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과 침묵이 제일 좋았다던 아들의 새 해 덕담

등록 2010.01.03 11:29수정 2010.01.03 11:29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아마 앞으로는 한 달에 한 번 정도밖에 못 만날 것 같아요..'

'그래~애? 그러지 뭐..'

 

바쁜 일이 있냐, 엄마 보러 오기 싫어 졌냐, 친할머니가 뭐라고 하더냐 등등 속으로 삼킨 말들이 주르륵 쏟아지려는 걸 꾹 참았었는데, 진짜 한 달이 다 되 가도록 전화도 뜸한 아들이 못내 서운하고 속이 쓰렸다. 잊혀지는 것이 두려우면 어찌 혼자 살 수 있으랴, 꿋꿋한 척 폼 잡으며 내 어머니가 늘상 그랬듯이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위로를 되뇌었다. 무심하기로 치면 나 또한 큰딸인가 싶을 정도였으니까.

 

진정한 '독립원년'을 맞는 경인년은 호랑이해라 TV특집극으로 호랑이 일가족의 힘겨운 사막살이가 방영되었다. 건기를 맞아 호랑이의 먹이가 되는 초식동물들은 모두 떠나버린 황량한 세렝게티 사막에서 주렁주렁 매달린 11마리의 새끼들을 이끄는 세 마리의 암호랑이들이 고달픈 사투를 벌이는 장면이었다. 날렵한 사냥솜씨나 최상위포식자의 당당함보다는 먹이고, 돌봐야 하는 식솔들 때문에 헐떡이며 일상을 헤쳐 나가는 이 땅의 가장들과 싱글맘들을 떠올리게 하는 처연한 그들의 현실이 더 와 닿았다. 하필 자식과 떨어져 어쨋거나 낯설고, 심란한 삶의 비탈길을 오르내려야 하는 내 처지에 맞닥뜨리고 보니, 뼈만 앙상하게 굶주려 도저히 무리를 따라가지 못하고 나무그늘 밑에 기어가 숨을 거두는 새끼호랑이의 잔상이 오래 남는다. 그 어미인들 어쩌겠는가! 원숭이처럼 업고 다닐 수도 없고, 낙오될 것이 뻔한 병든 새끼 곁에 남아 함께 죽음을 맞는 것은 더욱 불가능한 것이 자연의 법칙인 것을..

 

만수산에 얽혀 자라는 칡덩굴처럼 온전한 생명력만 있으면 어떤 환경에서도 살아남으리라는 강한 믿음, 어미와도 살아보고 아비와도 살아보면 나중에 그 누구인들 함께 지내지 못하랴.

 

세상과 어우러지고 소통하며 자기의 부족함을 메워가며 살아나가려면 조금 억울하고 부당해도 일찌감치 풍파를 겪으며 단단해지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고 어른이 된 아들이 담담히 소회를 말해주었으면 하는 낯 두꺼운 소망도 품어본다. 부디 앙상한 팔다리를 질질 끌며 나무 그늘을 찾아 누워버리는 새끼호랑이처럼만 되지 않기를, 인간이 호랑이보다 얼마나 더 나약한 존재인가를 깨닫는 나이까지만 버텨주기를, 서로에게 짐이 되지도 않고 공연히 미안해지지도 않는 가족으로 의연하게 살아가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가족보다 일이 우선이어서 늘 비난의 대상이 되고 소외될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와 살아가면서 아버지를 아버지가 아닌 한 남자로, 한 인간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갖게 된 아들이 대견스럽다. 꼬리표처럼 달고 다니던 '마마보이'의 낙인을 떼어버릴 수 있게 된 아들의 성장과 내면의 고통이 이제는 오롯이 한 인간으로 독립할 수 있는 뿌리의 생육이었다고 의심치 않는다. 지금은 아버지와의 따뜻하고 훈훈한 추억을 만들어가야 할 시기이지만 조만간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고 홀로 서는 때가 오면, 부족하지만 자식의 삶조차 지배하고 싶지 않았던 엄마를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품어본다.

