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아픈 게 풍년도 달갑지 않네유!"

식량보다 소중한, 자식 사랑하는 어머니 마음

등록 2009.10.16 10:50수정 2009.10.21 11:42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

여물대로 여물어 고개를 푹 숙인 벼들. 풍년이면 온 국민이 함께 기뻐하고 풍년가를 불러야 함에도 그렇지 못한 농민들이 많아 마음이 무겁습니다. ⓒ 조종안


일 년 열두 달 중 가장 복된 달, 가장 으뜸 달이라는 10월 상달. 들녘에 나가면 농민들의 풍년가 소리가 구경하는 사람 마음까지 풍요롭게 하는 수확의 계절입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지 풍년가 소리는 사라지고, 콤바인 소리가 풍년가를 대신 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마을도 풍년이고 농민들도 고추, 참깨에 이어 벼를 거둬들이느라 정신없이 바쁜데요. 옛날에는 누렇게 익은 벼들이 고개를 숙이기 시작하면 농악대가 꽹과리를 선두로 마을을 돌며 떠들썩하게 잔치를 벌였다고 합니다.   

엊그제는 나락을 두 가마 방아 찧어 안집 창고에 보관해두었는데, 집주인 아저씨가 손수 찧어주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내년 봄까지는 식량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고요. 내일부터 먹게 될 차지고 구수한 햅쌀밥을 생각하니까 벌써 입맛이 당기네요. 

이렇게 풍년을 즐거워하고 만끽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비료와 농약값은 작년보다 올랐는데 정부에서 추곡수매값을 맞춰주지 않자 분노해서 논을 불태우거나 뒤집어엎어 버리는 농민들도 있어 마음이 무겁습니다. 특히 우리 마을에는 아픈 딸 때문에 풍년도 달갑잖다는 아주머니가 있어 더욱 안타깝게 하네요. 

아주머니는 못자리가 시작되던 지난 5월에 처음 뵈었는데요.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면 논에서 혼자 일하는 모습이 종종 눈에 띄었습니다. 그 모습이 외롭고 쓸쓸하게 보여 하루는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지 알아보려고 논을 둘러보고 가는 아주머니를 쫓아가 잠시 얘기를 나눈 적이 있지요. 

a

지난 7월, 논을 둘러보고 오던 아주머니. 웃으며 대화를 하다가도 딸 얘기가 나오면 표정이 바뀌어 마음이 아팠습니다. ⓒ 조종안


"아주머니 안녕하세요. 저기 방울이 할머니네 앞집 이층에 사는 사람입니다. 땀 흘리며 고생하는 농민들 이야기를 소재로 글을 쓰고 있는데요. 지금 논에서 무슨 일을 하고 오시나요?"
"논에 물이 말렀는지 둘러보고 오는 길인디유."


"연세가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지만, 열심히 일하시는 아주머니는 참 행복한 분입니다. 아주머니보다 젊어도 병석에 누워있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거기에 내 땅에다 곡식을 심어 먹으니까 더욱 좋으시겠어요."
"하이고 좋기는, 내 논이 아니라 남의 논 여유. 하이간 예순 야달(68세) 먹드락 걸어 댕김서 일을 혀먹을 수 있응게 다행은 다행이지유."

"자녀는 몇을 두셨는지요? 
"아들 하나에다가 딸이 넷, 합쳐서 다섯인디, 서른 여섯 살 먹은 셋째 딸은 아퍼가꼬 결혼도 못허고 집이가 있고, 쥔 양반이 안 계셔유. 갑자기 아퍼가지고 돌아가신지 20년 쪼꼼 넘는가···."

"아 그러셨구나, 저는 몰랐습니다. 그나저나 아이들 다섯을 혼자 기르시느라 고생 많이 하셨겠네요.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저는 한 달에 5-6회씩 시내버스를 이용합니다. 그런데 항상 운전석 뒤에 앉아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는 젊은 아낙을 종종 보았지요. 정신과 환자 같아서 안타까웠습니다. 그런데 시내버스를 자주 타고 다니는 통통하고 예쁘장한 그녀가 아주머니 따님이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지 모릅니다. 

