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가 필립 퍼키스가 말하는 '요즘 사진'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7] 박태희 옮김, <필립 퍼키스와의 대화>

등록 2009.11.21 15:10수정 2009.11.21 15:10
0
원고료로 응원

- 책이름 : 필립 퍼키스와의 대화

- 글(이야기) : 필립 퍼키스, 막스 코즐로프, 존 브레이버맨 리바인

- 옮긴이 : 박태희

- 펴낸곳 : 안목 (2009.9.27.)

- 책값 : 8000원

 

 (1) 살아가는 사람과 살아가는 사진

 

.. "당신은 왜 그토록 선생 말을 믿는가요?" ..  (8쪽)

 

 세상에 나온 지 열여섯 달이 되어 가는 아기는 이제 말을 하려는지 혼자 종알종알댈 때가 잦습니다. '엄마'와 '아빠' 같은 말은 아주 또렷하게 합니다. 다른 말도 곧잘 따라합니다. 아직 자주 넘어지지만 집에서고 밖에서고 쉬지 않고 뛰고 엉덩방아 찧고 합니다. 옆지기는 슬슬 걱정합니다. 이 아이한테 앞으로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 모르겠다고.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아빠 된 사람으로서 아이한테 무엇을 가르쳐야 한다고 딱히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옆지기한테 미안합니다. 그러나 굳이 무엇을 가르쳐야 한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아이는 아이 결대로 살아갈 때가 가장 좋으니까요.

 

 다만, 아이가 아이 결대로 살아가기에 지금 우리 세 식구 살고 있는 동네가 아름답거나 좋으냐입니다. 아이가 이웃집에서 또래동무를 사귄다든지 동네에서 좋은 어른을 만나고 부대끼면서 배울 이야기가 있느냐입니다. 아이가 흙을 밟고 만지고 뒹굴면서 걱정없이 놀 수 있느냐입니다. 풀을 알고 나무를 알며 새를 알고 들짐승을 알 수 있느냐입니다. 꽃이든 곡식이든 푸성귀이든 손수 심고 기를 수 있느냐입니다. 이런 테두리에서는 아이를 그대로 두면서 아이 결에 따라 아이 스스로 배우고 부대끼며 살아가도록 놓아 줄 수 없습니다. 따로 무엇인가를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를 따지고 둘을 살피면, 큰도시에서 아이와 함께 살아가기란 참으로 만만하지 않습니다. 작은도시라 하여도 아이를 키우는 데에 썩 좋기는 어렵겠구나 싶습니다. 오늘날 우리 터전에서 우리 살림살이로 갈 만한 시골이 있을까 잘 모르겠고, 시골이라고 해서 가장 나은 길이지는 않다고 느낍니다. 그렇지만 사람과 흙과 물과 바람과 햇볕과 뭇목숨이 고르게 어울릴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우리 식구들부터 더 많은 돈이 아닌 더 즐거운 삶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 식구들부터 더 단단한 가방끈이 아니라 더 아름다운 삶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 식구들부터 더 높은 이름값보다 더 믿음직한 삶을 찾아야 합니다.

 

 옆지기와 저는 서로서로 날마다 근심을 하고 걱정을 합니다. 우리가 우리 삶터를 어디로 옮기든 우리는 우리 마음을 잃지 않아야 함을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곳에서 어떻게든 재개발이 안 되는 가난한 동네를 찾아내고 새집을 얻어 지낼 수 있으면, 이 도시에서도 슬기롭고 착하게 살아가는 길을 찾을 수 있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들을 보았을 때 그들의 음악(재즈)이 들렸어요. 나도 그런 작업을 하고 싶었습니다 … 예술은 늘 인간의 안쪽과 바깥쪽을 함께 지향합니다. 로버트 프랭크는 《미국인들》을 통해서 그의 내면과 더불어 1950년대 미국의 현실을 동시에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프랭크의 사진이 워커 에반스의 사진보다는 더 파격적입니다." "35mm 카메라로 찍었기 때문입니다. 자유롭고 낭만적이며 생생함이 살아 있지요. 블루스, 재즈의 느낌입니다 … 숨소리가 들리는 게 당연하다는 얘기지요." ..  (21∼22쪽)

 

