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 읽다가 정들어버린 <탈북 여대생>

'탈북 여대생'과 '여우' 매력적인 두 작품 수록된 소설집

등록 2009.10.28 09:26수정 2009.10.28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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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 여대생 ⓒ 새움

책을 읽는 일, 책을 만드는 일. 오랫동안 꿈꿔왔던 일을 하기 위해 출판사에 발을 내딛었습니다. 그리고 첫 출근날, 처음으로 맞이했던 원고는 교정이 거의 완성된 원고였기에 심하게(?) 교정교열을 볼 필요는 없었지만 사소한 맞춤법, 띄어쓰기 등을 교정하였지요.

의문나는 점은 저자와 상의하면서 원고를 다듬어 나갔고, 원고를 다 살펴보고 나서는 예쁘게 포장해 줄 카피를 연구하고 보도 자료를 작성했습니다. 근데 참 이상하지요, 그런 상황이 계속될수록 처음엔 '완전 최고다'라는 느낌과는 거리가 멀었던 원고의 매력이 점점 느껴졌어요.


여러 번 읽다 보니 결국! 원고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책으로 나왔을 때는 제법 괜찮은 책이라는 생각마저 들더라구요. 무슨 책이냐구요? 그게 바로 <탈북 여대생>입니다.

<탈북 여대생>은 대하소설 <고구려-전7권>를 발간한 작가 정수인의 소설집입니다. 표제작인 '탈북 여대생'과 '여우' 두 작품이 수록되어 있어요. 처음 원고로 접했을 때는 한 권의 소설집에 함께 수록되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두 작품이 너무 다르게 느껴졌어요.

우선 '탈북 여대생' 내용을 살펴볼까요? 화자인 소설가 '나'는 연변에 살고 있습니다. 북한에 관한 소설을 쓰기 위해 탈북자들과 조선족들을 만나면서 북조선 새기(아가씨, 처녀를 일컫는 말) 설화를 알게 됩니다. 얼굴이 곱디고운 설화는 남자친구 강철과 헤어지고 강철이 없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두만강을 건넜다고 합니다. 자존심이 강해서 북한의 가난한 현실에 대해서 제대로 말하려고 하지 않는 설화. 그런 설화에게 '나'는 다그칩니다.

"배고픈 사람이 식량을 달라고 해야지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있으면 누가 그냥 준다니? 너 같은 사람이 자존심 때문에 입을 다물고 있으면 북조선 인민들은 그만큼 고통이 길어지는 거야."

"다 알고 있는 일이라도 자꾸 이야기해야 돼. 신문이나 방송에서도 북조선 인민들이 굶고 있다고 보도를 하고 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자꾸 떠들어야 정부에서도 지원을 해줄 수가 있어. 북조선 중앙당에서 한국에다 '인민들이 배고프니까 식량 좀 주시오' 그럴 줄 아니? 인민들이 다 굶어 죽어도 간부놈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거야."


"설화, 너는 여태까지 나를 속이고 있었어. 뭐? 사랑이 깨져서 중국으로 왔다고? 그래, 사람 장사꾼이 득실거리는 중국 땅에서 살 만하냐? 북조선에 먹을 걱정이 없다면 왜 지금이라도 못 돌아가냐? 너는 돈도 있겠다. 니 발로 돌아가면 아무 일도 없잖아? 여기서 공안한테 붙잡혀서 끌려가면 어떻게 되는 줄 몰라서 그래?"    

생각해 보면 '먹고 사는 것'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중요한 화두일 것입니다. 안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그렇기에 소설 속에서 '못 먹어서' 죽음에 이르는 북한 사람들에 관한 사연은 두고두고 제 기억에 남아 있을 것 같습니다. 탈북한 어린 오누이의 사연은 더더욱 애잔하게 다가왔습니다.

함께 산 것이 일 년밖에 되지 않았어도 믿을 수 있는 희망은 훗엄마(새엄마)뿐이어서 굶어가면서도 훗엄마를 기다리는 어린 오누이 앞에서 저는 무슨 위로를 해줄 수 있을까요. 아빠도 친엄마도 결국은 '못 먹어서' 저 세상으로 간 것인데, 친엄마 제삿날 어린 남동생을 데리고 강을 건널 수밖에 없었던 누나의 마음은 또 어땠을까요.

