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함마드는 여성할례 가르친 적 없다

이슬람사회, 양성평등정신 무시하고 여성인권 유린 일상화

등록 2009.10.05 09:40수정 2009.10.05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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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여성 히잡을 쓴 이슬람여성들이 아이들과 함께 거리를 걷고 있다. 이슬람사회에서는 여성의 얼굴과 몸을 히잡이나 챠도르로 가리도록 하고 있다. ⓒ 백찬홍


바지 입고 맥주 마셨다는 이유로 처벌받는 이슬람 여성

지난 9월 28일 영국의 BBC뉴스 인터넷 판은 이집트의 한 대학교수가 많은 이집트 여성들이 결혼 첫날밤 처녀임을 증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처녀성 위장도구 수입업자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도록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이집트 알-아자르 대학 압둘 모티 바요우미 교수는 이 위장도구가 성교시 자동으로 피를 흘러내리게 해 성경험이 있는 여성들이 처녀처럼 행세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이슬람사회가 악으로 물들고 하고 있다고 강하게 비난했다. 일부 국회의원들도 그의 주장에 동조해 수입금지를 추진하고 있다.

중국산으로 알려진 이 도구는 수백 달러의 비용이 소요되는 처녀막 재생수술에 비해 훨씬 저렴해 이미 다른 아랍권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으며 시리아에서는 15달러에 팔리고 있다. 이집트를 비롯한 아랍여성들이 처녀성 위장도구를 구입하고 있는 것은 그들 문화에서 처녀성이 생명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슬람사회에서는 혼전성관계는 금지되고 있으며 특히 여성들에게 엄격하게 적용되고 있다. 이를 어길 경우에는 불명예로 간주해 부모나 형제들에게 폭행당하거나 심지어 살해되기도 한다. 여성인권운동가들은 여성들에게만 강요되는 처녀성은 인권 침해이자, 남녀평등에도 위배되는 구시대적이라는 발상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처럼 이슬람사회의 여성에게 자행되는 인권침해나 학대가 지구촌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얼마 전 말레이시아에서는 맥주를 마신 혐의로 체포된 여성의 태형이 확정되었고, 9월초에는 수단 하르툼의 한 레스토랑에서 UN 직원인 루바나 후세인이 바지를 입었다는 이유로 함께 있던 여성 12명과 함께 체포됐다. 그들 중 10명은 태형 10대의 약식 처벌을 받고 풀려났으나, 후세인과 다른 2명은 정식 재판을 요구하며 지나치게 여성의 행동과 옷차림을 억압하는 이슬람식 법률에 반기를 들었다.

수단 형법에는 음란한 옷차림을 한 사람을 태형 40대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나 후세인은 유엔직원으로서의 면책권까지 포기하며 재판에 임했다. 그는 자신의 재판을 통해 여성의 권리를 찾기 위한 시험대가 되길 바란다는 입장을 밝혔고 벌금형이 떨어지자 납부를 거부하고 한 달의 징역형을 선택했다.

9월 중순에는 12세의 어린 나이에 출산하던 예멘의 한 소녀가 사망한 사건이 발생해 이슬람사회에 보편화된 조혼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기도 했다. 포지야 유세프로 알려진 이 소녀는 병원에서 3일 간 끔찍한 산통을 겪다가 태아와 함께 사망했다. 이 같은 사실은 어린이 인권단체인 시에즈의 폭로로 세상에 알려졌다.


예멘의회는 올 3월, 17세 이상 여성만 결혼할 수 있다는 법이 통과시켰으나 예멘은 전통적으로 조혼이 널리 퍼진 곳으로 인권단체들에 의하면 아직까지 15세 이하 소녀의 25%가 어린 나이에 성인 남성과 결혼하는 것으로 보고하고 있다. 조혼은 예멘뿐만 아니라 이슬람사회에서 널리 퍼져있다. 2008년 8월 사우디에서는 한 사형수가 자신의 15살 난 딸을 동료 사형수에게 시집보냈고, 사형수와 어린 소녀는 교도소 특별구역에서 이틀 밤을 보낸 후 임신을 해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10대 어린 소녀들, 조혼으로 임신과 출산 고통심화

