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인사와 책 선물

[책이 있는 삶 124] 찾고 사고 읽고 쓰고 살고 덮고

등록 2010.01.02 12:35수정 2010.01.02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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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찾고 사고 읽고 쓰고 살고 덮고

 

새책방 나들이를 하면 새로 나온 책부터 요 몇 해 사이에 나온 책을 하나하나 뒤적여 봅니다. 헌책방 나들이를 하면 갓 들어온 책부터 오래도록 꽂힌 책까지 두루두루 되짚어 봅니다. 읽을거리 하나를 사기까지 적잖은 품과 땀을 들입니다.

 

책을 살 때에는 지갑에 돈이 얼마 남아 있는지 헤아리지 않습니다. 이달 살림돈으로 얼마를 남겨 놓아야 하는지 살피지 않습니다. 책방마실을 하고 난 다음에 집으로 돌아오면서 '가방과 마음은 뿌듯한데 먹고살 걱정'으로 두 발이 무겁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내 마음밥을 채워 준 고마운 책임을 떠올리며 어떻게든 밥술을 뜨지 않겠느냐고 생각합니다. 오늘 두 끼니를 굶어도 책을 안 살 수 없습니다.

 

사들인 책을 집에서 아이 보는 틈틈이 읽든 전철길에서 읽든 뒷간에서 읽든, 언제나 품과 땀을 들여서 읽습니다. 품을 들일 만한 값이 있다고 느끼는 책을 읽으며, 땀을 들여 곰삭일 값어치가 있다고 보이는 책을 읽습니다. 거저 주는 책이라 해서 즐겁게 읽을 수 없습니다. 내 손에 쥘 만해야 비로소 읽습니다.

 

즐겁고 반갑게 읽은 책 이야기를 글로 끄적입니다. 괜히 내 품과 땀을 버리도록 했다 싶은 책 이야기를 때때로 글로 적바림합니다. 내 마음을 따숩게 보듬은 책 이야기를 쓸 때에는 이 책이 있어 내 마음밭이 더욱 넉넉해졌다는 느낌을 담아내고자 애씁니다. 내 마음을 슬프게 하는 얄딱구리한 책 이야기를 펼칠 때에는 이 책을 쓴 사람부터 얼마나 안타깝고 아쉬운가 하는 느낌을 실어내면서, 부디 다음 책에서는 글쓴이와 엮은이가 새 마음과 새 뜻을 품으며 더 애써 주기를 바랍니다.

 

좋다 싶은 책을 읽은 뒤에는 좋구나 싶은 속살대로 제 삶을 다잡으려고 합니다. 얄궂다 싶은 책을 읽은 다음에는 나 또한 이렇게 얄궂은 길로 빠질 수 있으니 내 매무새를 더 야무지게 다스려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좋구나 싶은 책이든 아쉽구나 싶은 책이든, 짧으면 한 주만에 길면 서너 해 뒤에 아주 덮고는 책꽂이에 얌전하게 꽂아 놓습니다. 이리하여 제 살림집이나 책상맡은 갖가지 책으로 늘 어수선합니다. 다 읽었어도 책꽂이로 옮겨 놓지 못하고, 천천히 읽거나 여러 차례 거듭 읽다 보니 노상 가득가득 책탑이 이루어집니다.

 

지난 12월 첫머리에 서울 혜화동 인문예술책방 〈이음책방〉에서 《아돌프에게 고한다 1∼5》(세미콜론, 2009)라는 만화책을 장만해서 세 번 읽었습니다. 그린이 데즈카 오사무 님은 4권에서 "우리(태평양전쟁 때 일본)가 배운 정의는 옳은 일을 행하는 게 아니라 상대를 위압하기 위한 허울에 불과하단 걸 깨달았지(43쪽)"하고 이야기합니다. 지난주에 서울 홍제동 헌책방 〈대양서점〉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사랑》(우석,1993)이라는 수필책을 마련해서 읽고 있습니다. 글쓴이 양희은 님은 "더구나 김민기는 작사ㆍ작곡ㆍ편곡ㆍ연주의 모든 일을 아무 계산 없이 식구에게 하듯 내게 베풀어 주기만 했다. 내가 얼마짜리의 일을 너에게 해 주었다는 식의 계산이 그에게는 도무지 없었다(46쪽)"고 이야기합니다. 헌책방 〈대양서점〉에는 양희은님 책이 여러 권 들어와 있었습니다. 책값을 셈할 때 헌책방 일꾼은 "생각 밖으로 양희은씨 책이 안 나가요. 안 사 가네"하고 얘기해 주었습니다.

