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에 서려 있는 정조의 삶의 자취

[역사의 숨결을 따라 살펴보는 우리 궁궐] 5

등록 2009.11.14 14:49수정 2009.11.14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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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문불여일견

세종과 더불어 최고의 성군으로 꼽히는 이가 정조이다. 특히 2000년대 후반으로 들어오면서 이른바 '정조 열풍'이라 할 만큼 정조와 관련된 드라마의 방영, 소설과 교양물 등의 출간이 봇물 터지듯 이루어졌다.


하지만 올해 2월 정조와 심환지(沈煥之) 사이에 오고 간 정조의 친필편지가 소개되면서 학계는 물론 사회 일각에 큰 파장이 일었듯 정조와 그 시대의 역사상, 문화상을 밝혀줄 자료는 -발견되지 않은 것까지 합하여- 그 양질을 이루 헤아릴 수 없음에도, 이들 드라마나 소설, 교양물 등은 이에 관해 제대로 살펴보지 않음으로써 정조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불러 일으켰는지 몰라도 정조와 그 시대상을 올바로 조명하는 데는 매우 미흡했다.

이는 정조의 삶의 자취를 살펴보는 데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이는 정조와 그 시대를 가장 이해하는 가장 기초적인 것임에도 우리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 분명 정조가 궁궐 안에서 태어나고 승하했으며, 또한 대부분의 삶을 보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정작 그 구체적인 장소가 어디인지는 잘 모른다. 정조와 전혀 관련이 없는 경복궁에서 정조의 자취를 찾으려는 사람, 궁궐로서의 모습을 거의 잃어버린 경희궁이 정조가 어린 시절을 보내고 즉위를 했던 곳임을 알았을 때 탄성을 지리는 사람 등등. 그러한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안타까움과 씁쓸함을 지워버릴 수 없었던 한편으로 우리의 역사교육에 대한 반성이 들기도 했다.

창덕궁(昌德宮)과 창경궁(昌慶宮), 경희궁(慶熙宮)에는 정조의 삶의 자취가 고스란히 서려 있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 했다. 정조와 그 시대의 역사의 숨결을 직접 느껴보는 것만큼 이 시대를 이해하는 좋은 방법도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기서 답사가 가진 매력의 하나를 보게 된다. 정조의 삶의 자취가 서려 있는 궁궐 속의 주요한 몇 건물을 살펴보자.

정조의 탄생

정조가 태어난 곳은 창경궁의 경춘전(景春殿)이다. 경춘전은 환경전(歡慶殿) 옆에 동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앞면 일곱 칸, 옆면 네 칸, 모두 스물여덟 칸이다. 주변의 행각과 부속 건물은 모두 없어졌고, 이렇게 경춘전 하나만 남아 있다. 경춘전은 순조 30년(1830) 화재 때 소실되었다가 순조 33년(1833) 중건된 건물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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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춘전 창경궁의 경춘전으로서 정조가 태어난 곳이자 혜경궁 홍씨가 승하한 곳이기도 하다. ⓒ 강경순


실록에는 정조가 태어난 것에 관한 장헌세자(莊獻世子)의 태몽이 소개되고 있다. 장헌세자는 신룡(神龍)이 구슬을 안고 침실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난 뒤 손수 꿈속에서 본 대로 그 용의 그림을 그려 궁중의 벽에 걸어놓았다고 한다. 이 태몽 뒤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는 경춘전에서 정조를 낳았다(<정조실록> 권 1 정조 즉위년 3월 10일 신사). 장헌세자가 그린 그림은 아마도 이곳에 걸려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볼 수 있다.

경춘전은 주로 왕실 여인들의 공간이었던 것 같다. 특히 흥미로운 사실은 이곳에서 혜경궁 홍씨가 승하했다는 것이다. 정조의 탄생과 그의 어머니의 승하가 겹친 곳이라……. 두 사람 모두 참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산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 흥미로운 사실 속에서 알 수 없는 애절함이 느껴진다.

장헌세자의 훙서

정조가 11살이 된 영조 38년(1762)은 바로 장헌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조선 왕실 최대의 비극이 일어난 해였다. 창경궁의 문정전(文政殿)은 그 결정적인 계기가 발생한 곳이었다.