 골목길을 사진으로 담을 때 빛살이 좋은 곳이 어디인가를 여쭙는 글을 읽습니다. 깊은 새벽에 조용히 생각에 잠기다가 또박또박 댓글을 달아 놓습니다. '골목길 빛깔을 제대로 느끼고 싶으시면, 제가 몇 군데 적바림한 동네에 있는 여인숙이나 여관에서 하룻밤을 묵으셔요. 그러면서 새벽부터 깊은 밤까지 하루 내내 해가 어떻게 걸려 있고 소리와 바람과 빛살과 사람이 어떻게 복닥이며 섞이는가를 그저 온몸으로 껴안아 보셔요. 그러면 됩니다. 그렇게 느끼고 나서 사진기를 찾아들고 걸어다니면, 내 눈에 보이는 모든 모습은 고스란히 예술입니다.'

 

 저는 제가 사진을 아주 잘 찍는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저는 제가 사진을 그저 잘 찍는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저는 제가 사진을 찍는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저는 늘 제가 다니는 곳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1992년부터 다닌 헌책방에서는 단골이나 손님이 아닌 그예 '헌책방 이웃'이요 '헌책방 동무'입니다. 우리 아버지 또래 아저씨들이 일구는 헌책방에서는 '헌책방 이웃'입니다. 저하고 열 살 안쪽으로 나이가 벌어진 분들이 꾸리는 헌책방에서는 '헌책방 동무'입니다. 아버지 또래하고 동무 또래 사이에 있는 분들이 가꾸는 헌책방에서는 '헌책방 길벗'입니다. 오래도록 헌책방에서 나란히 숨을 쉬었고, 같이 책을 만졌으며, 서로서로 어울렸습니다. 제가 헌책방을 담는 사진은 작품이 아니고 예술이 아니며 그저 삶입니다. 제 삶이며 헌책방 일꾼 삶이고 헌책방이라는 책쉼터 삶입니다.

 

 지난 2007년에 돌아온 고향 인천 골목동네에서 골목길을 사진에 담을 때에도 매한가지입니다. 저한테는 저 스스로 제 삶터가 골목동네이고 제 모든 동무들은 골목동네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이제 숱한 동무들은 골목동네를 떠나 아파트나 빌라에서만 삽니다. 아직까지 골목동네에 남은 어릴 적 동무는 몇 안 됩니다.

 

 저는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살거나 충북 충주에서 살 때에 늘 작은 집이나 방에서 지냈습니다. 제 터전은 작았고, 제가 건사하는 책을 놓을 자리를 따로 마련했습니다. '제 터전'보다 훨씬 넓은 자리를 책한테 내주며 지냈습니다. 인천으로 돌아와서는 동네 도서관을 열었습니다. 세 식구 지내는 살림집은 따로 조촐하게 마련했습니다. 지난겨울과 지지난겨울에 살던 곳은 겨울이면 집안에서도 물이 어는 썰렁한 옥탑집이었고, 올겨울을 나는 곳은 추위에도 제법 따뜻한 오래된 벽돌집입니다. 올겨울을 앞두고 이 집에서는 글을 쓰거나 밥을 할 때에 추위를 느끼지 않습니다. 지난겨울까지 살던 살림집에서는 집안에서도 두툼한 겉옷을 껴입고 언손을 호호 녹이며 지내야 했습니다. 지난 1995년부터 부모님 집을 나와서 살림을 한 뒤로, 저로서는 처음으로 '안 추운 겨울'을 맞이하겠다고 느낍니다. 이제까지 지냈던 제 살림집에서는 겨울이면 집안 온도가 영 도 밑으로 떨어졌습니다.

 

a

예쁜 집을 보면 늘 '아!' 하는 짜릿한 한 마디가 터져나옵니다. 그러고는 이 집을 둘러싼 동네 모습을 이날 한 번이 아니라 틈틈이 다시 오고 또 오며 새롭게 담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비오고 눈오고 흐리고 맑고, 어둡고 밝고, 새벽이고 낮이고 아침이고 저녁이고 밤이고. ⓒ 최종규

예쁜 집을 보면 늘 '아!' 하는 짜릿한 한 마디가 터져나옵니다. 그러고는 이 집을 둘러싼 동네 모습을 이날 한 번이 아니라 틈틈이 다시 오고 또 오며 새롭게 담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비오고 눈오고 흐리고 맑고, 어둡고 밝고, 새벽이고 낮이고 아침이고 저녁이고 밤이고. ⓒ 최종규

