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한 교회, '선언'만으로는 부족하다

기독교 윤리실천운동본부의 2009 교회의 사회적 책임 선언문을 접하며

등록 2009.11.15 11:42수정 2009.11.16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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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일을 기억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지만 시간이 흘러도 화인이 찍힌 것처럼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나 이미지도 있다. 20여 년 전 서울 어느 대학에 입학하던 해, 시골에 계신 아버지가 강남의 어느 대형교회에서 만나자고 전화 연락을 하셨다. 그 교회가 농어촌 목회자들의 자녀들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장학금을 받기 위해서는 재학증명서도 내고 관계자들께 인사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교회 차원에서 농어촌 목회자 자녀를 대상으로 장학금을 지급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더욱이 교파에 관계없이 대상자를 선정하였기에 개인주의가 팽배하고 교단분열이 적지 않은 상황에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 때문에 교계신문 등 언론에서도 요즘 흔히 들을 수 있는 '사회적 책임(Church Social Responsibility; CSR)'을 다하는 교회라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 날 나는 사전약속을 하지 않은 탓인지 한동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어찌 어찌하여 인사를 하긴 한 것 같은데, 글자 그대로 인사만 하고 돌아왔다. 허탈했다. 또한 평소 모습과 달리 허리를 한껏 낮춘 아버지의 태도도 생경하기만 했다. 결과는 탈락이었다.

유쾌하지 않았던 교회 장학금의 기억

교계신문에 발표된 장학생 명단을 보니 대부분 명문대학을 다니는 학생들이었다. 일개 교회가 교파를 초월하여 농어촌 목회자 자녀에게 장학금을 지원하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두 가지 면에서 장학생 명단은 나에게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먼저 생활이 어려운 목회자를 돕는다는 취지에서 수혜 대상자를 농어촌 지역으로 한정하였지만, 서울이 아니면 다 같은 농어촌 지역인가 하는 물음이 남았다. 그 다음으로 교회의 장학생 선정 기준도 세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교회가 속세와 다른 기준, 즉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본다" 하면서도 결국은 대학의 이름만을 본 것이 아니었던가? 실상 내가 정확히 어떤 이유로 탈락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아무도 나에게 무엇이든 물어 보지 않았다는 것만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이와 달리 훗날 나는 외국의 어느 공익재단의 장학금을 받게 되었는데, 장기간의 서류심사와 집중 인터뷰가 쉽지 않았지만 유쾌하였다. 그들은 내가 어느 대학을 나왔는가 보다 내 중심, 즉 '나'라는 인간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참으로 묘한 경험이었다. 흔히 '세상'이라고 표현하는 교회 밖의 가치와 교회 내의 신앙적인 가치가 상호 전도되어 내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 후로 나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중심을 보신다는 설교자의 말들이 솔직히 믿겨지지 않는다. 경험해보지 못한 메시지, 관념의 유희라고밖에 볼 수 없는 말 묶음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한국 기독교, 그들의 사회적 책임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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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교회의 사회적 책임 컨퍼런스 참여자들이 주제발표를 듣고 있다. ⓒ 기독교윤리실천운동본부


최근 언론 보도에 따르면 '기독교 윤리실천운동본부'라는 단체와 '교회신뢰회복 네트워크'가 공동으로 개최한 '2009 교회의 사회적 책임 컨퍼런스'에 참여한 개신교회 목회자들이 공동으로 '교회의 사회적 책임 선언문'을 발표하였다고 한다.

각자 특색 있는 목회로 명망을 얻고 있는 '지구촌교회'의 이동원, '높은뜻숭의교회' 김동호 목사를 비롯한 42명이 발표한 실천내용은 간단하다. 요약하면 앞으로 교회가 한국사회에서 발생하는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앞으로 지역 사회의 필요와 요청에 응답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의 '사회적 책임 선언'이 이루어진 배경에는 최근 발표되었던 '2009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에 대한 문제의식이 놓여 있다.

기독교 윤리실천운동부와 바른교회 아카데미가 전국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 3명 중 1명은 한국 개신교회를 신뢰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신뢰하지 않는 이유는 교회지도자·교인들의 언행불일치(32.2%), 무분별한 선교(10.0%), 타종교비방(9%), 기업화 현상(7.4%) 등이 지목됐다. 반면에 개신교회를 '신뢰한다'는 응답은 19.1%에 불과하였다.  

2009년의 여론조사결과는 2008년의 결과와 대동소이하다. 즉 여전히 개신교회와 목회자에 대한 사회적 신뢰도가 현저히 낮은 수준에 머무르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이 때문에 컨퍼런스에 참여한 목회자들이 한국 교회의 사회적 신뢰 하락에 대한 교회와 목회자들의 책임을 통감하며 앞으로 적극적으로 지역사회를 섬기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원론적이지만, 개신교회에 불리한 여론조사결과를 스스로 발표하고 교회의 사회적 책임실천을 다짐했다는 점에서 고무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들이 감당하고자 하는 사회적 책임의 내용이 무엇이며,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어서 공허하다.

이번의 '사회적 책임 선언'이 선언에만 그치지 않으려면

그래서 기독교 윤리실천운동본부의 홈페이지를 찾았다. 운동본부의 조직도를 살펴보니 앞서 언급한 장학금사업을 했던 교회의 목사님과 장로님도 이사직과 자문역을 맡고 계셨다. 뿐만 아니라 그 교회 담임목사직을 자발적으로 사임하시고 분당에서 교회를 개척하신 목사님의 이름도 이사진에서 보인다.

2007년 아프간 단기 선교단의 피랍으로 사회적 주목을 받았던 교회이다. 청년시절 가치의 전도를 경험케 한 교회였지만, 모든 것을 회의하고 부정적으로 볼 것은 아니다. 더욱이 스스로 잘했다는 것도 아니고 '사회적 책임'을 통감한다는 점에서는 기대하고 지켜 볼 일이다.

그러나 교회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중심을 보신다는 것을 선언할 수 있지만 실천은 별개의 문제이다. 또한 이제까지 한국교회에 회개와 반성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한국교회는 여태껏 쇄신의 물결을 이루어내지 못했을까? 그동안 교회나 목사에 대한 신뢰도 저하를 나타내는 통계나 여론조사가 없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한국 교회가 크기와 영향력에 대한 집착을 끊기 전에는, 종교 본연의 마음 가치를 회복하기 전에는 교회나 목사들의 어떠한 선언이나 다짐도 공허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점에서 2009교회의 사회적 책임선언에 대한 진정성과 지속가능성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고 싶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본부 #사회적 책임 #개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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