생각해 보면, 북한의 현실은 언제나 제게 막연하게 다가왔던 것 같아요. 딱히 어디에서도 북한의 현실에 대해 제대로 알려주는 건 드물었으니까요. 그 어느 언론에서도 북한의 기아 참상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다루어주지는 않는다고 생각되는 건, 저의 착각일까요.

보수 언론은 보수 언론대로 북한에 적대적인 시선만 보내는 것 같고, 진보 언론은 진보 언론대로 북한 인권 문제에는 침묵하고 있는 것 같거든요. 사실 보수니 진보니 그런 게 다 무슨 상관이겠어요. 중요한 건 모두 다 함께 잘 먹고 잘 사는 것 아닐까요. 북한을 탈출하여 사람 장사꾼에게 팔려 가고, 한족에게 몸을 팔면서 온갖 고생을 한 설화. 훗엄마만을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어린 오누이. 지금 북한에는 수많은 설화, 수많은 오누이들이 있을 텐데 말이에요. 

작가 정수인 선생님이 직접 연변에서 5년간 생활하면서 취재한 북한의 실상을 그대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탈북 여대생'은 더 가치 있는 작품이 된 것 같아요. 현실감 있게 그려진 데다가, 소설이라는 장르는 허구이긴 하지만, 사실보다 더한 진실을 말해주는 법이니까요. '북한 현실'이라는 진지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사투리와 현장의 말이 살아 있는데다가 곳곳에 소박한 유머들도 배여 있어서 무겁지 않다는 점도 이 작품의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탈북 여대생'의 진지한 주제에 비해서 '여우'는 얼핏 가볍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화자가 자신의 내면을 솔직담백하게 말하고 있어서 쉽게 읽히거든요. 자신을 삼촌이라 부르며 잘 따르는, 옆집 누나의 딸 수연의 봉긋 솟은 가슴에 애착을 보이는 모습부터 자신이 만난 여러 여자들에 대한 내용까지, 중년 남자의 솔직한 내면을 읽는 재미가 있는 소설이지요. 화자는 후에 자신이 마음에 품었던 수연과 이름도 같고 여러모로 비슷한 또 다른 수연을 만나 깊은 사랑을 나눕니다.

여러 번 읽다 보니 두 소설이 다른 듯했지만 또 아주 먼 거리에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탈북 여대생'의 당당하고 자존심 강한 설화와 '여우'의 가끔은 제멋대로이지만 솔직한 모습이 매력적인 수연이 오버랩 되어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인연은 스스로 만드는 거야. 삼촌이 나를 가산사에서 데리고 오지 않았더라면, 다시 만나자고 조르지 않았다면 우리가 어떻게 몇 달씩이나 만나고 그렇게 깊은 사랑도 할 수 있었겠어? 내 말 잘 듣고, 조금이라도 끌리는 사람이 있으면 바로 인연을 만들어. 쳐다보기만 하면 아무 소용도 없는 거야. 인연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지 어디서 저절로 굴러오는 것이 아니야."

'여우' 속 수연은 그 말만을 남기고 사라집니다. 화자는 그런 수연이 어쩌면 여우가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되지요.

자꾸 읽다 보니 정들어버린 책 <탈북 여대생>. 제가 살짝이나마 만드는 데 참여한 책이기에 더 애착을 갖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서로 다른 매력을 가진 두 작품이 수록된 이 책 <탈북 여대생>에 다른 독자들도 정들어버리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덧붙이는 글 | <탈북 여대생> / 정수인 / 새움 / 2009-10-15 / 1만500원

김화영 기자는 새움 출판사 편집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탈북 여대생> / 정수인 / 새움 / 2009-10-15 / 1만500원

김화영 기자는 새움 출판사 편집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탈북 여대생

정수인 지음,
새움, 2009


#탈북 여대생 #북조선 #여우 #정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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