조혼이 국제적으로 비판받자 사우디에서도 결혼을 위한 법적 최소 연령을 규정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일부 언론과 단체들이 본인의 동의가 없이 부모의 결정에 의해 어린 소녀들이 결혼하는 풍습은 교육권과 인권의 침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보수파 성직자들은 결혼 최소연령을 법으로 규정하는 것은 이슬람 율법(샤리아)에 위배되는 것이라며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현재 사우디는 결혼 연령을 정한 법률이 없으며 단지 이슬람 율법에 따라 성관계 가능연령만 정해져 있다. 이에 따라 성관계만 보류한다는 형식적인 선서만 하면 1살짜리도 시집보낼 수 있을 정도로 어린 소녀들의 인권을 열악하다. 가부장제가 일반화된 이슬람사회에서 소녀들이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면 교육 받을 권리와 유년시절의 즐거움, 자신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박탈, 임신과 출산으로 인한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이외에 여성에 대한 강제적인 할례와 명예살인도 이슬람여성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요소 중에 하나다. 성스러운 결속과 사회 구성원이 되기 위한 의식이라는 이름으로 실시되는 여성 할례는 음핵의 일부 혹은 전부, 음순, 음문을 잘라내고 성기 일부를 봉합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할례 후 많은 여성들은 비위생적인 수술도구로 인한 질병 감염, 반복되는 출혈과 유산, 성교 시 통증과 성적 불감증, 우울증 등 육체적 정신적 고통 속에서 살게 된다.

명예살인은 가족이나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구성원을 죽이는 관습으로 이 역시 이슬람사회에서 일반화된 것으로 여성들이 주요 대상이 되고 있다. 대개 순결이나 정조를 잃은 여성, 간통한 여성을 상대로 남편이나 오빠 등 가족 중 누군가가 해당 여성을 살해하는 경우가 많다. 살인자는 체포되어도 가벼운 처벌만 받기 때문에 이슬람 국가 내에서 공공연하게 일어나고 있다.

명예살인은 이집트, 예멘, 시리아 같은 폐쇄적인 국가에서 많이 발생하지만 이슬람주의가 부활하기 시작한 터키에서도 자주 일어나고 있다. 터키정부는 명예살인이 2000년 제네바 UN 인권위원회에서 공식적으로 다뤄지고 유럽연합(EU) 가입에도 지장을 주자 2005년 가해자에게 종신형을 선고할 수 있도록 법을 제정했지만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있다. 한편에서는 명예살인에 대한 법적 처벌을 피하기 위해 여성에게 자살을 강요하기도 한다.

2007년 11월 사우디 재판부는 성폭행 피해 여성에게 징역 6개월과 태형을 선고해 논란을 빚기도 했다. 상식 이하의 부당한 재판이 국제적으로 논란을 빚자 사우디 정부는 피해 여성이 "외간남자와 밀폐된 공간에 함께 있었다"면서 재판의 정당성을 주장했으나 미국 등 서방국가들의 압력이 계속되자 결국 피해 여성을 사면했다. 이 사건은 국가차원에서 자행된 명예범죄로 샤리아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초기 이슬람사회, 여성 상속권과 경전 해석 자유 부여

이슬람사회의 여성학대는 분명 이슬람 경전인 코란과 최고 예언자인 무함마드의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다. 2003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면서 올 8월 만해대상을 수상하기 위해 방한한 이란의 여성 인권변호사 시린 에바디는 "상당수 이슬람 국가에서 여성 차별이 존재하는 것은 각국이 이슬람 정신을 잘못 해석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이슬람 경전 코란은 남녀평등을 강조하며, 여성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초기 이슬람교는 당시 기독교문명권에서 볼 수 없는 남녀평등을 인정해 여성의 상속권과 재산권을 보장해주었고 부족 또는 가족 간의 결혼문제에 대해 당사자인 여성의 발언권을 인정했다. 실제 이슬람뿐만 아니라 서구 학자들도 이슬람이 여성의 지위를 신학적, 종교법적으로 개혁, 진보시켰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10세기경에는 일부에서나마 여성의 권리로서 피임기구를 허용했다는 기록도 있고 노예여성도 결혼하거나 오랫동안 하인생활을 하면 특별한 절차를 거쳐 재산을 상속받기도 했다.

또한 종교적인 해석이나 코란의 편집권까지 인정했으며 라비아 알 아다위야같은 여성은 노예출신임에도 높은 영성과 덕성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켜 남성과 여성을 통틀어 이슬람 최고의 신비주의자로 인정받기도 했다. 이슬람 성인들의 전기를 남긴 저명한 수피 아타르는 그에게 더없이 극진한 찬양의 글을 남기기도 했다.

"굳건한 베일로 얼굴을 가렸던 여인, 진실의 긴 옷으로 몸을 감쌌던 여인, 사랑의 불길로 그리움을 살랐던 여인, 임에게 다가가 깊은 사랑에 빠졌던 여인, 그 분과 하나 되어 그 속으로 사라진 여인, 남성들로부터도 고결함을 인정받은 여인, 순수무구한 제2의 마리아."