문정전은 앞면 세 칸, 옆면 세 칸, 모두 아홉 칸이며, 지난 1986년 복원되었다. 참으로 묘한 것은 숭례문에 불을 질렀던 사람이 그 전에 이곳 복원된 문정전에 불을 냈다는 사실이다. 다행히 그 불길은 문만 태우고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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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전 창경궁의 문정전이다. 장헌세자의 훙서가 일어났던 하나의 결정적인 계기가 제공되었던 비극의 장소이다. ⓒ 강경순


창경궁의 편전이다. 편전은 국왕과 신료들의 공식적인 정무의 공간이다. 하지만 혼전(魂殿)으로 자주 쓰이기도 했다. 혼전이란 종묘(宗廟)에 신주(神主)가 부묘(廟)되기까지 그 혼이 의지하고 있는 신주를 모시는 공간을 말한다. 그런데 왕후의 신주는 그 왕후의 국왕이 승하하고 그 신주가 부묘될 때까지 종묘에 부묘되지 않는다. 그래서 정성왕후 서씨(貞聖王后 徐氏)가 영조 33년(1757) 승하했음에도 혼전은 계속 있었던 것이다. 그 이름은 휘령전(徽寧殿)이었으며, 그곳이 바로 문정전이었다.

물론 장헌세자의 훙서에는 대단히 복잡한 사정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이 문정전과 관련된 경우만을 살펴보면 이렇다. 당시 영조는 장헌세자에게 휘령전의 예를 행할 것을 명했으나, 장헌세자는 병을 칭하여 오지 않았다. 이에 화가 난 영조가 장헌세자를 불러 자결을 명했고, 장헌세자는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신하들이 달려들어 만류하면서 자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신 영조는 뒤주를 가지고 와 직접 장헌세자를 가두었다. 그리고 이날 장헌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았다(<영조실록> 권 99 영조 38년 윤5월 13일 을해). 뒤주가 두어진 곳은 선인문(宣仁門) 안쪽이라고 한다.

8일 뒤인 윤5월 21일 장헌세자는 훙서하였고, 영조는 이를 후회하며 왕세자의 호를 회복시켜주고, 시호를 사도(思悼)라 내렸다(<영조실록> 권 99 영조 38년 윤5월 21일 계미). 그러나 죄인의 아내, 아들이 된 혜경궁 홍씨와 왕세손(뒤의 정조)을 영조는 끝까지 보호해주었고, 결국 영조의 뒤를 이어 왕세손은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장헌세자의 죽음은 영조는 물론 혜경궁 홍씨, 정조에게는 천추의 한으로 남았다.

정조의 즉위

정조는 왕세손 시절 주로 경희궁에 머물면서 꾸준히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경희궁의 숭정문(崇政門)에서 왕위에 올랐다. 영조는 재위 52년으로 역대 국왕 가운데 가장 길었으며, 향년 83세로 역시 역대 국왕 가운데 가장 장수했다. 정조는 영조가 승하한 5일 뒤에 왕위에 올랐다(<정조실록> 권 1 정조 즉위년 3월 10일 신사).

국왕의 즉위는 전왕이 승하한 뒤 그 빈전(殯殿)이 있는 궁궐의 법전(法殿)이나 그 법전의 전문(殿門)에서 치르는 것이 관례였다, 영조가 승하한 곳은 경희궁의 집경당(集慶堂)이었므로(<영조실록> 권 127 영조 52년 3월 5일 병자), 관례에 따라 정조는 숭정문에서 즉위한 것이다. 현재 숭정문은 발굴조사 뒤 복원된 건물이며, 집경당은 남아 있지 않다.

정조 때의 문얘부흥과 개혁정치의 산실, 규장각

정조와 그 시대 하면 빼놓을 수 없는 하나가 있다. 이는 정조뿐만 아니라 고종까지 관통하는 키워드이기도 하다. 바로 규장각(奎章閣)이다.

실록에는 정조 즉위년 9월 25일에 규장각을 창덕궁 북쪽의 금원(禁苑)에 세우고 관원을 두었다는 내용이 보인다(<정조실록> 권 2 정조 즉위년 9월 25일 계사). 규장각의 본관은 2층의 주합루(宙合樓)이다. 궁궐의 2층 누각 건물은 2층의 이름은 누, 1층의 이름은 각이다. 이 주합루도 마찬가지인데, 그 1층이 바로 규장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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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각 규장각의 본관인 창덕궁 후원의 초입에 자리한 주합루이다. 이곳은 문예부흥과 개혁정치의 산실이자 정조의 꿈과 이상이 서린 곳이다. ⓒ 문화재청 조선 왕궁 사이트


규장각은 이른바 조선후기 문예부흥과 개혁정치의 산실이자 정조가 민국이라는 거대한 이상과 꿈을 키워가던 공간이었다. 규장각의 정신은 오늘날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으로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으며, 그 속의 방대한 기록문화는 오늘날 우리 후손들에게 자부심과 긍지를 심어주고 있다. 규장각은 21세기 문화중흥의 밑거름이 될 것이라 믿는다. 정조의 원대한 꿈과 이상이 비로소 그 찬연한 빛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정조의 승하

