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환장하게 했던 한 마디

[아프리카 여행기11] '하쿠나마타타'...문제가 문제되지 않는 그곳

등록 2010.01.10 11:45수정 2010.01.10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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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없어 뭐든지 하쿠나마타타! 그들의 긍정성 ⓒ 박진희


내가 다녔던 여행지는 주로 '고생'을 감수해야 하는 나라들이었다. 참 이상하게도 그런 나라에만 마음이 끌렸다. 유럽이나 미국 같은 선진국은 왠지 나이가 많이 들어서도 편하게 여행할 수 있다는 생각에 지도를 펼치면 항상 캄보디아, 페루, 볼리비아, 케냐, 탄자니아 이런 나라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가난한 나라, 고생스런 나라(물론 전부를 가보진 않았지만, 여러 의견을 통합해본 결과)에 가면 어김없이 듣게 되는 말이 있다. 그것은 바로 "no problem"과 "don't worry"이다.


온통 불편한 것투성이인 나라에서 틈만 나면 그 나라 사람 입에서 튀어나오는 '문제없어' '걱정 마'라는 말에 처음엔 적응이 안 되서 화도 많이 냈었다.

#1. 혹시 '문제없어'라는 말이 '안녕'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no problem'이 혹 인사말은 아닐까?

그렇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 '문제없다'는 말을 참 쌩뚱맞은 상황에서 썼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문제없다', '걱정 마'라는 말을 상대방을 위로하거나 격려하는 말로 많이 쓴다. 누군가가 실수하거나 큰 걱정거리가 있을 때, 그러니까 주체는 '상대방의 문제'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지'가 잘못해놓고 '지'가 '문제없다'고 말한다. 기차가 연착이 되어도, 밥이 늦게 나와도, 물을 내게 엎질러도 언제나 '문제없다'고 이야기한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긴 버스여행 중에 화장실을 들르기 위해 잠깐씩 휴게소에 선다. 우리나라 같으면 '15분'이라는 시간약속을 하고 그것을 칼같이 지킨다. 여긴 예정 약속도 없다. 그러면 성질 급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혹시나 자기를 버려두고 갈까 봐 총알같이 화장실을 다녀온다.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났는데 버스는 갈 생각 안 한다. 참고 인내하고 또 참다가 화를 낸다. 그러면 돌아오는 말이 이거다.

"노프라블럼! 버스운전기사가 이 동네 친구가 있어서 얘기 좀 하다가 온대."

우리나라에서 있을 수 없는 크나큰 문제가 이곳에서는 하나도 문제되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런 상황에서 아무도, 정말 아무도 화내지 않는다는 거다. 아무도 화내지 않는데 혼자 열받고 항의하고 있는 사람은, 언제나 한국사람이다.

케냐에 있을 때, 동행했던 조흭이 말라리아 증세를 보여서, 신종플루 체크도 할 겸 병원에 간 적이 있었다. 피를 뽑기 위해 6시간을 기다렸다. 역시 그때도 모두들 묵묵히 그냥 마냥 기다리고 있는데, 답답해 속이 터진 우리만 번갈아가며 "피만 뽑으면 되는데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냐" 항의했다. 돌아오는 답은 "노프라블럼, 기다려"였고 결국 순서대로 순리대로 천천히 깜깜한 밤이 되어서야 피를 뽑을 수 있었다.

#2. 에브리데이, 에브리바디, 하쿠나마타타

'하쿠나마타타'는 스와힐리어(아프리카 공용어)로 문제없다는 뜻이다. 아마도 이 사람들이 잠보(안녕) 다음으로 많이 쓰는 말일 것이다. 이런 문화에 적응하는 건 사실 쉽지 않았다. 1분 1초를 다퉈야하는 서울에서 살다가, 뭘 해도 기본 몇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야 하는 게 처음엔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화를 내도 변하지 않는 상황을 뼛속까지 느끼고부터는 그렇게 '분명 문제가 있지만 문제없는 것'들에 대해 천천히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어떨 땐 이 사람들이 너무 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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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풍경 심부름 하기 위해 들렀던 현지인 시장, 조금 무섭기도 했다 ⓒ 박진희


조이홈스 고아원은 시골에 있었기 때문에 가끔 케냐 나이로비까지 물건을 사러 가야 할 때가 있었다. 몇 가지 물건을 사오는 심부름을 맡게 되어, 나와 현지인 두 명은 원장님의 차를 빌려 나이로비로 갔다.

