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조사야 광고야?

등록 2009.12.06 16:00수정 2009.12.06 16:00
0
원고료로 응원

선거의 경우도 실제의 투표는 예측된 숫자를 확인하는 것에 불과한 것인지[그렇다면 투표는 현실의 사건이 아니라 여론조사의 대용품에 불과한 것이며, 조사는 지수화(指數化)된 시뮬레이션 모델이기 때문에 현실을 결정하는 인자(因子)가 된다] 아니면 예측이 본래 여론을 반영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 장 보드리야르, <소비의 사회>

이윤기 기자의 '못 믿을 여론조사 과정, 제비뽑기만도 못하군'이란 기사를 흥미롭게 읽었다. 특히 여론조사에 의한 공천 결정이 제비뽑기보다 못하다는 결론은 자못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여론조사 방식 자체에서 노정되는 결함 못지 않게 우리가 경계해야 할 부분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바로 장 보드리야르가 지적한 여론조사의 '자기충족적 예언' 기능이다.

 

잘 알다시피 '자기충족적 예언'(자기실현적 예언, 자성적 예언)이란 말하는 것 그 자체에 의해서 실현되는 예언을 의미한다. 타인의 기대나 관심으로 인하여 능률이 오르거나 결과가 좋아지는 현상인 '피그말리온 효과'(로젠탈 효과), 아무 효과 없는 약이 효력을 발휘하는 '플라시보효과(위약효과), 이와는 반대로 남들에게 무시당하고 부정적인 낙인이 찍히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쁜 쪽으로 변해가는 현상인 '스티그마효과'(낙인효과) 등은 모두 자기충족적 예언과 관련 있다.

 

자기충족적 예언은 광고에도 활용되는데 보드리야르에 의하면 "광고는 무엇을 이해하게 하거나 배우게 하는 것이 아니라 기대하게 한다는 점에서 예언적인 말"이며, "광고가 하는 말은 미리 존재하는 사실(사물의 사용가치에 대한 사실)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광고의 예언적 기호가 만들어내는 실재성에 의해 추인(追認)되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또한 광고는 "사물을 의사(擬似)이벤트로 만드는데, 이 의사이벤트가 광고의 언설에 대한 소비자의 동의를 통해 일상생활의 실제적인 사건이 되는" 것이다.

 

다소 복잡한 얘기 같지만 간단히 정리하면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사실이라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사실이라고 얘기함으로써 사실이 된다"는 의미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그 비밀은 바로 동어반복에 있다. 주술사가 단순한 주문을 반복해서 외우는 것처럼 동일한 광고를 반복적으로 보여주면 동어반복 효과에 의해 인과관계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기업들이 비싼 광고비를 감수하면서 똑같은 광고를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해서 보여주는 이유다.

 

여론조사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차기 대선 후보에 대한 지지율 조사에서 특정 후보가 계속 1위를 달리고 있다는 여론조사 결과를 유권자들이 반복적으로 접한다면 그것이 동어반복을 통해 인과관계를 만들어내는 주술사의 주문이나 기업 광고와 뭐가 다르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정부에 유리한 여론조사는 재탕 삼탕 우려먹으면서도 불리한 여론조사는 포털사이트 메인에 걸리기 무섭게 사라지는 것 아니겠는가?

 

의도했든 안 했든 특정 정치인에게 유리한 여론조사 결과가 지속적으로 발표된다든지 정부에 유리한 여론조사냐 아니냐에 따라 여론조사의 노출 횟수와 기간에 차이가 있다든지 지지율이 높을 땐 수시로 여론조사를 발표하다가도 낮을 땐 잠잠하다든지 하는 것은 그 자체로 자기충족적 예언을 내포하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여론조사가 프로파간다 기능을 수행한다고 주장하거나 그것이 여론조사 무용론으로 비약되길 바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미 오래전부터 제기되어 온 여론조사의 고질적인 문제들(예를 들면 여론조사의 정치도구화, 조사 방식 등)을 더는 방치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여론조사, 그래서 더욱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여론조사조차 이미 프로파간다의 거대한 그물망에 포획된지 오래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는 없다. 보드리야르처럼 "실제의 투표는 예측된 숫자를 확인하는 것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예측이 본래 여론을 반영하는 것인지" 회의하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프로파간다의 그물코도 점점 더 느슨해질 테니까.

 

2009.12.06 16:00 ⓒ 2009 OhmyNews
#여론조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샌디에이고에 부는 'K-아줌마' 돌풍, 심상치 않네
  2. 2 경찰서에서 고3 아들에 보낸 우편물의 전말
  3. 3 '25만원 지원' 효과? 이 나라에서 이미 효과가 검증되었다
  4. 4 하이브-민희진 사태, 결국 '이게' 문제였다
  5. 5 용산에 끌려가고 이승만에게 박해받은 이순신 종손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