 

 ㄴ. 책 선물

 

아침 열한 시가 조금 넘은 때, 아기를 안고 집을 나섭니다. 이웃동네 화평동에서 그림을 그리며 살아가는 박정희 할머님 댁에 찾아가는 길입니다. 신포시장 앞 신포과자점에 들러 보드라운 양과자 한 근을 삽니다. 어젯밤부터 콧물이 줄줄 흐르는 아기를 데리고 마실을 나와도 될까 걱정이지만, 새해에 여든여든 줄에 접어들 그림 할머님한테는 꼭 인사를 하고 싶습니다. 할머님은 "오래 산다는 건 하나님이 내려주는 축복이에요"하고 말씀하시면서도 "내가 앞으로 삼 년을 더 살지 사 년을 더 살지 어떻게 알겠어요?" 하고도 말씀합니다.

 

그러나 그림 할머님은 아흔을 코앞에 둔 이즈막에도 동네 아주머니와 할머니한테 수채그림을 가르치면서 '그림 가르치는 값'으로 당신 살림을 꾸리고 있으십니다. 할머님은 지난주에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으면서 "최 선생, 내가 그 장미 그림책이 보고 싶어서 그런데, 빌려 줄 수 있어요?" 하는 말씀을 덧붙였습니다. "그럼요, 오늘이라도 갖다 드릴 수 있어요"하고 말씀을 드렸으나 옆지기가 몸이 많이 나빠 함께 움직이지 못한 탓에 한 주를 기다렸습니다.

 

오늘이라고 더 나은 몸은 아니지만, 그래도 밝은 햇볕을 쬐고 언손 녹여 가며 골목을 걸어갑니다. 졸리기도 하고 배고프기도 한 아기는 칭얼거리면서도 엄마 아빠 말을 잘 들어 줍니다. 이제 '평안수채화의 집' 간판이 걸린 할머님 댁 앞에 닿습니다. 문을 밀고 들어서니 안쪽에서 문소리를 듣고 "최 선생 오셨나요? 들어오세요"하는 할머님 말씀이 노래소리처럼 들려옵니다.  힘겨운 걸음으로 문간에 나오신 할머니는 옆지기 모습을 보더니 깜짝 놀라고, 아빠가 안은 아기를 보며 더 크게 놀랍니다. "어머나, 이런 선물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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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rre Joseph Redoute'라는 분이 그린 장미 그림을 모은 . 다섯 해 동안 고이 간수하고 있었으나, 그림 할머님 손으로 옮겨 갔습니다. ⓒ 최종규

'Pierre Joseph Redoute'라는 분이 그린 장미 그림을 모은 . 다섯 해 동안 고이 간수하고 있었으나, 그림 할머님 손으로 옮겨 갔습니다. ⓒ 최종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결에 할머니가 넌지시 묻습니다. "저기, 이 장미 그림책, 나한테 팔 수 없어요? 내 책값 드릴게." "음, 음, 이 그림책은 선물로 드릴게요. …… 지난주에 할머님한테 전화를 받으면서 이 책은 선물로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림 할머니가 갖고 싶어하는 장미 그림책은 'Pierre Joseph Redoute(1759∼1840)'라는 분 그림을 담은 두툼한 책으로, 1999년에 'TASCHEN'에서 찍었습니다.

 

저는 이 그림책을 다섯 해 앞서 서울 낙성대역 앞에 자리한 헌책방 〈흙서점〉에서 장만했습니다. 그때 헌책방 아저씨는 책을 퍽 눅게 팔아 주었습니다. 저는 "아니, 이 좋은 책을 이렇게 값싸게 주시면 어떡해요?" 하고 여쭈었고, 헌책방 아저씨는 "아무리 좋은 책이라 해도 값을 세게 매겨 놓으면 사 보고 싶어도 못 사게 돼요. 그래서 싸게 매겨 놓을 수밖에 없어요"하고 이야기했습니다.

 

'헌책으로 싸게' 장만했다는 값으로도 여러 만 원이었습니다만, 다른 헌책방이었으면 두어 곱은 불렀음직한 책이었고, 새책은 훨씬 비쌉니다. 그러니까, 저는 1700∼1800년대에 그림을 놀랍게 그려낸 분한테서 선물을 받은 한편, 이 책을 엮은 분들한테서 다시 선물을 받았으며, 이 책을 처음 산 다음 헌책방에 내놓은 분과 헌책방 아저씨한테서까지 거듭 선물을 받은 셈입니다. 이리하여, 이 흐름에 따라 저절로 그림 할머님한테까지 선물이 이어집니다. 선물을 주고받는 동안 기쁨이 차츰차츰 커집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시민사회신문>에 함께 싣습니다.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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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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