같은 시기 기독교사회에서는 여성이 기사도 정신에 의해 존중받는 것처럼 보였지만 오히려 철저하게 보호대상에 머물렀을 뿐 가정이나 사회에서 자신의 권리를 누릴 수 없었다. 오히려 중세 말 유럽의 여성들은 흑사병의 유행과 종교개혁이라는 대변혁의 시기에 희생양이 필요했던 정치·종교 권력자들의 마녀사냥에 휩쓸려 많은 수가 화형과 교수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남녀평등을 인정했던 이슬람사회가 여성을 차별하기 시작한 것은 무함마드가 사망한 후 수니·시아파 등 각 종파로 분리되고 본격적으로 제도화가 진행되면서부터였다. 이때부터 여성들은 경전에 대한 해석권을 상실했고 남성들은 코란에 대한 독점적 해석권을 가지고 경전 다음의 권위를 가지고 무슬림의 일상을 규제하는 샤리아를 제정했다.

통일왕조였던 정통칼리프시대와 우마이야·압바스 왕조를 거쳐 파티마·맘루크·무갈 왕조의 등장과 셀주크·오스만 같은 투르크족의 발흥 등으로 이슬람 세계가 갈라지게 되면서 이슬람법은 지역이나 종파에 따라 각기 다른 식으로 해석되거나 제정되었다. 그때마다 여성들의 지위는 계속 낮아졌다. '명예 살인'은 중앙아시아에서 유래한 투르크족의 풍습이고 '여성 할례'는 나일강 상류에 근거를 둔 수단의 부족들 사이에 행해진 것임에도 보수주의자들은 코란이나 무함마드의 언행을 모아놓은 하디스를 끌어들여 이슬람의 전통처럼 가르쳐왔다. 

이슬람사회에서 여성들이 더욱 어려운 처지에 몰린 것은 유럽열강이 아랍세계로 밀려들어오면서부터였다. 아시아와 유럽을 재패했던 오스만제국이 18세기부터 현저히 세력이 약해지자 영국과 프랑스는 북아프리카 일대를 침략했고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중동 전 지역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서구 식민주의 세력의 침략은 이슬람세계를 자극했고 아랍민족주의와 함께 '와화비 운동'같은 극단적인 이슬람 근본주의가 발호하기 시작했다. 와하비 운동은 18세기 중후반 압둘 와하브라는 인물이 창시한 것으로 철학이나 형이상학보다는 엄격한 신앙실천을 강조했다. 그는 당시 이슬람사회가 낙후된 것은 무함마드의 정신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슬람의 근본 교리와 경전인 코란으로 돌아가 초기 이슬람공동체를 재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와하비는 코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음주·도박·춤·흡연이나 여성들의 치장을 철저하게 금지했고 아라비아 반도의 유력부족인 사우디 가문의 이븐 사우드와 만난 후에는 자신의 정치적, 사회적 주장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두 사람은 종교적 열정과 군사적 힘을 배경으로 7세기 초 무함마드를 모방해 아라비아 반도 전체를 지배하는 종교·정치 운동으로 발전시켰다.

19세기 이후 와하비운동은 정교일치를 주장하는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의 지배 이념이자 건국이념으로 자리 잡았을 뿐 아니라 오늘날까지 빈 라덴(그 역시 사우디 출신이다)으로 대표되는 이슬람 근본주의의 토대가 되었다. 와하비즘은 초기 이슬람 정신을 세운다는 명분으로 시작했지만 당시 어떤 종파보다도 완고하게 여성들을 압박했다. 서구 세력과 서구 문물로 인한 타락으로부터 이슬람을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기독교의 구약성서에서 언급해졌던 '후두드 형'(범죄자를 돌로 쳐 죽이는 것)이나 '명예 살인', '여성할례'를 이슬람 전통법안으로 흡수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이슬람 각국의 독재자들도 자신들의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근본주의자들과 손잡고 여성들에게 침묵을 강요했고 샤리아를 위반한 여성에 대한 후두드 형이나 명예살인을 용인해왔다. 여전히 정통성이 취약하고 정치·경제적으로 불안한 국가들은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으로부터 국가와 종교를 수호한다는 명분하에 국민들의 기본인권을 무시하고 여성들을 차별하는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죽음 앞에서도 꿋꿋하게 인권과 해방을 위해 싸우는 이슬람 여성들

이처럼 엄혹한 상황에서도 이슬람 여성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여성해방을 위해 힘쓰고 있다. 파키스탄 여성운동가 무크타르 마이는 가부장적인 이슬람사회의 명예범죄에 저항한 인물이다. 2002년 자신의 남동생이 자신보다 높은 신분의 마스토이 여성에게 말을 걸었다는 이유로 감금되자 자신이 속한 부족은 동생을 대신해 그를 마스토이 부족에게 보내 용서를 구하라고 보냈고 상대 부족은 집단성폭행이란 무자비한 결정을 내렸다.

