴 정도로 기운펄펄하던 어른이 어느덧 칠십을 훌쩍 넘겨 버렸다. ⓒ 서정삼


순간 난 내 눈과 귀를 의심했다. 아니 아버지 입에서 저런 말씀이 나오다니 이건 한 마디로 천지개벽이다. 홍해 바다가 갈라지고 신천지가 도래한 것이나 다름없다. 나이 오십인 자식 앞에서 스스럼없이 어머니를 아닌 밤중 고공비행 시키시다니 아이고야 울 아버지도 이제 나이를 많이 잡수셨는갑다.

사실 내 기억 속 아버지의 존재는 늘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세하신 군주였다. 괜한 일에도 성을 잘 내셨다. 큰소리 한번 지르면 동네 담벼락이 다 무너지고 자던 애도 경기가 들릴 정도였다. 집에 돈 한 푼 없어도 아버지는 늘 하얀 와이셔츠 포켓에 돈이 다 비치도록 하고 다니셨다. 그러니 당연히 술값은 아버지 몫.

그렇게 나가서는 늘 사람 좋다는 소리를 들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가 야속하고 원망스러웠다. 그런 아버지가 아무리 입술에 술이 발렸더라도 감히, 어떻게, 왜, 무엇 때문에 저럼 말씀을 하시게 된 걸까.

살아생전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다정한 말 한마디 건네는 아버지에게서 그 순간, 무한한 연민과 지나온 삶에 대한 회한을 발견했다. 위로 두 분을 차례대로 보내셨기에 더더욱 그리 보였나보다.

아버지, 어머니 사랑합니데이~

남자들은 나이 먹고 힘없으면 다 어린애가 되고 조강지처 치마 폭 속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뭐 그래서 아버지가 그런 말을 하셨으리라 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10년만 젊었어도 아버지와 이혼했을 거라던 어머니도 아직 이혼 안 하고 잘 사신다.

추석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얼마나 더 많은 추석을 같이 보내실 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내 기억 속에서는 아직도 40대의 펄펄하던 아버지 모습과 천생 조신한 맏며느리 같던 어머니 얼굴만 살아 움직인다.

아버지, 어머니~. 아버지는 술 좀 덜 잡수시고 어머니는 누가 데려갈 사람도 없고, 이혼 시효도 늦었으니 아버지하고 싸우지 말고 잘 지내소. 하루 보름달인지언정 추석 보름달처럼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두 손 모아 빕니다.

"아버지, 어머니 사랑합니데이."
쑥스럽지만 저도 처음으로 해봅니다.
#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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