3개월 만에 다시 만난 아주머니

처음에 만났을 때는 셋째 딸이 정신과 약을 복용하고 있고, 아저씨가 돌아가신 지 20년이 넘었다며 한숨을 길게 내쉬는 아주머니에게 이것저것 질문하기가 뭐해서 다음에 또 뵙겠다고 하고 헤어졌습니다. 그런데 3개월이 지난 어제 아침을 먹고 들녘을 바라보다 벼를 베는 아주머니가 눈에 띄어 반가운 마음에 뛰어나갔습니다. 

a

초록이 황금색으로 변한 만호뜰에서 잠시 허리를 펴고 쉬는 아주머니. 여름내 흘린 땀의 결실을 수확하면서도 가슴 속에는 딸을 걱정하는 마음이 가득한 것 같았습니다. ⓒ 조종안


"아주머니 오랜만이네요. 지난 7월인가요. 논을 둘러보고 가실 때 뵙고 석 달 만에 뵙는 것 같은데 풍년이라서 기쁘시겠습니다." 
"그릉게유. 근디 딸이 아픈 게 풍년도 달갑지 않네유."  

여름내 흘린 땀의 결실인 벼들이 누렇게 익은 들녘에서도 아픈 딸을 걱정하며 풍년도 달갑잖다는 아주머니 한탄에서,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고귀하고 깊은 것인지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집에서 요양 중인지, 요즘에는 버스에서 따님을 만날 수가 없더군요." 
"오늘도 가슴이 답답허담서 버스 타고 나갔는디, 길이 어긋나는 갑네유. 하루에 두 번씩 나가는 날도 있거든유. 그나저나 지금은 그냥저냥 보살핀다고 혀도 내가 없어지믄 어치게 헐지 걱정이네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의사는 아니지만, 편하게 대해주고 안정을 취하면 지금보다 더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고 10년 20년 후에는 따님처럼 아픈 환자들은 나라가 맡아서 치료해줄 것이니까요. 남의 논이고 쌀값이 내렸다고 하지만, 풍년이 들면 수입이 조금이라도 느니까 좋으시겠습니다."
"그렇게만 된다믄 얼마나 좋겄어유. 그리고 수확 혀봐야 주인 허고 반반씩 나눠 먹고, 거기서 농약 값, 비료 값, 기계 빌리는 값 제허믄 남는 것도 없어유. 그냥저냥 품삯 뜯어먹고 사는 거시쥬."

아주머니는 이웃마을에서 태어나 나포에 사는 신랑을 만나 알콩달콩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홀몸이 되어 온갖 고생을 해가며 자식을 다섯이나 키워냈으면서도 항상 낯 꽃이 피어 있어 부담이 없는데요. 셋째 딸 이야기만 나오면 금방 우울한 표정으로 바뀌어 마음을 짠하게 합니다. 

고등학교 시험에 떨어져 실망하는 딸을 그냥 볼 수 없어 강건너 장항에 있는 학교에 입학시켰는데 몇 달 지나면서 이상한 행동을 보이기에 좋다는 약은 다 구해서 먹여도 소용이 없어 정신과 병원에 갔더랍니다. 그런데 뇌파 검사를 마친 의사가 결과를 설명해주는데 정신분열증이라는 겁니다. 처음에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당시 충격이 몸에 배어 있을 수밖에요.

삼십 대 중반이 넘도록 결혼을 못한 셋째 딸은 집에 있기가 답답하면 시내버스를 타고 시내로 바람을 쐬러 가는데, 주변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거나 난폭한 행동을 하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라는 아주머니. 그는 여름내 흘린 땀의 결실인 벼를 거둬들이면서도 수심이 가득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http://www.shinmoongo.net/)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신문고뉴스(http://www.shinmoongo.net/)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풍년 #어머니 #자식사랑 #10월 상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종영 '수사반장 1958'... 청년층이 호평한 이유
  2. 2 '초보 노인'이 실버아파트에서 경험한 신세계
  3. 3 '동원된' 아이들 데리고 5.18기념식 참가... 인솔 교사의 분노
  4. 4 "개도 만 원짜리 물고 다닌다"던 동네... 충격적인 현재
  5. 5 "4월부터 압록강을 타고 흐르는 것... 장관이에요"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