49년 평생 끝없는 열정과 호학의 삶을 살았던 정조는 창경궁 영춘헌(迎春軒)에서 승하했다. 동궐을 그린 그림을 보면 영춘헌은 한미한 선비와 같은 삶을 살았던 정조의 모습과 꼭 닮은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옛 모습을 생각해보기 어려울 정도로 많이 달라져 있다. 1983년 동물원이 옮겨간 뒤 창경궁의 임시 관리 사무소로 쓰이다가 1986년 관리 사무소가 신축된 뒤 변형된 부분을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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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춘헌 창경궁의 영춘헌이다. 원래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형되어 있다. 이곳에서 정조가 승하했다고 한다. ⓒ 강경순


정조는 즉위한 지 24년이 되는 해의 6월 28일 유시에 영춘헌에서 승하했다(<정조실록> 권 54 정조 24년 기묘). 정조의 죽음은 온 나라의 슬픔이었다. 이날 햇빛이 어른거리고 삼각산이 울었다고 실록에는 기록되어 있다.

정조의 삶에 관한 사람들이 남긴 기록은 그가 성군이었음을 드러내는데 부족함이 없다. 그래서 그의 승하를 더욱 안타까워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 아마도 정조의 독살설은 그런 의미에서 매력적으로 다가온 것 같다. 그러나 정조의 독살설은 사료를 잘못 이해하고 해석한 데서 나온 것이며, 정조와 심환지 사이에 오고 간 비밀편지는 정조의 독살설이 한낱 상상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음을 드러내주는 데 부족함이 없다. 더구나 독살설이 독재의 정당화에 이용된다든지 식민주의사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에서 이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문제이다.

이제 우리는 망령된 독살설 따위에 열광할 것이 아니라 정조 때의 치세를 중심으로 한 조선 후기의 발랄하고 역동적인 역사상에 관한 치밀한 연구와 공부에 마음을 쏟아야 할 것이다. 잠시나마 궁궐 속에 서린 정조의 삶의 자취를 돌아본 나의 발걸음은 그래서 더욱 무거워졌다.

♧ 참 고 문 헌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영인본 제 44책 및 제47책), 탐구당(보급), 1955~1958.
문영빈, <창경궁>, 대원사,
신명호, <조선 왕실의 의례와 생활, 궁중문화>, 돌베개, 2002.
유봉학, <한국문화와 역사의식>, 신구문화사, 2005.
"'정조 독살설'은 정조실록 오역 왜곡한 결과", <노컷뉴스> 2009년 9월 23일.
(기사 주소 : http://www.cbs.co.kr/nocut/Show.asp?IDX=1268400)
한영우, <다시 찾는 우리역사> (전면개정판), 경세원, 2003.
한영우 글·김대벽 사진, <조선의 집 동궐에 들다>, 열화당·효형출판, 2006.
한영우 글·김대벽 사진·김진숙 영역, <동궐도>, 효형출판, 2007.
홍순민, <우리 궁궐 이야기>, 청년사, 1999.
홍순민, "창덕궁과 후원", <한국사시민강좌> 제23집, 일조각, 1998.

인터넷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 (<정조실록> 부분 참조)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지난 2009년 11월 5일~6일 다시 궁궐을 답사하면서 기존에 써두었던 여러 생각들을 바탕으로 정조의 삶이 서린 곳을 밟아보면서 느낀 점까지 포함하여 여기에 여러 참고문헌과 함께 새로 정리한 글입니다. 본문 사진 속의 사진은 답사 당시 촬영한 것과 과거 촬영해두었던 것을 섞어 썼습니다. 그밖에 규장각과 정조 관련 내용은 간단하나마 제가 앞에 쓴 '정조의 꿈과 이상이 서린 창덕궁 후원의 주합루'를 참조하시면 되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지난 2009년 11월 5일~6일 다시 궁궐을 답사하면서 기존에 써두었던 여러 생각들을 바탕으로 정조의 삶이 서린 곳을 밟아보면서 느낀 점까지 포함하여 여기에 여러 참고문헌과 함께 새로 정리한 글입니다. 본문 사진 속의 사진은 답사 당시 촬영한 것과 과거 촬영해두었던 것을 섞어 썼습니다. 그밖에 규장각과 정조 관련 내용은 간단하나마 제가 앞에 쓴 '정조의 꿈과 이상이 서린 창덕궁 후원의 주합루'를 참조하시면 되겠습니다.
#정조 #궁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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