4명의 남성에게 강간당한 그는 다른 여성처럼 수치심으로 자살할 수도 있었지만 꿋꿋하게 살아남아 법원에 소송을 했고 3년만에 승소했다. 파키스탄의 이슬람 관습법에 저항한 마이는 자신의 이름을 딴 '무크타르 마이의 외침'이라는 책을 출판해 얻은 수익금과 후원금으로 학교를 세워 이슬람 여성들의 권익과 해방을 위해 일하고 있다.

2008년 예멘에서는 열 살의 소녀 누주드 알리가 20세 연상의 남편과의 이혼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해 세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엄격한 이슬람 율법이 지배하는 예멘사회에서 공개적으로 여성이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것은 '명예살인'을 당할 수도 있지만 누주드는 용기를 냈다. 그의 남편은 사춘기를 지날 때까지 성관계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를 어기고 두 달여 동안 성폭행과 구타를 가했다.

누주드는 결혼 후 처음 친정집으로 가게 되자 법원으로 달려가 법원 인권변호사 등의 도움을 받아가며 이혼 소송을 제기했고 마침내 승소판결을 받았다. 그의 법정투쟁은 예멘정부로 하여금 지난 3월 형식적이기는 하지만 17세 미만 소녀들의 결혼을 금지하는 '강제 조혼 폐지 법안'을 이끌어냈다. 개인들의 영웅적인 투쟁과 함께 쿠웨이트 같은 나라에서는 여성운동가들이 지난 5월 헌정사상 처음으로 선거를 통해 의회에 진출하는 등 정치·사회적으로 영향력을 확보해나가고 있다. 

학문적인 차원에서는 초기 이슬람사회가 여성의 경전해석을 인정했던 것처럼 이슬람학을 통해 여성의 시각으로 이슬람을 이해하고 전통처럼 치부되어온 남성 중심적 세계관을 깨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남성중심의 경전해석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이슬람의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60년대 이후 서구에서 여성들이 기독교 경전을 재해석하면서 여성신학을 태동시켰던 것처럼 이슬람사회에서도 여성신학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슬람사회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여성들의 투쟁에 대해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여전히 이슬람 전통을 무시하는 서구의 무분별한 사상과 문화에 오염된 결과라고 비난하고 있다. 서구적 시각이 아닌 각 나라와 민족의 문화와 전통을 인정해야 한다는 문화상대주의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옮긴 듯한 발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서구식민주의가 여성들의 열악한 상황을 초래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기독교 세계관을 가진 서구침략세력들은 무슬림 여성들이 쓰고 있는 베일을 '미개한 것'으로 간주하고 그들의 정체성을 해체시킬 수 있다면서 베일을 쓴 여성들을 철저하게 탄압했다. 이에 대해 아랍의 민족주의자들과 근본주의자들은 베일을 벗는 것은 식민세력에 대한 굴복이라면서 모든 여성들에게 베일을 쓰도록 강요했다.

한때 일부 중상류여성들의 장식품에 불과했던 베일은 '이슬람'의 상징이 되었고 서구 세력과 서구 문물로 인한 타락으로부터 이슬람을 지키기 위한 명분으로 활용되었다. 여성들도 서구 식민주의의 침략에 대한 저항의 한 형태로 스스로 베일을 쓰기도 했다. 1960년대 알제리 독립운동 당시에는 여성의 베일쓰기가 독립운동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여성들의 입장보다 서구 식민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가 충돌하는 상황에서 출발한 베일쓰기는 대부분 독립을 쟁취한 이슬람국가에서 여전히 이슬람 정신을 수호하기 위한 것으로 강제되고 있다. 탈레반의 영향력이 강한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아예 얼굴과 몸 전체를 두르는 부르카의 착용을 강제하면서 여성을 집안에 묶어놓고 있다. 탈레반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대외적으로 과시하는 수단으로 여성을 본보기 삼아 탄압하고 있는 것이다.

이슬람사회가 탈레반처럼 서구침략을 핑계로 삼아 여성들을 억압하는 것은 이제 철지난 구호에 불과하다. 이슬람 여성들의 문제를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슬람 내부에서 해결하되 남녀평등을 주장했던 코란과 무함마드의 정신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인권과 양성평등이 보편화되고 있는 시대에 아무리 각 나라와 문화와 전통을 이해한다고 해도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고 생명까지 위협한다면 그것은 문화가 아니고 문화의 이름을 쓰고 인간을 유린하는 악습이며 기득권자들의 일방적인 폭력에 불과하다.

진정한 근본주의는 창시자들이 그러했듯이 인간해방과 존중에 근거를 두고 있다. 만약 무함마드가 이슬람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여성에 대한 폭력과 인권탄압을 알고 있다면 지하에서 통곡하고 있을 것이다.
#이슬람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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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모.함석헌 선생을 기리는 씨알재단에서 홍보위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씨알정신을 선양하고 시민사회발전에 기여하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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