 

십년이란 세월을 소득 없이 사과농사에 전념하다 좌절하여 죽으려고 오른 산 위에서 '자연을 그대로 놓아두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은 일본의 한 농부. 그가 십년이란 인고의 세월을 견뎌 얻게 된 수확은 평범을 뛰어넘는 기적같은 것이었다. 일 년이 지나도록 썩지 않는 사과를 길러낸 것이다. 자연은 스스로 치유의 능력을 지녔기 때문에 어떤 병충해도 이겨내었고, 일체의 농약과 화학비료를 쓰지 않고 잡초조차 그대로 자라게 한 토양은 사과나무의 뿌리를 깊고 튼튼하게 키워 줬던 것이다. 나무를 끌어안고 작은 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그 농부는 사람이기 때문에 씨앗도, 열매도 맺지 못하고 그저 사과나무에 사과가 열리도록 곁에서 도왔을 뿐이라고 했다.

 

지금이라도 지나치게 깊숙이 개입하여 아들의 마음속에 수없이 많은 상처와 흔적들을 남겼던 어설픈 엄마의 실수들을 만회하고 싶다. 결코 떼어낼 수 없을 것 같았던 자식을 떠나 멀리서 지켜보며 기다리는 모성도 세상의 잣대로 마구 재단되지 않았으면.. 자연농법을 하는 한국의 농부가 그랬다. '인공적으로 약을 치지 않은 작물은 땅에 떨어져도 수분이 빠져 말라붙을 뿐, 결코 썩지 않는다'고.

 

아버지를 따라 2010년 새해를 태백 산골 기도원에서 보내고 오던 아들이 전화를 했다. 무엇이 가장 좋았느냐, 힘들고 지루하진 않았느냐 캐묻는 어미에게 "명상시간에 침묵하는 것이 제일 좋았어요"라고 밝게 답하는 아들, 새해를 맞는 내게 더할 수 없는 덕담이다. 시골에서 기숙형 대안학교를 일 년 반 다녀본 경험이 있는지라 유기농과 채소로 이루어진 식단도 먹을만 했단다. 2박3일 동안 맛있는 태백한우를 두 번이나 먹어서 기분이 좋았다는 아들, 4백 쪽이나 되는 소설책도 독파했다고 우쭐하는 열여섯 새파란 아들, 함께 인문학 공부를 하자는 말이 입 밖에 튀어나올 뻔 했다. 지켜보겠노라고 수백 번 다짐해도 늘 앞서가며 '교육'을 시키려는 나는 '교육광신도'인 것이 분명하다.

 

'훌륭하지 않아도 비겁하지 않기, 존경받지 못해도 위선으로 포장하지 않기, 자기 삶에 당당하고 책임지는 사람 되기'를 작심하고 팔, 다리 끊어내듯 떼어 놓은 자식이지만 내 선택이 후회스럽지는 않다. 적어도 능력 없음을 권력의 힘으로 포장한 부모는 되지 않을 테니까..

2010.01.03 11:29 ⓒ 2010 OhmyNews
#가족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인생 이모작을 솔향 가득한 강릉에서 펼치고 있는 자유기고가이자 프리랜서.

AD

AD

AD

인기기사

  1. 1 군산 갯벌에서 '국외 반출 금지' 식물 발견... 탄성이 나왔다
  2. 2 20년만에 포옹한 부하 해병 "박정훈 대령, 부당한 지시 없던 상관"
  3. 3 광주 찾는 합천 사람들 "전두환 공원, 국민이 거부권 행사해달라"
  4. 4 남자의 3분의1이 이 바이러스에 감염돼 있다고?
  5. 5 "개발도상국 대통령 기념사인가"... 윤 대통령 5·18기념사, 쏟아지는 혹평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