 

.. "무엇보다 사진 찍는 것이 좋아서 사진을 찍는다는 생각이 좋습니다 … 나는 사진 작업을 사랑합니다. 무언가를 보존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절대 풀어낼 수 없는 무한한 수수께끼를 탐구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 오랫동안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되면 그 분야의 문제들에 대해선 정통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문제를 묻고 있는 사람에게 귀 기울일 수 있나요? 그 사람의 삶이 어떨지 감을 잡을 수 있나요? 그 사람의 삶을 느낄 수 있나요? 그 사람에게 대답할 수 있나요? … 세상에 대한 동정을 담아내기보다 그저 바라보는 것을 통해서 어떤 질서를 찾아내야 합니다. 셔터를 누를 때, 그저 관찰자로서 편견을 버리고 최대한 대상을 평등하게 대하려고 노력합니다 … 그저 바라보고 기록하는 것입니다. 인화와 편집을 할 때는 찍은 것들이 진정으로 내가 말하고 싶은 건지 고민합니다." ..  (35, 40∼42쪽)

 

 흔히 일컫기를 헌책방은 어둡고 낡고 퀘퀘한 곳입니다. 스무 해 가까이 헌책방을 이웃집 삼아 드나드는 제가 느끼기로 헌책방은 어두울 때에는 어둡지만 밝은 구석이 함께 있는 곳입니다. 낡을 때가 있으나 새로울 때가 나란히 있는 곳입니다. 퀘퀘할 때가 있으나 싱그러울 때가 골고루 있는 곳입니다. 어두우나 어둡지만 않고 밝으나 밝지만 않습니다. 두 얼굴을 즐겁게 보여주는 곳입니다. 그래서 헌책방을 사진으로 옮길 때에는 두 얼굴을 함께 느끼면서 기쁘게 바라봅니다. 낡은 모습을 담는 한편 새로운 모습을 담으며 뿌듯하다고 느낍니다. 퀘퀘한 모습을 찍는 가운데 싱그러운 모습을 찍는 동안 가슴속 깊이 사랑과 믿음을 키웁니다.

 

 으레 이야기하기를 골목길은 사라지는 곳이요 재개발로 밀어붙여 아파트로 바꾸어야 할 '주거환경개선 지구'입니다. 웬만한 사람들(거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같이 골목길을 추억이나 옛날 옛적 터전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골목길에서 골목사람이 되어 골목이웃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골목집(골목동네에서 살아가는 사람 숫자는 얼마 안 됩니다)에서는 어느 누구도 이 골목길을 사라지는 곳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곳입니다. 공무원이나 아파트 주민이 보기에는 주거환경개선 지구일지라도, 우리와 같은 이곳 골목이웃은 스스로 '고향마을'이요 '삶터'입니다. 내 아이를 낳아 키우는 곳이며, 내 어버이가 나를 낳아 기른 곳입니다. 복닥이면서 하루하루 살림을 이어온 곳이고, 넉넉하지 않다지만 우리 식구 밥벌이를 이루도록 해 준 일터입니다. 이리하여 골목마실을 하며 사진을 담을 때에는 바깥에서 골목을 바라보는 대로 드문드문 '주거환경개선 지구'다운(?) 모습을 찍어 볼 수 있습니다만, 저는 이러한 눈길로 골목길을 담지 않습니다. 골목길 나들이를 하면서 추억어린 모습을 살풋살풋 찍을 수 있습니다만, 저한테는 골목길이 삶이요 현실이기 때문에 추억어린 모습은 한 장조차 찍지 않습니다.

 

a

헌책방 책꽂이는 낡기도 하고 반듯하기도 합니다. 이 책꽂이(아래쪽)는 올해로 서른한 살이 된 녀석인데, 어느 누구도 서른한 살이나 먹은 책꽂이인 줄 알아채지 못합니다. 그냥 헌책방 책꽂이입니다. 그러나 이러하면 어떻고 저러하면 어떻습니까. 우리한테 반가울 책이 놓이는 헌책방 책 하나 깃들도록 몸을 내어준 책꽂이입니다. ⓒ 최종규

