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사냥 전설을 모방한 살인

[리뷰] 다카노 가즈아키 <그레이브 디거>

등록 2009.11.11 17:18수정 2009.11.12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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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브 디거> 겉표지 ⓒ 황금가지

유럽에서 마녀사냥의 거센 바람이 불었던 시기는 14세기에서 17세기 사이다. 처형당한 인원은 정확하지 않지만 10만 명이 넘는다는 이야기도 있다.

가톨릭교회가 부패하면서 이를 바로 잡으려는 개혁의 움직임이 일어났고, 가톨릭교회 입장에서는 이를 막아서 조직의 권위를 유지하려고 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이단 심문이다. 교리에 따르지 않는 자를 종교의 이름으로 처벌하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교회에 반발하는 자들을 잡아들였지만, 점점 그 대상이 일반 백성에게까지 확대되었다. 사악한 의식을 행해서 악마를 불러냈다는 둥, 다른 사람에게 주술을 걸었다는 둥 갖은 혐의를 씌워서 사람들을 처벌했다.

재판 자체도 억지스러웠다. 고문에 못이겨 허위 자백을 하면 마녀 취급을 했고, 입을 다물고 있으면 고문을 견뎌 내니까 마녀로 몰아갔다. 이렇게 죽은 사람들은 죽어서도 이승을 떠나지 못할만큼 원통했을 것이다.

'그레이브 디거'의 전설도 여기서 생겨났다. 당시에 이단 심문관들이 누군가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자 고문당해 죽은 자가 무덤에서 살아나서 이단 심문관들에게 복수한다는 이야기가 떠돈 것이다. 복수의 집념으로 부활한 사람을 그레이브 디거라고 불렀다고 한다.

도쿄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연쇄살인

마녀사냥에 관한 이야기는 모두 사실이다. 하지만 그레이브 디거의 전설은 사실이 아니다. 이것은 일본 작가 다카노 가즈아키가 창조해낸 이야기다. 작가의 2002년 작품 <그레이브 디거>를 위해서 중세 유럽의 전설 한토막을 만들어 낸 것이다. 거짓말이긴 하지만 당시 유럽 풍경에서는 충분히 있었을 법한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그레이브 디거>에서는 바로 이렇게 죽은 자의 복수처럼 느껴지는 연쇄살인이 발생한다. 현대의 일본, 어린 시절부터 공갈과 사기로 세상을 헤쳐왔던 악당 야가미는 자신의 인생을 새로 시작하기 위해 골수를 기증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자신의 명의로 빌린 집에서 살고 있는 친구를 찾아 간다. 야가미는 그곳에서 그 친구가 욕실안에서 기괴한 모습으로 죽어있는 것을 발견한다.

뜨거운 물이 가득찬 욕조 안에서, 친구는 두 손과 두 발이 서로 엇갈려 X자 형태로 묶인 채 죽어 있다. 야가미는 직관적으로 자신에게 혐의가 돌아올 것을 알아차리고 예정보다 빨리 골수이식을 할 병원으로 떠날 준비를 한다.

그때 야가미를 노린 다른 괴한들이 집으로 쳐들어오고 야가미는 이들에게 벗어나기 위해서 필사적인 도주를 한다. 골수이식 수술은 이틀 뒤, 그러니까 야가미는 내일 중으로 병원에 입원해야 한다. 괴한들의 추적을 피해서 무사히 병원에 도착할 수 있을까?

한편 시체를 발견한 경찰도 야가미를 중요참고인으로 수배하지만 같은 모양의 변사체가 연달아 시내에서 나타난다. 사건은 이제 연쇄살인으로 바뀌었다. 시신의 기괴한 모습에 의문을 느낀 수사관은 서양종교사를 전공한 대학교수에게 자문을 구하면서 그레이브 디거의 전설을 듣게 되는데….

누가 죽은 자의 복수를 하고 있을까

다카노 가즈아키는 <13계단>으로 에도가와 란포 상을 수상하면서 화려하게 데뷔한 작가다. <13계단>이 사형제도와 보호관찰제도를 소재로 하는 사회파의 성향이 강했다면, <그레이브 디거>는 그보다 좀더 본격 미스터리에 가깝다. 야가미의 도주 그리고 경찰과 괴한들의 추적. 이것 만으로도 사건은 숨가쁘게 전개된다.

여기에 더해서 마녀사냥의 전설과 연쇄살인까지 풀어놓았다. 그렇다고 <그레이브 디거>에 사회비판의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썩어빠진 정치권력자와 부정부패를 덮어버리려는 경찰국의 모습, 수사부와 보안부의 오랜 대립도 비쳐진다.

야가미는 스스로 악당이라고 생각하지만 권력의 정점에 서있는 사람에 비하면 피래미 수준에 불과하다. 법의 그물에 걸려드는 것도 항상 그런 피래미들이다. 진짜 거물들은 권력과 인맥을 동원해서 자신의 부정을 숨겨버린다. 어둠의 세계에서도 피해를 보는 것은 항상 약자들인 셈이다.

야가미의 얼굴도 천상 악당의 얼굴이지만, 작품 속의 여의사는 야가미에게 이런 말을 한다. 얼굴이 악한 사람은 고민이 많아서 그렇게 얼굴이 변한 것이라고. 진짜 피도 눈물도 없는 악당은 오히려 선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야가미는 살인을 뺀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도피극을 벌인다. 작은 악당이 선한 인간으로 거듭나는 길은 멀고 험하지만 흥미진진하다.

덧붙이는 글 | <그레이브 디거>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 전새롬 옮김. 황금가지 펴냄.


덧붙이는 글 <그레이브 디거>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 전새롬 옮김. 황금가지 펴냄.

그레이브 디거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전새롬 옮김,
황금가지, 2007


#그레이브 디거 #다카노 가즈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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