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비운의 궁궐 사이에는 아름다운 길이 흐른다

덕수궁과 경희궁, 그리고 가장 한국적인 사진작가 배병우 사진전

등록 2009.11.12 10:21수정 2009.11.12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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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뒤로 돌아가는 정동길. 은행단풍이 아름다운 길. ⓒ 전용호


관심 밖의 또 하나의 궁을 찾아서

서울 사는 게 부럽지 않은 데, 부러운 게 하나 있다. 서울에는 궁궐이 있다는 거. 가끔 서울 갈 때마다 궁궐에 간다. 서울 4대 궁은 봤는데, 5대궁이란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그러면 남은 하나는 운현궁? 아니다. 경희궁이란다. 관심 밖의 또 하나의 궁, 가보고 싶었다.


전철 노선을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어중간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시청에서 내려서 걸어가기로 한다. 지하도를 빠져 나오니 덕수궁 대한문과 마주친다. 언제 봐도 당당하고 정겨운 문이다. 다른 궁궐문과는 달리 사람들과 어울려 있다. 또 하나의 인연이 있다면 노짱! 그래서 더욱 정감이 간다.

가을에 더욱 아름다운 길

대한문 모퉁이로 돌아간다. '이제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해갔지만~ 덕수궁 돌담길에 아직 남아있어요~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 <광화문 연가>를 흥얼거린다. 노래로만 들었다. 그 길을 처음 걸어간다. 아! 이렇게 아름다운 길이 도심 속으로 흐르고 있다니. 낙엽이 뒹굴고 노란 은행잎이 하늘을 장식하는 아름다운 길.

사람들이 서둘러 걷는다. 점심 무렵. 그 길에는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이 함께 재잘거린다. "앗! 밟았다." 길바닥에는 노란 은행잎만 깔린 게 아니라 은행 열매들이 고리한 냄새를 풍기며 군데군데 떨어져 있다. 나도 가끔 밟는다. 딱! 경쾌한 소리에 좋아해야 할지…. 왠지 밟지 말아야 할 것을 밟은 기분. 그래도 소리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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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길. 고풍스러운 길이다. 마치 유럽의 어느 골목처럼. ⓒ 전용호


정동길. 서울의 중심에서 근대화 과정을 지켜보았던 길. 오래된 건물들이 아직 그대로 남아있다. 붉은 벽돌로 쌓아올린 집. 마치 유럽의 오래된 도시를 걷는 기분이다. 길옆으로 아름다운 카페도 있지만 들어가 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사진을 찍고 있는 내 모습을 본 외국청년이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인다. "굳 잡" 영어가 짧은 나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는 것 정도.


정전(政展)마저 잃어버린 슬픈 궁궐

길은 큰길로 나왔다. 허전하다. 큰 건물 사이로 넓은 길이 지나간다. 그 사이로 사람들이 비집고 걸어간다. 큰 길을 건너 경희궁으로 올라선다. 다른 궁궐과 달리 골목을 들어서서 자리 잡고 있다. 그래도 명색이 궁궐인데 입구부터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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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 정문인 흥화문을 지나면 멀리 궁궐이 보인다. 그 옆으로 아픈 역사의 흔적이 지금도 흐른다. ⓒ 전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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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 정전인 숭정전. 원건물은 다른 곳에 있고, 새롭게 복원한 것이란다. ⓒ 전용호


그래서 안내판에도 경희궁 터라고 알린다. 경희궁은 광해군 때 경덕궁으로 창건되었으며, 영조 때 경희궁으로 이름을 바꿨다. 창덕궁과 창경궁을 합쳐 동궐이라고 부르고 경희궁을 서궐이라고 했다.

원래 경희궁은 정문인 흥화문을 비롯해 4곳에 문을 내고, 정전인 숭정전과 편전인 자정전 외에도 임금의 침전 등 수많은 전각들이 지형에 맞게 어우러져 있었다. 그러나 일제침략기에 조선총독부 소유로 되면서 전각들이 철거되거나 이전되고 궁역이 축소되어 훼손되어 버렸다. 지금의 경희궁은 일부 복원되어 예전의 웅장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지금 들어서는 문도 예전에 있던 자리가 아니란다.