헌책방 책꽂이는 낡기도 하고 반듯하기도 합니다. 이 책꽂이(아래쪽)는 올해로 서른한 살이 된 녀석인데, 어느 누구도 서른한 살이나 먹은 책꽂이인 줄 알아채지 못합니다. 그냥 헌책방 책꽂이입니다. 그러나 이러하면 어떻고 저러하면 어떻습니까. 우리한테 반가울 책이 놓이는 헌책방 책 하나 깃들도록 몸을 내어준 책꽂이입니다. ⓒ 최종규

 

 우리 아버지가 보기에는 참 비좁고 우중충하다 싶은 제 살림집인데, 이런 살림집에서 한식구로 지내는 옆지기와 아기를 사진으로 담으면서 우리 삶이 우중충하다거나 꾀죄죄하다거나 어둡다고 느낀 적이 없습니다. 아기가 웃으면 웃는 대로 울면 우는 대로 우리한테 고맙고 기쁘며 거룩한 삶입니다. 신나고 재미나고 놀라운 하루하루입니다. 밥숟갈을 들듯 사진기를 듭니다. 밥그릇을 비우듯 필름을 쓰고 메모리카드를 채웁니다.

 

 저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입니다. 제 사진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이 부대끼는 삶입니다.

 

 (2) 살아가는 눈으로 살아가는 목소리를 뽑아내기

 

.. "인화를 통해 나를 표현하기보다는 그저 원래의 상태에 예민하게 반응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진이 우울하고 어둡거나 입자가 거칠다면 실제로 그곳이 어두웠기 때문입니다 … 그렇습니다. 내가 원래 보았던 것을 그대로 옮길 뿐입니다 … 먼저 셔터를 누릅니다. 자기 표현에 대한 생각은 부차적입니다. 자기 표현은 저절로 발생한다고 생각합니다." ..  (24, 25, 28쪽)

 

a

겉그림. ⓒ 안목

겉그림. ⓒ 안목

 지난 2005년 2월에,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 노트》(눈빛)라고 하는 얇은 책이 나왔습니다. 저는 이 얇은 책 하나를 서울 혜화동에 자리한 인문예술책방 〈이음아트(이음책방)〉에서 만났습니다. 빈자리 많고 사진 몇 점 안 담았으면서 150쪽으로 엮었고 책값은 7500원씩이나 붙였다고 투덜거리면서 이 책을 사들었습니다. 하루 아닌 한 시간 만에 다 읽어냈습니다. 한 시간 만에 다 읽은 뒤 한 번 더 읽었고, 며칠을 두고 곰곰이 삭이면서 좀 비싸게 붙인 책값이 그리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번 보고 버릴 책이라 한다면 비싸구려 책값이지만, 두 번 볼 뿐 아니라 거듭거듭 되읽으면서 책꽂이에 오래도록 꽂아 놓을 책이라 한다면 알맞춤한 책값이구나 하고 받아들였습니다.

 

 올 2009년 9월에, 《필립 퍼키스와의 대화》(안목)라고 하는 또다시 얇은 책이 나옵니다. 이번 얇은 책은 고작 94쪽이며 책값은 8000원이고 사진은 석 장 담깁니다. 이번에도 서울 혜화동 〈이음아트〉에서 이 책을 만납니다. 이번에는 이 얇은 책뿐 아니라 《The Sadness of Men》(Quantuck Lane Press,2008)이라고 하는 도톰한 사진책 하나를 함께 만납니다. 2005년 필립 퍼키스 책을 우리 말로 옮긴 박태희 님이 옮긴 둘째 책 《필립 퍼키스와의 대화》인데, 박태희 님은 아예 출판사 '안목'을 등록해서 이번 얇은 책 하나를 내놓고, 필립 퍼키스 님 사진책 하나를 정식수입해서 한국에서 이이 작품을 함께 들여다볼 수 있도록 마련해 놓습니다.

