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설악의 불교성지 순례길을 걷다

백담사에서 봉정암 그리고 오세암까지

등록 2009.10.14 09:45수정 2009.10.14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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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담사 백담사의 아침 ⓒ 김선호


'삶의 여유'를 찾기 위해 산을 찾는 것이라면 산행 또한 여유로워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일요일 하루의 여유로 설악산을 다녀와야 했으니.

간단하게 행장을 차리고 도시락을 챙겨 서둘러 길을 나서니 새벽 6시다. 새벽 같이 길을 나선 덕분에 8시가 조금 넘어 백담사 입구인 용대리에 도착했다. 다행히  백담사 가는 버스는 연속해서 이어졌다. 인근에서 김밥 두 줄을 사 들고 버스에 안착, 30여분을 백담사계곡을 따라 가니 어느덧 백담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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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 숲 백담계곡의 단풍 ⓒ 김선호


아침 기운이 서늘하게 내린 백담사 주변은 초겨울 인상을 풍기는데 아직 단풍은 절정이 아니다. 조금씩 단풍빛을 띠고 있는 숲 속에 반짝이는 아침 햇살을 받고 유난히 붉은 잎새를 자랑하는 단풍나무를 발견할 때마다 그래서 사람들의 탄성이 클 수밖에.

단풍이 물들고 있는 숲 속으로 사람들이 부지런히 오간다. 그러나  번잡할 정도는 아니고 충분히 여유를 부릴 정도다.  백담사 계곡에서 수렴동계곡으로 이어지는 단풍은 익히 알려진 대로 아름답기 그지없다. 

지난 주중, 가을 가뭄 중에 간만에 비가 내렸다고 한다. 계곡물이 많이 불어나 있고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 또한 우렁차다. 어인일인지 올해 단풍이 여느때보다 고울 거라는 풍문이 돌았었다. 설악 산행을 계획한 사람들은 더욱 마음이 들떴고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지난주 한계령에서 서북능선을 타고 대승령을 넘어 장수대를 돌아보며 얼마나 실망을 했던가. 가뭄의 현장은 심각했다. 작년에 풍부한 계곡물과 더불어 더없이 고운 단풍숲을 보여주었던 장수대의 몰골은 처참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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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 계곡과 어울린 단풍숲 ⓒ 김선호


계곡 물은 바싹 말라 있었고, 단풍나무는 검은빛이 뚜렷한 검붉은 잎새를 힘없이 매달고 있었다. 물론 단풍의 절정이 아님을 감안하고라도 그 힘없이 매달린 단풍잎이 바람이 불때마다 속절없이 떨어져 내리는 모습은 가슴이 아플 정도였다.게다가 서북능선에 이어지던 귀때기청봉의 너덜지대는 이미 초겨울의 정경 다름 아니었으니 코스의 난해한 점도 없잖아 있어 지난 설악 산행에 대한 미련이 많았다.


그러니 설악산의 비소식이 반갑기 그지없었으나 그 또한  늦은 감이 없지 않았다. 이왕에 적당한 수분을 먹고 최고의 단풍빛을 보여줘야 할 시기를 놓친 탓인지 올해의 단풍은 썩 곱다고만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설악산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백담사계곡의 단풍도 예외는 아니었다. 작년에 비해 색감이 떨어져 최고의 단풍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역시, 설악산이었다. 봉정암을 향해 오르면서 역광을 받는 단풍의 황홀할 정도의 붉은 색은 유혹적이었다.

그 유혹에 못 이겨 발길을 멈추길 몇번이었던지.  계곡을 흐르다 소를 이룬 물빛은 푸르다 못해 에메랄드빛을 띠었다.  한 웅큼 손으로 뜨면 그대로 보석으로 반짝일 것 같은 푸른 물이 자갈을 만나 돌돌 흐르고, 넓직한 암반을 만나 차르르 흘러내리는 길을 단풍 숲과 나란히 끼고 걷는 맛을 어디에 비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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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정암 사리탑에서 바라본 봉정암 정경 ⓒ 김선호


단풍 숲과 계곡길이 잠시 끊어지는 건 숲 속의 작은 암자, 영시암에 이르러서다. 아침 식사 시간인가, 국수보시가 한창이다.  두 개의 국수를 받아들고 남편과 나란히 영시암 계단참에 앉아 아침을 먹는다. 가져 온 김밥을 꺼내 국수를 먹으니 배가 든든하다. 국수를 먹고 있는 계단참 양옆에 구절초가 꽃밭 가득 피었고 마당 양 옆으로 알뜰하게 키운 무와 배추가 싱싱하게 자라고 있다.

