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질했지만 마음은 행복했습니다

어느 전직 교사가 선사한 참을 수 없는 감동

등록 2010.01.07 12:55수정 2010.01.07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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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동차량 동원한 제설작업 응달진 간선도로에서 제설작업 하는 119대원들 ⓒ 김주환

▲ 출동차량 동원한 제설작업 응달진 간선도로에서 제설작업 하는 119대원들 ⓒ 김주환

100년 만의 폭설이라고 한다. 5cm의 눈이 내려도 교통대란이 발생하는 서울에 그보다 무려 다섯 배의 눈이 내렸으니 더는 할 말이 없다. 폭설도 폭설이거니와 문제는 기온이다. 연일 영하 10의 가까운 날씨가 지속되고 있어 더 문제다. 눈 내린 첫날부터 대원들과 함께 눈 사냥에 나섰으나 바닥이 얼어붙어 좀처럼 진척이 없다.


대원들을 한데 모았다.


"자, 여러분 ! 폭설도 이 정도면 재난이다. 시민의 안전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더라도 여기저기 사고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비록 119 신고는 없지만 이럴 때일수록 우리가 나서야 하지 않겠나 ! "


다행이 대원들이 흔쾌히 따라준다. 출동장구 대신 제설 삽과 곡괭이, 염화칼슘을 메고 청사 주변부터 간선 도로를 따라 제설 작업에 나섰다. 역시 신뢰가 간다. 체력이 최대 무기인 119대원들의 삽질은 가히 북한의 과거 천리마 운동의 상징인 '천 삽 뜨고 한번 허리 펴기" 수준이다.


제설 작업 이틀째, 주변 간선도로를 말끔히 제설한 우리는 목동 중심도로로 진출한다. 긴급 상황이 발생하면 충동을 해야 하기 때문에 전 대원들에게 각자 출동 차량에 탑승하도록 했다. 제설 작업 도중이라도 현장에서 출동이 가능하도록 하는 만반의 조치다.

 

그리고 간선도로 중에서도 가장 응달진 구역을 찾았다. 고층 빌딩이 마주한 곳이다. 빌딩 바람까지 교차하는 곳이라선지 오후 2시인데도 귓가에 칼바람이 스친다. 잠시라도 쉴라치면 차가운 기온이 뼈 속까지 파고드는 느낌이다. 방법은 되도록 쉬지 않고 삽질을 하는 것이다.


'삽질'이라 ! 어디서 들어본 소리다. 디지털 세대들이 구세대를 일컬어 하는 말인가.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나온다. 적어도 이 순간만은 삽질만이 최고의 선이다. 삽질이 역사의 뒤안길로 과연 사라질 날은 있을까. 곡괭이와 도끼로 얼어붙은 밑바닥의 얼음을 깨고 삽질을 해야 한다. 쉬운 작업이 아니다. 노련한 119대원들이지만 작업 수준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한 시간이 흐르고, 두 시간째 쉬지 않고 작업을 하다 보니 몸에 땀이 밴다. 매섭게  느껴지던 칼바람조차 무디게 느껴진다. 대원들이 허리를 펴고 물을 찾는다. 아차, 작업할 때 정작 긴요한 물을 준비하지 못했다. 무전으로 물을 준비해 보내라고 신속히 날린다. 그 때다. 키도 크고 우아하게 보이는 중년 여성 두 명이 다가온다. 목도리로 얼굴의 일부를 가려 모습 전체는 볼 수 없으나 눈가에 흐르는 미소만큼은 백만 불짜리다. 커다란 보온통에 대추차를 끓여 대원들에게 내민다. 아아, 이런 고마움이라니, 대원들의 얼굴이 반색이다.


"정말 고맙습니다. 아주머님!"

 

고맙다는 말은 정말 이런 때 쓰는 거라는 생각이 문득 스친다.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고마움, 목젖이 간질거리고 코끝이 시큰거리는 이 뜨거운 감정, 이런 감동은 아무 때나 느끼는 것이 분명 아닐 것이다.

 

아니, 근데 두분 아주머님  하시는 말,

 

"저희들 정말 감동했어요. 저희들 저 건물 위층에 살거든요. 그렇잖아도 이 응달진 도로 누가 치우나 걱정하고 있었어요. 마음은 있었지만 우리들이 하기에는 너무 벅차고, 요 며칠 발만 동동거리고 있었지요. 한데 오늘 119 대원들이 소방차까지 직접 몰고 와서, 그러니까 출동 대기를 여기서 하는 거잖아요. 우리가 이러면 않되겠다 싶어 이렇게 차를 끊여 왔어요."


마치 미리 준비한 원고를 읽는 것처럼 단숨에 하는 칭찬이다. 아니 감동은 우리가 아니라 두 아주머님께서 당하셨다고 한다. 자신들은 전직 교사이며 오랫동안 교편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내게 자가와 귓속에 슬쩍 속삭인다.

 

"실은 저희들이 빵을 사오려 했는데요. 인원도 많고 해서 길거리에 내놓기가 뭐하고 해서 봉투를 하나 준비했거든요 ? 그런데 아까 어떤 분에게 내밀었는데 극구 사양해서 몰래 차 안에 들여 놨어요. 책임자 같으신데 잊지 말고 대원들에게 간식을 사다 주세요. 우리에게 감동을 준 대가라고 생각하세요."

     

이를 어찌해야 하나. 당연이 사양하고 돌려주는 것이 공무원으로서 지켜야 할 행동 강령이거늘 두 분 아주머님의 그 간절하고 열망하는 눈동자 앞에 그만 할 말을 못하고 만다. 하마터면 두 분의 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릴 뻔했다. 아니, 정말 꼭 그러고 싶었다. 공무원에게는 의당 해야 할 책무와 같은 일임에도 시민의 선량함은 이토록 작은 일에도 감동을 하는구나 하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이런 시민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야말로 119정 정신 아니겠는가.           


출동 소방차량에 넣어 놨다는 봉투는 나중에 확인되었다. 금액은 10만원으로 적지 않는 액수였다. 두 분 아주머님을 찾아 돌려주는 것은 도리어 무례를 범하는 것 같아 우리 서에서 운영하는 봉사활동 모임에 찬조하기로 했다.

덧붙이는 글 | 김주환 기자는 서울소방방재본부 공무원입니다. 

2010.01.07 12:55 ⓒ 2010 OhmyNews
덧붙이는 글 김주환 기자는 서울소방방재본부 공무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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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공무원으로 33년을 근무하고 서울소방학교 부설 소방과학연구소 소장직을 마지막으로 2014년 정년퇴직한 사람입니다. 주로 화재를 비롯한 각종 재난현장에서 오랫동안 근무하였으며, 현재는 과거의 소중한 경험을 바탕으로 '소방전술론' '화재예방론' '화재조사론' 등을 집필 중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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