심부름은 이런 것들이었다. 약국 가서 모리슨 여드름 치료제 사기, 현지인 시장가서 양배추 80개 사기, 만다지 가루 사기, 우편물 가져오기 등. 그중에 가장 먼저 할 일은 약국에 가서 조이홈스 고아원생인 모리슨의 여드름 치료제를 사는 것이었다. 굉장히 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처음엔.

동행자였던 현지인 마하나는 약국에 들어서자 주머니에서 하얀 약통을 꺼냈다. 샘플로 가져온 모양인데, 헉! 이럴수가, 약통엔 아무것도 적혀져 있지 않았다. 오로지 원장님이 써놓은 한국단어만 적혀 있었다 '모리슨 약'. 나 외에는 아무도 알아볼 수 없는 글자다. 게다가 빈통이었다. 마하나는 약사에게 뭔가 열심히 설명했다. 나는 마하나는 쿡쿡 찌르며 "그냥 약 이름을 대면 되잖아"라고 말했다. 그때, 나를 시커먼 미궁 속으로 빠뜨릴 한 마디가 마하나에게서 나왔다.

"약 이름을 까먹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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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인시장 양배추 하나에 500원하는 싼 현지인 시장 ⓒ 박진희


모든 심부름을 이행하기까지 걸릴 예상 시간을 '두 시간'으로 잡았으나, 첫 번째 미션도 수행하기 전에 예상 시간은 이미 지났다. 약국만 다섯 군데를 넘게 찾아다녔다. 그러면 뭘하나. 빈 약통으론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그런데도 이 현지인 친구는 입버릇처럼 '노프라블럼'을 외치며 약국을 찾아다녔다. 난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원장님께 전화를 걸어, 약을 찾을 방도가 없다고 말했다. 원장님은 "그럼 그 심부름은 패스 해"라고 말했다.

"마하나, 모리슨 약은 그냥 패스하래."

그랬더니, 마하나는 금방 고개를 끄덕이며 "싸와(OK)" 하더니 돌아섰다. 나는 갑자기 화가 났다. 지금 두 시간째 이러고 있었는데 반응이 고작 "오케이"라니. 나는 마하나를 길거리에 세우고는 "뭐? 싸와? 우린 여기서 세 시간을 길거리에 낭비했는데, 넌 화도 안 나냐?" 했더니. 마하나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누가? 누가 화가 났어? 누가 화를 내야 되지? 왜?"

#3. 가끔은 나도 그렇게 쿨하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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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주세요 점심시간이면 자기 밥그릇을 들고 우갈리 배급받는 아이들 ⓒ 박진희


퇴근길 만원버스, 아직도 녹지 않은 눈길에 또 교통체증에 버스가 많이 지체된 모양이다. 오래 기다린 아주머니 한분이 버스에 타자마자 다짜고짜 화를 냈다. 30분 넘게 기다렸다고.

이 추운 날 30분을 밖에서 떠는 것 정말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사실 그게 또 기사님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기사를 향한 아주머니의 신경질은 결국 화를 불러일으켰다. 두 사람의 싸움이 계속 되는 버스 안에서 나는 읽던 책을 덮고 늘상 '노프라블럼'이던 아프리카를 떠올렸다.

사실 서울에서 통하지 않는 공식이지만, 아주 가끔씩은 쿨하게마저 보이는 그들의 생활방식을 닮고 싶단 생각이 든다. 그곳은 지금 또 어떤 시간이 천천히 흐르고 있을까, 또 어떤 사람에게 '하쿠나마타타'를 외치고 있을까.
#아프리카 #문제없어 #박진희박 #여행 #하쿠나마타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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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담도 순식간에 뒤집어 즐겁게 살 줄 아는 인생의 위트는 혹시 있으면 괜찮은 장식이 아니라 패배하지 않는 힘의 본질이다.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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