영시암을 벗어나 수렴동 대피소에서 모닝 커피를 한잔씩 나눠 마시고 다시 길을 나선다.
계곡은 어느새 백담계곡을 벗어나 수렴계곡으로 이름을 바꾸어서 흐르는 중이다. 조금씩 고도가 느껴지지만 아직은 완만한 계곡길이어서 걷기에 무리가 없다. 그러나 긴장을 늦추면 안된다. 봉정암 깔딱고개, 그 악명 높은(?) 고개를 넘기기 전까지 긴장을 유지할 일이다. 계곡과 단풍숲의 조화는 연속해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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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탑 5대 적멸보궁중 하나인 봉정암의 5층사리탑 ⓒ 김선호


그러나 숲이 깊어지면서 계곡의 경사가 높아지는 게 눈에 띈다.  아득한 높이에서 직각으로 떨어지는 폭포들이 하나 둘 시야를 붙잡는다. 이쯤에서 단풍은 잠시 뒷전이고 폭포의 아득한 높이에 '아,'하는 탄성이 여기저기서 들려오기 시작한다. 쌍용폭포의 아찔한 위용은 소름이 끼칠 정도다. 폭포를 닮아 아득해질 무렵에선 등산로도 아찔해져서 철계단이 놓여 진 길이 이어진다.

봉정암에 가까워질수록 오가는 등산객들도 늘어난다. 새벽부터 대청봉이나 중청을 거쳐온 이들, 봉정암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내려가는 이들이다.

붉은 단풍은 멀어져 보이고 아찔한 높이의 계곡 주변에 노란 참나무단풍이 눈에 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노란 잎이 떨어지며 포문을 그리는 모습이 마치 노란나비의 군무를 보는 것 같아 잠시 넋을 빼놓고 바라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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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 오세암 가는 길의 맑으면서도 화려한 단풍 숲 ⓒ 김선호


드디어 봉정암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지점, 깔딱고개다.  호흡이 거칠어지고 다리가 천근만근으로 느껴지지만 저마다 배낭에 부처님 전에 공양할 곡식을 지고 가시는 할머니들 앞에서 '힘들다' 불평을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어렵사리 깔딱고개를 넘어선다. 

고갯마루에 서서 보는 눈앞의 풍경은 장엄하기 까지 하다. 붉은 듯 누른 듯 물든 숲 속에 우뚝 솟은 기암들, 그 곳에 반듯하게 들어앉은 봉정암이 보인다. 봉정암은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5대 적멸보궁중 하나로 전국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절이기도 하다.

백담사를 출발해서 봉정암까지 얼마나 걸었을까, 배가 고파진다. 그러나 봉정암의 '미역국보시' 시간이 끝난 듯 배와 사과를 먹기 좋게 잘라놓은 바구니가 있다. 목이 마른 터라 배 한 조각을 얼른 집어 먹으니 달고 시원한 게 갈증이 단번에 날아간다.  부처님께 감사 인사를 올릴 요량으로 또 오세암으로 가기 위해 '봉정암사리탑'으로 올라간다.

사리탑으로 가는 짧은 길이 경사도가 매우 심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도착하고 보니 5층 석탑 꼭대기가 마치 하늘에 닿을 듯하다. 소청봉이 우뚝하고 그 오른쪽으로 용아장성의 위용 또한 만만치 않았는데 사리탑 그 작은 꼭대기야 말로 하늘에 라도 닿을 듯 높아 보이는 건 어인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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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암 동자전 웃고 있는 동자승을 모신 오세암 '동자전'에 마음은 무장해제 당하고 ⓒ 김선호


하늘에 닿을 듯 한 탑신 앞에서 절을 하는 이들의 표정들이 진지하기 그지없다. 기도 효험이 전국에서 최고라는 찬사는 아마도 이곳까지 이르기 어렵다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엎드려 절을 한다. 나의 어쭙잖은 기도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비는 기도다. 하늘에라도 닿을 듯 한 탑신이 나의 이 어쭙잖은 기도를 하늘에 전달해 줄 것만 같다.