 

 책 두께와 책값을 살피고는 빙긋 웃습니다. 속으로 생각합니다. '사진 찍는 사람한테 군더더기 말을 길게 늘어놓는다고 사진을 더 잘 읽거나 더 잘 느끼거나 더 잘 찍거나 더 잘 나누겠나? 할 말만 하고 들을 말만 들으며 새길 말만 새겨도 되지.' 8000원짜리 가냘픈 책을 사듭니다. 오만 몇 천 원짜리 사진책까지 함께 살까 하다가, 비닐이 뜯긴 모습을 보며 '다음주에 와서 사자'고 생각합니다. 비닐이 뜯긴 책이니 좀더 많은 사람들이 이분 사진책을 이 책방에 들를 때에 구경해 보도록 놓아 주고 싶습니다. 〈이음아트〉 일꾼은 책손이 '비닐 감긴 책'을 들여다보고 싶어하면 서슴지 않고 비닐을 북북 뜯어서 얼마든지 구경해 보도록 해 줍니다. 그러나 어쩐지 미안해서 저는 꼭 살 책만 살핀 다음 책값을 치러고야 비닐을 뜯습니다. 이번 이 책은 어차피 살 생각이지만, 제가 사고 나면 비닐 뜯긴 책은 없어질 테니, 이렇게 열려 있을 때에 한 사람이라도 더 알아보면 좋겠다고 혼자서 생각해 봅니다.

 

.. "요즘 학생들의 사진은 달라요. 사진이 정보에 가깝습니다. 디지털 매체는 당신이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정보를 담아내지요. 정보의 양이 많아진다고 풍부한 감성이 담기는 건 아니에요. 그래서 감정의 톤을 제대로 살려내기 위해선 디지털이 할 수 있는 부분을 제한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 8×10뷰 카메라와 삼각대를 쓰고 싶지는 않아요. 내 방식으로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 지금의 사진은 90프로가 아이디어로 시작해서 아이디어로 끝납니다. 사진가는 아이디어를 갖고 주제를 찾아나서거나 아이디어를 완성해 냅니다. 나머지 10프로의 사진들만이 카메라를 들고 어딘가로 가서 눈앞에 있는 대상을 물끄러미 바라본 결과물이지요 … 거의 모든 것이 계획된다고 보면 됩니다 … 지금 우린 방안에 앉아 모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보지 못한 실제는 어디에도 없어요." ..  (31∼33쪽)

 

a

사진을 찍는 필립 퍼키스. 한국에서. ⓒ 안목

사진을 찍는 필립 퍼키스. 한국에서. ⓒ 안목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 노트》를 읽을 때에도 재미있었는데, 《필립 퍼키스와의 대화》를 읽을 때에도 재미있습니다. 필립 퍼키스 님은 그야말로 군말 한 마디 섞지 않습니다. 알짜 말만 펼칩니다. 그런데 알짜 말만 펼친다고 해서 딱딱하다거나 따분하다거나 골때리지 않습니다. 생채식을 사랑하는 이들이 더도 덜도 먹지 않고 꼭 알맞춤하게만 풀을 먹듯, 필립 퍼키스 님은 우리 마음밭에 피가 되고 살이 될 말만 콕콕 집어서 들려줍니다. 책을 마무리하며 옮긴이 박태희 님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 "프랑스 요리를 생각해 보세요. 결코 손님을 배불리 먹이지 않습니다. 좀 부족한 듯 느껴지면 아쉬움이 들고 손님들은 다시 돌아옵니다. 반면 미국 요리는 배가 터질 만큼 많은 양으로 쉽게 질려 버리지요.(89쪽)" 하고 당신 삶을 보여줍니다. 이에 옮긴이 박태희 님은 "그래도 전 배부른 편이 좋아요." 하고 이야기합니다. 이 말을 들은 필립 퍼키스 님은 "하하하." 하고 웃습니다.

 

 저도 이 대목을 끝으로 책을 덮으며 "하하하." 하고 웃습니다. 그러면서 차분히 돌아보았습니다. 제 삶을 돌아보건대, 제 삶에는 '군말 없이 알짜 말만 콕콕 집어서 펼칠' 때가 있는 한편, '군말 알짜 말 가리지 않고 배터지게 늘어놓는' 때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때 가운데 어느 때가 더 낫다고는 따로 생각하지 않는데, 그저 두 모습은 모두 제 모습이라고 느끼며 어느 쪽으로 사람들 앞에 선다 할지라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군더더기 없는 삶은 군더더기 없는 대로 좋고, 군더더기 믾은 삶은 군더더기 많은 대로 좋습니다. 가끔은 떡이 되도록 술을 퍼부으며 몸을 괴롭히며 마음을 달래니까요. 날마다 더도 덜도 말고 꼭 알맞게만 한두 잔을 즐기면 하루 마무리가 흐뭇하지만, 때때로 좀 넘치는 날이 있어도 괜찮습니다. 때때로 아무것도 안 먹고 조용히 지나가도 괜찮고요.