그런 치욕스런 역사의 아픔도 부족한지 아직도 그곳에는 미술관 별관이 건축예술인양 자리하고 있고, 맞은편으로는 철거공사가 한창이다. 휑한 궁궐, 이곳도 궁궐의 건물들이 가득 차 있었을 테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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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 풍경. 아픈 역사를 간직한 궁. ⓒ 전용호


정문인 흥화문을 지나고 썰렁하고 어수선한 길을 지나 정전과 마주친다. 허전하게 보인다. 마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멀찍이 되살아난 낮선 풍경처럼. 궁궐은 둘러본다. 모든 게 어색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다 새로 복원한 거란다.

터만 남았던 궁궐. 조선총독부에서는 한나라의 임금이 정무를 보았던 정전마저 팔아먹었다. 그리고 지금은 어느 대학 건물로 활용되고 있단다. 얼마 전 친일 인명사전으로 논란이 한창이었다. 용서하는 마음이 아름답다고 하지만, 얼마나 더 같은 하늘 아래 살아야 할까? 더 이상 아프지 말자.

당당했던 조선의 마지막 왕을 보고 싶다

경희궁을 나와 다시 도심을 걷는다. 낡은 벽에 무한 낙서 본능도 본다. 광화문 거리도 보인다. 새롭게 단장했다고 하는 데 별로 보고 싶은 생각이 없다. 골목을 따라 덕수궁으로 찾아간다. 덕수궁 미술관에서 배병우 사진 전시회가 있다. 보고 싶다. 관람료가 입장료 포함 6천원. 잠시 망설이다 이기회가 아니면 언제 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궁으로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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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중화전. 가을이 감싸고 있다. ⓒ 전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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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했던 조선의 마지막 황제. 고종황제 ⓒ 전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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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 무리에서 이방인인 까치 한마리. ⓒ 전용호


언제 찾아도 정겨운 궁궐. 새로운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한창 보수중인 궁궐 가림막에는 덕수궁의 옛 사진과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그곳에는 고종황제의 사진도 있다. 황제. 다 스러져 가는 나라를 마지막까지 놓지 않으려고 스스로 황제라고 칭했던 분. 그립다.

석조전 앞 분수는 힘차게 솟고 그 앞 의자에 앉아 과자를 먹으며 여유를 즐긴다. 비둘기들이 모여든다. 과자를 나누어 먹는다. 비둘기들은 서로 먹겠다고 다툰다. 까치 한 마리도 기웃거린다. 이 까치 참으로 웃긴다. 과자 하나 입에 물고 있다가 또 하나 물어보려다가 있는 것 놓친다. 결국 하나 물고 저만치 잔디밭으로 날아가 먹고 온다.

나는 예술가지 사진가가 아니다

석조전 서관. 그곳은 미술관이다. 그리고 가장 한국적이라는 사진가, 소나무 사진으로 너무나 유명한 배병우 사진전이 열리고 있다. 창덕궁 후원, 알함브라 궁전, 바다, 오름, 나무 그리고 소나무. 그의 사진 속에서 바람을 만나고 안개에 휩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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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석조전 서관. ⓒ 전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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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병우 사진전 포스터. 덕수궁 석조전 서관에서는 12.6일까지 배병우 사진전이 열린다. 관람료 5천원. ⓒ 전용호


소나무 사진은 벽면의 키만큼 크다. 사진이 커도 아주 섬세하다. 소나무 비늘의 거칠거칠한 느낌이 만져진다. 이게 예술이다. 절제! 과감한 삭제. 보통 더 많이, 더 크게 담으려고 하는데. 욕심을 과감하게 버릴 수 있는 능력. 똑같이 찍으려면 할 수 있지만 욕심을 버릴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스스로 예술가라고 했는가?

사진은 현대의 붓이다. 문제는 그 붓으로 무엇을 그리는가 하는 것이다. 카메라 기술이 좋다고 모두 다 사진가는 아니다. 나는 예술가이지 사진가가 아니다. 사진은 내가 가지고 있는 감성을 표현하는 도구일 뿐이다. - 배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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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풍경. 나무 아래 의자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 전용호

덧붙이는 글 | 11월 10일 풍경입니다.


덧붙이는 글 11월 10일 풍경입니다.
#경희궁 #덕수긍 #정동길 #배병우 #아름다운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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