봉정암에 닿기 위해 아득한 높이의 벼랑길을 올라 왔으니 오세암을 가기 위해선 그만큼의 높이를 내려서야 한다. 사리탑 아랫길은 겨울이면 산행이 통제될 정도로 길이 험하다. 무수한 풍문으로 그 길에 대한 두려움이 뇌리에 박혔으니 더욱 조심조심 길을 내려선다.

간간히 오세암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봉정암으로 가는 길이라는 이들을 몇 명 보았을 뿐 인적이 드문 길이다. 이런 일은 설악산에서 매우 드문 경우다. 단풍철의 설악산은 인산인해를 이루는 경우가 오히려 정상일 정도가 아니던가.

오세암 가는 그런 한갓진 길을 만나게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에 오히려 단풍이 절정이고 어쩌다 지나가는 이들과 인사를 나누며 걷는 길이 너무나 흡족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다.

설악의 뼈대를 이루는 용아장성과 공룡능선 사이, 그 깊숙한 골짜기에 오세암은 자리해 있다. 그러니 봉정암에서 오세암으로 가는 길은 설악의 가장 깊은 속살을 느낄 수 있는 소중한 길은 셈이다. 인간의 손길을 많이 타서 이제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다람쥐들도 이 길에선 예외다. 본래의 겁 많은 다람쥐를 만나는 일이 반가운 길도 이 길이다. 아마도  '오세암'의 동자승 [길손이]도 이 길에서 다람쥐랑 달음박질 하며 놀았을 거다.

단풍이 절정인 오솔길 옆으로 작은 개울물이 흐른다. 더 이상 투명할 수 없을 만큼 시리게 푸른 물을 목이 마를 때마다 손으로 떠서 먹으며 간다.

하나 둘 셋.......... 몇 개의 고개를 넘었을까, 눈앞에 절집의 푸른 지붕이 보인다. 그 깊은 골짜기, 그 속에서 숨바꼭질이라도 하듯이 숨어있는 작은 절, 오세암이다.

부처님을 뵙고 동자전의 동자승을 뵈는 일이 그토록 살가운 절이 또 있을까. '동자전'의 동자승의 환한 미소에 나는 그만 무장해제 당하고 만다. 마음이 한없이 느긋해 지는 그 시간 만큼은 '여유'를 찾으러 설악산에 왔음이 확실해 진다.

돌아서는 발걸음이 한없이 가붓해지는 것도 다 동자승의 환한 미소 탓이다. 그 미소 때문에 오래 머물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누르며 뒤를 돌아본다. 동자전 뒤로 병풍처럼 둘러싸인 숲에 단풍이 한창이다. 병풍 뒤로 커다란 바위봉우리가 그 모두를 감싸듯 웅장하게 서 있는 배경까지, 딱 한 폭의 그림이다.

이제 영시암쪽으로 나가 백담사로 회귀를 하기까지 그곳에서 2시간 30분을 더 가야 한다. 참 많이도 걸어왔다. 백담사에서 출발해서  영시암을 거쳐  봉정암, 그리고 오세암까지. 본의아니게 내설악의 '불교 성지 순례길'을 돌아 보며 하룻동안 원 없이 설악을 걸었다.

지난 일요일(11일), 설악산은 최대의 인파가 몰려들어 한때 북새통을 이루었다던 그 날
우리가 누렸던 한갓진 산행길은 아마도 부처님의 특별한 자비로움 덕분이 아니었을까?

덧붙이는 글 | 지난 11일 설악산을 백담사 거쳐, 봉정암 거쳐 오세암으로 다녀왔습니다.


덧붙이는 글 지난 11일 설악산을 백담사 거쳐, 봉정암 거쳐 오세암으로 다녀왔습니다.
#백담사 #봉정암 #봉정암 사리탑 #오세암 #단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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