 

.. "불현듯 무언가 다가오는 순간 셔터를 누릅니다. 내면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야만 합니다. 단지 바라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 변화와 다양함은 형식에 있기보다 내용에 있습니다 … 내 작업이 어떤 의미인지 나도 모르고 스스로 예술가라는 의식도 없어요. 오로지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는 행위에 모든 의미와 모든 예술과 모든 감정들이 일어나도록 나를 맡기는 겁니다 … 그야말로 위대한 사진들은 '나'의 능력만으로는 나올 수가 없어요. 단지 '와! 저것 봐!' 하면서 셔터를 누를 뿐이거든요." ..  (44, 47, 76쪽)

 

a

순천땅에서 필립 퍼키스. ⓒ 안목

순천땅에서 필립 퍼키스. ⓒ 안목

 

 사진책 《The Sadness of Men》를 처음 집어들었을 때에는 후루룩 넘겼습니다. 두 번째로 사진을 볼 때에는 조금 더디 넘깁니다. 세 번째로 사진을 살필 때에는 차근차근 돌아봅니다. 그러고 네 번째로 더 볼까 하다가 그만두었습니다. 먼저 《필립 퍼키스와의 대화》라고 하는 얄팍한(얇다는 소리일 뿐입니다) 책을 읽어내고 이 사진책을 펼쳐야겠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사진을 보고 말을 보아도 좋으나, 말을 보고 사진을 보아도 좋으니까요.

 

 어느 사진쟁이 작품을 살필 때, 그 사진쟁이 작품을 먼저 보고 그 사진쟁이 삶을 귀담아 들어도 좋지만, 그 사진쟁이 삶을 먼저 들여다본 다음 그 사진쟁이 작품을 들여다보아도 좋습니다. 저는 으레 뒤쪽 길로 갑니다. 작품이 훌륭하고 아니고를 떠나, 그 사진쟁이 삶이 어떠한가를 먼저 살피거나 돌아봅니다. 그 사진쟁이 삶자리를 가만히 짚고 그 사진쟁이가 걸어간 발자국을 곰곰이 톺아봅니다.

 

.. "나이가 들고 죽음에 다가갈수록 내 자신은 줄여 가려고 노력합니다. 샌프란시스코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사진을 배웠던 안셀 에덤스가 내게 남긴 교훈입니다. 그는 해가 갈수록 더 많은 것을 사진 속에 집어넣고자 했어요 … 사진은 삶의 방식을 배우는 매체라는 것입니다. 사진은 그야말로 삶의 방식 그 자체입니다 … 우린 끊임없이 아름다움을 발견합니다. 진정으로 삶이 경이롭기 때문이지요 … 난 다른 이들이 듣고 싶은 것을 들려주거나 보고 싶은 것을 보여주는 데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  (73, 81, 82쪽)

 

 어느 문화 갈래와 예술 갈래가 안 그렇겠습니까만, 늘 살아 있는 눈이어야 합니다. 늘 살아 있는 눈으로 나를 보고 너를 보며 우리를 보아야 합니다. 늘 살아 있는 눈으로 내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옳고 즐거운가를 느껴야 합니다. 이 느낌을 고스란히 내 작품으로 담아내고, 내 작품에 담아낸 내 삶을 내 이웃들하고 오순도순 나누려는 매무새로 뻗어 나가야 합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으로 살겠다면, 사진으로 돈을 벌든 사진 아닌 일로 돈을 벌든, 무엇보다도 사진이 내 삶이어야 합니다. 돈이야 어떻게든 무슨 일을 해서든 법니다. 살림이야 어떻게든 꾸립니다. 제가 살림을 잘 못 꾸리면 옆지기가 고단할 테지만 옆지기가 당신 몸을 바치며 짊어집니다. 사진하는 사람은 당신 삶이 고스란히 사진으로 묻어날 뿐 아니라, 당신 삶이 그예 사진일 수 있게끔 가다듬고 맞추어야 합니다. 글쟁이한테도 그림쟁이한테도 책쟁이한테도 노래쟁이한테도 춤쟁이한테도 연극쟁이한테도 영화쟁이한테도 기자쟁이한테도 정치쟁이한테도 회사쟁이한테도 다르지 않습니다. 누구나 저마다 제 일로 삼고 길로 여기는 한 가지를 제 삶으로 추슬러 내야 합니다. 이럴 때 비로소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다." 하고 이름쪽을 내밀 수 있어요. 아니, 이렇게 살아간다면 이름쪽을 내밀지 않아도 맞은편에서, "아, 당신은 무엇을 하는 사람이군요." 하고 알아보면서 꾸벅 절을 합니다.

 

a

짧은 동안에도 한국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는 필립 퍼키스. ⓒ 안목

짧은 동안에도 한국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는 필립 퍼키스. ⓒ 안목

 

.. "내 생각에 가장 불행한 사람들은 자신의 작업과 일을 섞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작업은 아마추어처럼 하고 돈을 버는 일은 프로처럼 하세요." "예술가들이 대중적으로 성공할수록 작업이 더 형편없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단순합니다. 성공하면 계속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난 후에 그 음식을 다시 먹고 싶은 것과 같아요. 하지만 두 번째 먹을 때는 첫 번째보다 맛이 덜하고 세 번째 먹을 땐 슬슬 지겨워져요 … 유명해진 후에도 작업이 발전한 예술가의 이름을 자신 있게 대기란 정말 힘들 것입니다. 최근에 예술대학들이 학생들에게 졸업과 동시에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도록 장려합니다. 진정한 예술가로 성장시키는 게 아니라 상업적인 작가 양성에 혈안이 된 거지요 … 절대 학생들의 비전을 바꾸려고 시도해선 안 됩니다. 그들의 방식이 틀렸다고 판단해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린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  (84∼86, 87쪽)

 

 사진책 《The Sadness of Men》에도 필립 퍼키스 님 삶이 뚝뚝 묻어 납니다. 글책 《필립 퍼키스와의 대화》에도 필립 퍼키스 님 삶은 알알이 배어 있습니다. 어느 쪽을 먼저 살피든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어느 쪽에서 가슴울림을 느끼든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느끼려고 이이 책을 우리 손에 쥐느냐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고 싶어 이이 책을 읽으면서 '무언가를 배우려' 하느냐입니다. 우리는 사진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가운데 '어떤 사진찍기 이야기를 듣고자' 하느냐입니다.

 

 먼저 내 몸가짐을 다소곳하게 매만져야 합니다. 먼저 내 매무새를 얌전하게 고쳐야 합니다. 먼저 내 넋과 얼을 아름답게 돌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됩니다. 이렇게 하면 《The Sadness of Men》하고 《필립 퍼키스와의 대화》에서 쩌렁쩌렁 외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립니다. 이렇게 하면 이 두 책에서 조곤조곤 속삭이는 사랑노래가 내 가슴팍에 꽂힙니다. 이렇게 하면 이 책장 글줄과 사진 마디마디에 깃들어 있는 눈물과 땀과 웃음과 꾸덕살을 살가이 어깨동무할 수 있습니다. 저 멀리에, 내가 외롭지 않도록 내 사진길을 북돋우며 나 또한 그이를 북돋울 수 있는 좋은 사진동무가 손을 흔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진밭은 온통 '세상을 모르는 만듦사진'뿐이지만, 이 만듦사진 울타리를 훌훌 떨쳐내면서 해맑은 '삶사진'을 씩씩하고 다부지게 이루어 갈 내 애틋한 사진길을 홀가분하게 내디딜 수 있습니다. 사진은 기쁨이요 슬픔인 내 삶입니다. 사진찍기는 눈물이요 웃음인 내 삶자락입니다. 사진쟁이는 바보이면서 일꾼입니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필립 퍼키스와의 대화

막스 코즐로프 외 지음, 박태희 옮김,
안목, 2009


#사진책 #사진찍기 #책읽기 #사진읽기 #사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종영 '수사반장 1958'... 청년층이 호평한 이유
  2. 2 '초보 노인'이 실버아파트에서 경험한 신세계
  3. 3 '동원된' 아이들 데리고 5.18기념식 참가... 인솔 교사의 분노
  4. 4 "개도 만 원짜리 물고 다닌다"던 동네... 충격적인 현재
  5. 5 "4월부터 압록강을 타고 흐르는 것... 장관이에요"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